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돋을볕 Dec 22. 2021

실수하더라도 함께 가자

인생이 언제나 춤추는 일만으로 가득 찬 것은 아니다.

2021.12.22


살아간다는 건 서로를 끊임없이 건드리는 일이다. 왕에게만 '역린'이 있겠는가? 모든 사람들에게 거꾸로 솟은 비늘이 있고 닮은 곳이라고는 한 구석 밖에 없는 것 같은 이 땅의 사람들은 서로의 역린을 끊임없이 건드리며 생활한다.


알면서 건드리고 몰라서 피를 거꾸로 솟게 한다. 검은 머리의 숨 탄 것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관계'가 아닐까? 더 깊이 들여다보면 관계를 통해 드러나는 나의 '역린'일 지도 모르겠다. 나의 모순과 부족함과 잘라지고 엇댄 부분들이 드러날 때마다 어떻게든 부정하거나 감추려고 보호 기제를 무의식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많이 사용해왔고 가장 효율적이었던 과거의 방법들을 끄집어낸다.


만병통치약은 없다. 과거에 유효했다고 지금도 적재라고 할 수 없다. 어릴 때 친구였다고 한 평생 단짝 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부서지고 틈이 벌어진 사이로 볕뉘가 들어온다. 모자람을 인정할 때, 바닷물처럼 쓸려 들어와 나를 채우고 바꾸는 힘이 시작된다. 부서진 난파선은 아무 쓸모가 없어 보여도 아름다운 산호와 다양한 물고기들의 보금자리가 된다. 상처만 남기는 것 같아 보이는 부딪힘도 나를 둥글고 빛나게 만들어주는 도움의 손길이다.


끊임없이 자기를 열고 새로운 지식과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원하는 대로 해석하게 된다. 시간이 갈수록 편협하고 옹졸하고 두려움이 가득한 사람이 된다. 돌덩이처럼 굳은 자아가 자기를 보호하기는커녕 악취를 뿜고 주변인들을 숨죽이게 하는 무석無石이 된다.



 천 년 전 페르시아에서 태어난 시인 루미는 일찍이 이렇게 노래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여인숙과 같다.

매일 아침 새로운 손님이 도착한다.


기쁨, 절망, 슬픔

그리고 약간의 순간적인 깨달음 등이

예기치 않은 방문객처럼 찾아온다.


그 모두를 환영하고 맞아들이라.

설령 그들이 슬픔의 군중이어서

그대의 집을 난폭하게 쓸어가 버리고

가구들을 몽땅 내가더라도.


그렇다 해도 각각의 손님을 존중하라.

그들은 어떤 새로운 기쁨을 주기 위해

그대를 청소하는 것인지도 모르니까.


어두운 생각, 부끄러움, 후회

그들을 문에서 웃으며 맞으라.

그리고 그들을 집 안으로 초대하라.

누가 들어오든 감사하게 여기라.


모든 손님은 저 멀리에서 보낸

안내자들이니까.


_<여인숙>, 잘랄루딘 루미



찾아오는 손님이 기쁨, 절망, 슬픔이다. 약간의 순간적인 깨달음도 예기치 않게 온다. 할 수 있는 일은 청결하게 가꾼 여인숙에 환영하고 맞아들이는 일이다. 그 모두를 환영하고 맞아들이라 한다. 설령 슬픔이 군중처럼 몰려와 내 감정을 난폭하게 쓸어가 버리고 일상을 망치더라도.


각각의 손님, 즉 모든 감정을 존중할 때 새로운 기쁨이 오고 내면의 청소가 시작된다. 어두운 생각, 부끄러움, 후회조차 웃으며 맞이할 방문객이다. 초대하고 누구든 감사하게 여기자고 한다. 모든 손님은 저 멀리에서 보낸 안내자들이다.




인생이 언제나 춤추는 일만으로 가득 찬 것은 아니다. 스캇 펙은 "삶은 고해"라고 했다. 삶은 고통으로 가득 찬 바다다. 위로보다 고난이 더 많고 내 마음을 알아주는 이보다 상처 주는 이가 더 많다. 첩첩산중, 설상가상, 전호후랑이다. 어둠 속 빛나는 자아를 받아들일 때 알 수 없는 평안이 우리를 가득 채운다. 옆 사람의 부족함을 끌어안을 때 고통의 바다에 작은 등대 하나가 세워진다.



그 마음을 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충분히 당연히 괴로운 일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내 실수를 반성한다,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겠다, 실수를 하더라도 함께 하겠다, 언제든 멈출 수 있다, 무조건 같은 편이 되어 주겠다, 내가 돕겠다, 잘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다, 믿는다, 너무 고생한다.




배우자가 근무지에서 속상한 일을 겪었다. 우울하고 침체되어 대화를 하자고 했다. 대화라면 늘 하는 것인데 이렇게 자세를 잡는 게 좋지 않은 일이라는 걸 예감했다. 배우자는 절망에 빠져 미래를 암울하게 내다보고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결과를 도출해냈다. 그 말에 공감할 수 없었다. 분노와 절망감이 전이됐다. 결국 서로에게 상처만 남긴 채 대화가 끊겼다.



다음날 먼저 마음을 전했다. 속상한 말을 하고 이해해주지 못한 것에 대해, 나의 부족함과 실수에 대해 사과했다. 저녁에 배우자가 좋아하는 음식을 시켜 먹었다. 상황은 달라진 게 하나도 없지만 마음에 기쁨이 솟아났다. 실수하고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함께 하겠다고 말했다. 지지하고 공감하고 믿고 같이 책임지며 단단하게 살아가자고 약속했다. 집이 아주 호듯하다.




작가의 이전글 일주일에 최소 한 편의 글을 약속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