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원래 다 그래, 그래서 사랑만 잔뜩 받아야 하는 거야
김사인 시인이 지은 <풍경의 깊이>라는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바람 불고
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
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다.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순간,
의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
우주의 저녁 한때가 비로소 저물어간다."
사람들의 시선보다 훨씬 아래, 작은 바람에도 거세게 흔들리는 가녀린 풀들이 꼭 아이들같이 느껴진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었다고 해도, 아이들의 의견은 쉽게 무시당하고 인격적 대우를 받기 힘들다. 아이보다 어른의 생각이 더 낫다고 여기고 그 인생마저 재단하러 들 때가 얼마나 많은가. 어른들의 모임을 위해서 아이들이 방치될 때는 또 얼마나 잦은가. 하지만 시인은 말한다. 그 외로운 떨림으로 인해 우주의 저녁 한때가 비로소 저물어 간다고. 어린 자녀를 키우는 나는 그 말을 아이들이 있어서 우주의 시간이 움직인다고 멋대로 해석해 본다.
아이들이 잠든 저녁이나 유치원과 학교에 간 아침이면 비로소 시간의 결이 느껴진다. 아침부터 공기 사이를 층층이 파고든 따가운 햇살이나 베란다를 통해 그제야 깨닫는 집 밖의 소음 따위가 아이들 너머 또 다른 세상이 존재함을 깨닫게 한다. "엄마, 엄마!" 외치며 자기가 만들었다며 손을 잡아끌고 보여주던 귀여운 꼬마 작가의 작품들이 새삼 위대하게 다가온다. 구석구석에서 느껴지는 아이의 손길과 주변 친구에게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이는 새로운 기법들이 앙증맞다. 옆에 있을 땐 정신없이 해야 할 일들을 클리어하고 빠짐없이 챙겨주느라 분주한데 이렇게 조금만 거리가 생겨도 애달픈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바로 옆에서 자고 있는데도 그리운 마음이 들어 아이의 보드라운 배를 쓰다듬고 손을 만지작 거려본다. 급기야 휴대폰 앨범을 열어 아이의 행적을 다시 들여다보는데 그때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동영상 속 아이는 끊임없이 나를 호출하며 말을 건다. 쑥스러움이 많아 밖에서는 누가 말 걸어도 대답도 잘 안 하면서 집에만 오면 호랑이를 잡는다. 물론 그 호랑이는 남편과 나다. 아이들의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주려는 허용적인 남편이 가여운 호랑이일 때가 훨씬 더 많지만.
때로 동영상 속 내 모습이 후회될 때가 있다. 마치 <금쪽같은 내 새끼>같이 집에서 아이와의 상호작용을 촬영한 TV프로그램에서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보고 눈물을 흘리는 부모의 모습처럼,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들리는 내 목소리가 사뭇 이질적일 때가 있다. 나는 한 가지에 집중하면 주변의 소리와 환경을 깨닫지 못하고 깊이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성향은 공부하거나 임무를 완수해야 할 때 빛을 보지만, 여러 가지 필요를 한 번에 융단폭격하는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상황에선 기가 빨린다. 먼저 중요한 것을 완료하고 다음으로 넘어가고 싶은데 아이들은 왜 자기 먼저 해주지 않냐고 토라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 동영상 속 짧은 대화지만 그 내용에서 느껴지는 나의 해결지향적 성격과 뭐든 빨리 엄마에게 말하고 싶은 아이의 욕구가 부딪힘을 느낀다.
바로 오늘 아침에도 아이를 유치원에 등원시키려 함께 주차장에 갔다. 차에 타려고 보니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부터 계속 교체 알람이 뜨던 왼쪽 방향지시등이 아예 나가 버린 것을 발견했다. 남편에게 상황을 알려주려고 동영상을 찍었는데 화면 속 아이가 계속 나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 상황에 직면한 나는 차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아이에게 대답을 못해주었다. 아이를 등원시키고 남편에게 동영상을 전송하고 다시 보는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른의 시선에선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사소한 대화가 아이에겐 전부일 수 있는데 그깟 방향지시등이 뭐라고 그 짧은 시간, 아이에게 더 집중하지 못했을까.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데, 꼭 행동으로 때리는 게 아니더라도 아이를 더 깊이 받아주지 않는 것도 폭력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 초등학생인 첫째가 학교 숙제로 '내가 투명 인간이 된다면'이라는 주제 글쓰기를 한 적이 있다. 아이가 그때 쓴 내용이 나에겐 너무 충격이었는데 '보이지 않게 되면 부모님을 만날 수 없기 때문에 너무 슬플 것이다. 그냥 죽어 버리는 게 나을 것 같다. 부모님이 안 계시면 살 수 없기 때문이다'라는 식으로 써놨던 걸로 기억한다. 첫째에게 부모가 없어도 충분히 살 수 있고, 주변에 돌봐주고 사랑해 주는 사람이 많다고 설명했지만 아이가 얼마나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다. 아이에게 이 주제는 '타인에게 보이지 않는 사람'에 초점이 가 있는 게 아니라 '어디든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존재'를 말하는 것이라고 설명해 주자 내용을 바꾸긴 했지만 그 내용이 내 맘 속 깊숙이 남았다.
첫째는 나보다 훨씬 현실적인 성향을 지녔다. 아이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정보를 선호하고 명확하고 측정 가능한 수치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싶어 하고 상황에 동일한 규칙을 세우길 원한다. 공감과 감정의 조화가 중요한 나는 아이와 반대 지표에 서 있어서 때로 서로의 행동을 오해하기도 하지만, 다름을 통해 배우고 성장할 때가 더 많다. 아이의 깔끔한 감정 정리와 뒤끝 없는 언행이 이제는 나에게 신뢰와 안정감을 준다. 아이 덕분에 부정적인 감정을 오래 끌고 가지 않고 빠르게 끝내는 법을 배운다. 처음엔 내 감정을 무시당한다 생각하고 아이가 어떤 마음인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이제는 그냥 그게 전부란 걸 안다. 감정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한번 얘기했으면 끝, 상황을 이해하고 수용하면 넘어가는 것이다.
한 번은 첫째가 실수로 나를 다치게 했다. 내가 아파서 몸을 둥글게 말고 끙끙대자 아이는 "엄마 미안해"하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문득 아이가 너무 조용해 눈을 들어 보자, 아이는 엉뚱한 먼 산을 바라보며 굳어있었다. 사랑하는 엄마를 다치게 한 아이의 마음이 얼마나 무너져 내리길래 저렇게 어찌할 바를 몰라 기가 확 죽어있을까 싶어 태연하게 말했다.
"꿀동아, 엄마 여깄는데 어디보고 있는 거야. 한번 미안하다고 했으면 된 거야. 미안하면 와서 뽀뽀해 줘야지 엄마 뱃속에서 나온 사람이 그렇게 모르는 사람인 척, 창문만 보고 있을 거야? 꿀동이가 뽀뽀를 해줘야 엄마가 힘이 솟아오르지. 엄마한테 미안할 땐 와서 안아주고 뽀뽀해 주면 돼."
아이에게 상황에 따라 정확한 행동 방향을 알려주면 아이는 "아. 그렇구나"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얼굴이 밝아진다. 아이는 내 볼에 뽀뽀를 연달아하며 사랑을 퍼붓고 나도 부정적 감정을 잘라내며 아이를 더 깊이 용납한다. 이제 아이는 나에게 혼나거나 자신이 잘못했다고 판단될 때면 사과 후에, 다가와 꼭 안고 뽀뽀를 한다. 그 행동은 아이의 노력이고 진심이고 사랑이다. 아이가 그럴 때면 나도 응한다. 내 감정을 추스르고 생각을 끊어내고 다시 아이와 눈을 맞춘다. 훨씬 더 많은 경우에 내 생각을 말하는 것보다 참는 것이, 정보를 구한답시고 다른 아이와 비교하는 것보다 차라리 모르는 것이 낫다.
종종 그런 생각을 한다. 만약 이 아이들이 나보다 훨씬 크고 나이도 많고 큰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내가 똑같이 행동할 수 있을까? 이 아이들의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님을 인정하고 있다면 내가 맘대로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 이 아이가 자란 10년의 시간이 너무도 빨리 흘렀듯이 성인이 될 앞으로의 10년도 유수처럼 흘러갈 텐데 지금 당장 내가 이 아이보다 조금 더 힘을 가진 어른이라고 해서 알량한 권력을 휘둘러선 안된다는 경계심을 갖고 산다.
아이들을 돌보며 내가 생각하는 가장 큰 화두는 '존중'이다. 첫째와 둘째 각자가 가진 인격과 다름을 존중한다. 아이들과 친밀해지고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갈수록 어떤 기질과 성향을 가졌는지 더 많이 알기 원하고 마음껏 두 날개를 펼치도록 돕고 싶다. 나는 아이들에게 자주 이런 말을 한다.
"꿀동아 네가 뭘 좋아하는지, 뭐가 더 좋은지, 뭘 하고 싶은지 엄마에게 늘 말해줘야 해. 더 많이 알려주고 얘기해 줘. (아이가 기뻐서 활짝 웃는다) 엄마가 원하는 건 바로 그 얼굴이야!"
아이들이 직접 선택하다 보면 어른이 보기에 최선이 아닐 때도 있고, 별로 일 때도 있고 실패라고 느껴질 때도 많다. 그럴 때면 아이들도 스스로 깨닫는데 그때마다 내가 입버릇처럼 달고 사는 말을, 이제는 아이들이 먼저 내뱉는다.
"엄마, 원래 아이들은 이런 거야? 그래서 어린이인 거지? 엄마, 아빠도 어렸을 때 이럴 때 많았어? 잘 못해도 괜찮잖아. 언제나 생명이 제일 소중해!"
실수해도 뻔뻔하게 얼굴을 들이밀고 어린이는 원래 그래, 하며 당당한 아이가 사랑스럽다. 나는 둘째의 작은 코를 손으로 톡톡 두드리며 대답한다.
"그럼. 맞아. 우리 꽃동이 정말 똑똑하다. 그래서 어린이는 사랑만 잔뜩 받아야 해."
늘 그랬으면 좋겠다. 비난보다 칭찬을 더 많이 받고, 잘 못해도 지지와 응원 속에 힘을 얻으며, 잘못된 거 아닐까 두려운 순간에도 '괜찮아 원래 다 그런 거야' 하고 털어 버릴 수 있고, 세상이 등을 돌리는 것 같아도 '나에겐 엄마가 있어'하며 스스로 외로움 속에 갇히지 않기를. 타인의 기대보다 자신의 내면에 귀를 기울이고 타고난 강점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길, 내가 용납받은 만큼 타인을 품어주고 용서의 미덕을 베풀며 마음의 짐에서 자유로워지길! 내 손에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 아이들에게 더 많은 것을 베풀어 줄 순 없지만, 이 빈 손을 곱게 모아 오늘도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