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기후, 침묵, 고독, 함께 있는 사람에 따라 눈부시게 달라진다
공자 가라사대,
<많은 사람은 자기보다 높은 곳에서, 혹은 낮은 곳에서 복을 구한다. 그러나 복은 사람과 같은 높이에 있다>던가. 지당한 말씀! 따라서 모든 사람에겐 그 키에 알맞은 행복이 있다는 뜻이겠네. 내 사랑하는 제자여, 스승이여. 이즈음의 내 행복도 그렇다네. 나는 내 키높이를 열심히 재고 있다네. 자네도 알겠지만 사람의 키높이란 늘 같은 게 아니라서 말일세.
인간의 영혼이란 기후, 침묵, 고독, 함께 있는 사람에 따라 눈부시게 달라질 수 있는 것이네!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134-135면-
카잔차키스의 말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공자의 눈높이 행복론에 정당한 반기를 든다. 사람의 키높이는 늘 같은 게 아니다.
나의 마음은 아침과 점심, 이른 오후와 늦은 저녁 모두 제각각이다. 희망과 절망 사이를 끊임없이 진자 운동한다. 일정한 주기는 없지만 특정한 요인은 있다. 바로 아이다.
오늘 쪼끄마니가 아파서 어린이집에 가지 못했다. 어린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은 끊임없이 요구와 요구와 요구로 점철된다. 자기 일에 책임지지 않는 수많은 사고들을 수습해야 하고, 말도 안 되는 요구들을 제지하고 갖은 울음을 달래주고 혼내야 하는 것인지 어루만져 줘야 하는 것인지 판단해야 한다. 아직 어려서 사고를 많이 치는 둘째는 나의 체력을, 감수성이 풍부해서 감정선이 투명한 첫째는 심력의 한계를 바닥나게 한다.
내 눈높이의 행복은 무엇인가? 오늘 나의 행복은 혼자 있는 시간에 있다. 아이들이 물놀이하는 시간에 짬을 내어 글을 쓰는 이 시간이 나의 행복이다.
바우어새는 숲 속의 온갖 것들을 모아다가 아름다운 정원을 만든다. 수컷 바우어새는 암컷 바우어새에게 풍요로운 정원으로 청혼한다. 애면글면 만든 단 하나의 특별한 정원이다. 빨간 열매와 주황색 구슬을 모으고, 검은 장식과 초록 보석을 갖다 놓는다. 다양한 소리를 흉내 내고 구애의 춤을 춘다.
아이가 길을 가다 비비탄을 줍는다. 하얀색을 주워도 기뻐하지만 초록색이나 노란색, 파란색, 빨간색 같이 특이한 색깔을 줍는 날은 기분이 하늘을 날아다닌다. 투명한 보석 스티커를 햇빛에 비춰보며 보석을 주웠다고 기뻐한다. 그런 아이를 볼 때마다 바우어새를 떠올린다.
[사진출처 :https://creativestudio.kr/2961]
어린 자녀를 돌보는 시간은 내 눈높이를 한없이 낮아지게 만든다. 사소한 일에도 지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할 무기력함과 차고 넘치는 분노로 가득 채운다.
아기는 늘 살을 맞대고 어딘가 나의 몸에 기대고 앉는다. "엄마 가티(엄마 같이해요.)", "엄마가! (엄마가 해주세요.)"라는 말들이 하루 종일 쏟아질 때면 참 지친다. 난데없이 "엄마 샤람해(엄마 사랑해요)"같은 말은 다시 일어날 힘을 부여해준다. 다시 나를 사르며 요구를 힘차게 들어준다.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나의 아름다운 정원이다. 별의별 것들을 다 모아 세상에 단 하나, 특별한 정원을 만든다. 내모든 것을 쥐어짜서 만든, 모든 걸 다 합쳐 만든 정원이다. 지금 각자의 발길이 멈춘 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그곳이 각자의 아름다운 정원이듯이 말이다. 이 시간들이 쌓여 누군가에게 선사할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될 것이다.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나의 시간을 가득 채워서 보낸다.
"이 정원을 너에게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