영혼에 밤이 찾아오면 모든 겉치레를 벗어버린 내가 드러난다.
날카로운 두 눈이 나를 응시한다. 처진 쌍꺼풀이지만 아주 커다란 눈망울, 그 위로 올려세운 네모난 안경이 나를 삼킬 듯 노려본다. 안경알이 전등에 반사될 때마다 번뜩번뜩 초록빛이 일렁인다. 흡사 어둠에 숨어서 먹잇감을 노리는 산짐승의 갈퀴눈 같다. 아니다. 산짐승이 아니라 맹수다. 맹수는 숨지 않는다. 밝은 달빛에 드러낸 대살 진 몸뚱이로 먹잇감을 짓밟고 갈기갈기 찢어 놓는다.
“페이지 23쪽, 이 이론이 여기에 맞게 들어갔니? 이 소설의 인물들이 전체 여성을 대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페미니즘 연구가 활발한데 왜 하필 네 논문을 읽어야 하는 거지? 그다음에 23쪽…….”
땀이 삐질삐질 흐른다. 눈앞이 뿌옇다. 정신을 놓지 않으려 안간힘을 써가며 대답을 이어 간다. 그럴수록 더 어려운 질문이 쏟아진다. 이것은 대답을 듣기 위한 질문이 아니다. 정해진 심사 시간이 훌쩍 넘어 시침과 분침이 메마른 침을 삼키며 달려간다. 심사회장은 온통 안경 교수 한 사람의 질타로 가득 찼다. 사람들이 슬그머니 짐을 싸서 나가는 건 막차 시간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철제 의자가 끼이익 하고 바닥에 마찰음을 낼 때마다 심장의 울음소리가 새어 나오는 것만 같다.
질문을 대포처럼 쏘아대던 교수는 흡족한 얼굴로 안경을 빼 든 채 유유히 강의실을 퇴장한다. 만신창이가 된 내게 사람들은 쉬이 말을 걸지 못 한다.
“고생했어. 내가 다 미안하네.”
인자한 얼굴의 권 교수는 내 손에 5만 원 권을 쥐여주며 맛있는 음식을 사 먹으라고 한다. 이 정도면 됐다고, 통과할 거라던 지도교수는 푸석살 진 손으로 앞머리를 쓸어올릴 뿐 아무 말이 없다. 수많은 밤을 지새우며 작성한 나의 ‘여성 인물 연구’는 그렇게 끝이 났다.
지난 학기, 안경 교수의 제자가 논문심사에서 탈락했다. 과에서 가장 입김이 세고 전통적인 부촌에 살고 있으며, 대통령과 정·경계에서 화환을 받는 안경 교수의 제자라는 건, 다른 교수들이 건드리기 어려운 학생이라는 뜻이다. 안경 교수의 일이라면 다들 못 이기는 척 넘어갔다. 그러다 예외가 발생했다. 안경 교수의 제자가 본심사도 아닌 예비 심사에서 떨어진 것이다. 안경 교수는 분노에 타올랐다. 다음 논문심사 대상자는 두고 보라며 이를 갈았다. 불행히도 그게 나였다. 안경 교수는 내 논문의 심사위원이 아니었지만, 심사장 가장 앞줄 한가운데에 앉아 불을 뿜었다. 이제 막 조교수로 임용된 내 지도교수는 학과의 허드렛일을 도맡는, 힘없는 막내였다. 나는 안경 교수의 모든 분노를 뒤집어쓰고 바람에 나부끼는 재처럼 날려갔다.
얼마 후 유일한 희망과도 같았던 내 자작 소설은 신춘문예 최종 심의에서 탈락했다. 대학원 사람들의 연락처를 차단하고 SNS를 끊었다. 논문을 다시 쓴다 해도 지도교수가 힘이 생기거나 안경 교수가 퇴직할 때까진 통과하지 못할 거라는 절망감에 휩싸였다. 방 안에 가득한 논문 자료를 몇 상자나 갖다 버렸다. 소설이 지도교수의 얼굴처럼 보였다. 더 이상 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 대학원에서 보낸 모든 시간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인간관계와 창작 활동을 멈추자 수많은 질문이 나를 따라다녔다. 내가 진정 바라는 게 등단인가? 석사 학위인가? 대학원에 들어갈 때, 단순히 글을 배우고 쓰기를 바랐다. 나머지는 다른 사람들을 모방한 것에 불과하다. 성난 들소무리처럼 쫓아가던 ‘등단’에 의구심이 들었다. 자랑처럼 벽면을 가득 채웠던 상장들이 장난처럼 느껴졌다. 아픔이 충치처럼 달라붙어 속을 헤집었다.
매서운 겨울도 끝이 있기 마련이다. 시간의 품에 안겨 흙탕물이 정화되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철학자 시몬 베유는 『중력과 은총』을 통해 “인간은 스스로를 비움으로써 자기 자신을 둘러싼 우주의 압력에 노출된다”고 역설한다. 빈자리에 참 자아가 얼굴을 내민다. 영혼에 밤이 찾아오면 모든 겉치레를 벗어버린 내가 드러난다. 단테의 『신곡』 중 「지옥」 편에서 주인공인 단테를 구하는 것은, 평생 사랑했던 베아트리체다. 나의 베아트리체는 글을 짓는 일이다. 오랜 시간을 돌아 다시 펜을 든다. 시든 밤공기에 하얀 숨결처럼 문장을 내뱉는다. 학위나 등단, 어떠한 희망이나 두려움 없이 나와 마주한다. 쓰지 않을 수 없어서, 숨을 쉬기 위해서, 마치 이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나는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