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릴케는 산다는 것은 ‘질문을 사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 삶을 파고드는 수많은 생채기 중에서 가장 큰 흉터는 죽음이 아닐까. 빛을 잃어가는 창백한 얼굴, 다신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지만, 영원히 기억 속에 남아있을 그리운 얼굴. 누군가의 마지막을 목도하는 건 그 탄생만큼이나 쓰고 신비하며 끝내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얼마 전, 건강검진 결과를 상담받기 위해 대학 병원을 찾았다. 매번 우편으로만 결과지를 보다가 직접 대면 상담을 받은 건 처음이었다. 특별히 이상이 있어서는 아니고 제대로 결과 분석하는 방법을 알고 싶어 상담 신청을 했다. 상담 교수는 가을철 바닥에 떨어진 도토리 껍질처럼 메마르고 높새바람 진 태도로 채 5분도 안 되어 진료를 마쳤다. 괜히 시간만 낭비했다 생각하며 버스 정류장으로 돌아가는데, 안내 직원이 장례식장을 통과하면 훨씬 빨리 나갈 수 있다고 귀띔했다.
장례식장은 평지보다 낮고 깊숙한 곳에 자리했다. 미로 같은 계단을 지나 차단된 통로 옆에서 슬픔을 흩날렸다. 큰 대학 병원에서 의사나 간호사 같은 전문가도 없이 외딴 침묵을 유지했다. 병원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연관이 없길 바라지만, 이미 모두와 필연의 관계를 가진 망종은 그곳에서 영면에 든다. 장례식장에 갈 때면 지인 여부와 관계없이 끝없는 망망대해 앞에 마주한 기분이다. 삶이 두려운 이유는 죽음을 알 수 없어서이지 않을까? 온몸을 덥히는 혈액이 남김없이 빠져나가고 표백한 듯 온몸이 깨끗해진다. 당연하게 콩닥거리던 심장은 길을 잃는다. 통곡하는 저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자신의 이름을 언제까지 기억할 수 있을까, 어떤 질문에도 굳은 입술은 열리지 않는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리어왕>은 주인공들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리어왕’은 세 딸에게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묻고, 아첨 없이 정직한 사랑을 표현한 셋째 딸 ‘코딜리아’를 내쫓는다. 결국 두 딸에게 버림받고 광기에 시달리던 리어는, 코딜리아를 애타게 찾지만 만남과 동시에 그녀가 죽게 된다. “아냐, 아냐, 아냐, 아냐. 자 우리, 감옥 가자./ 우리 둘만 새장 속의 새들처럼 노래하리.” 리어와 코딜리아는 죽음을 ‘감옥’처럼 여기지만 새장 속의 새들처럼 자유롭게 노래하자 외친다. <리어왕>의 역자인 최종철 교수는 이 장면을 이렇게 평한다. “리어는 크나큰 고통으로 죗값을 하였다. 신들이 정당하다면 코딜리아의 목숨을 앗아가서는 안 되리라. 그래서 리어는 그녀의 죽은 몸에서 삶을 본다. 흙처럼 죽은 그녀에게서 깃털을 움직이는 숨결을 보고, 죽음의 침묵 속에서 나직하게 속삭이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창백한 그녀의 입술에서 생명의 붉은 빛을 보라고, “여길 봐, 여길봐!”(5. 3. 309)라고 외치면서 죽는다." (<리어왕>, 민음사, 2005, 작품 해설 중에서, p.219) 모든 삶과 죽음이 리어처럼 원대하지 않더라도 누구의 죽음도 가볍진 않다. 아무도 확신할 수 없는 사후 앞에 절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엄마가 주신 도토리묵으로 무침을 만들어 먹었다.>
부모님 산에서 도토리를 주워다 묵을 쑤어 먹었다. 물론 엄마의 솜씨다. 열매가 다 떨어진 상수리나무는 코르크가 갈라지고 짙은 갈색의 얼룩이 사방으로 벌어진다. 마치 소멸을 기다리는 아궁이 속 장작 같다. 파커 J. 파머는 인생을 사계절에 비유해 설명한다.
“가을은 새 생명의 전조로서 매일 죽음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만약 내가 가을의 쇠락에 도전하는 생명을 ‘만들려고’ 한다면, 그 생명은 잘 해야 생기라곤 없는 인공적인 것이 되고 말 것이다. 하지만 삶과 죽음, 죽음과 삶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인정하면 내가 받은 생명은 진짜이며 생기 있는 것으로 열매 맺을 것이며 완전한 것이 될 것이다.” 억지로 불을 밝힐 수 있는 건 인공조명뿐이다. 인공조명은 생명을 피곤하게 만든다. 잠을 깨우고 억지 생산을 늘린다. 꼭 필요할 때를 제외하곤 어두울 때는 불을 끄고, 잠자리에 누워 편히 쉬는 게 낫다.
<이번 여름, 서울 남산타워에서 찍은 야경. 잠들지 않는 도시, 서울이다.>
삶은 죽음을 포함한다. 활기 없고 따분하고 쓸모없고 무기력에 시달리며 죽음처럼 서러운 날도 있다. 시인 릴케는 인생을 고독한 축제로 본다. <인생을 이해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시에서 “길을 걷는 아이가/ 바람이 불 때마다 실려 오는/ 많은 꽃잎을 개의치 않듯이,” 그저 하루하루를 일어나는 그대로 받아들이라 말한다. 장례식장을 지나 버스 정류장에 섰다. 가을답지 않게 뜨거운 햇발이 솔개그늘 하나 만들지 않고 정수리에 내리 꽂혔다. 그늘이라곤 내 몸을 통과한 빛뿐이다. 그림자를 보며 내가 살아있음을 실감한다. 살아가는 이유를 찾지 못하는 날에도 그저 살아있을 뿐이다.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을 모으지 않고 흘려보내듯, 제대로 살지 못한 것 같은 날도 나쁠 것 없는 인생의 한 틈이다.
작성일 2022.1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