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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돋을볕 Apr 04. 2024

엄마의 두 종류, 워킹맘 vs 전업맘

주부는 주변인도, 불온전한 자리도, 사회에서 도태되는 잉여인력도 아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엄마가 있어 보인다. 워킹맘과 전업맘. 대체로 일을 하는 워킹맘은 엄마 모임 가입과 사교육 정보, 아이 돌봄 등에 관한 고민을 하고 주부로 있는 전업 맘은 경력 단절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다. 나는 후자에 속한 전업맘으로, 이십 대 중반에 결혼해 지금은 서른 중반이 되었다. 국가통계포털에 따르면 내가 결혼하던 해에 평균 초혼 나이가 남성 32.21세, 여성 29.59세라고 하니 평균보다 4~5년 정도 이르다고 볼 수 있겠다. 같은 사이트를 보면 첫 출산 연령은 30.73세에, 둘째는 32.62세에 낳는다고 한다. 나는 결혼 후 바로 아이를 가져 서른 중반인 지금 첫째가 초등학교 4학년, 둘째가 만 5세이니 이 또한 빠른 편이다.


  결혼과 출산뿐만 아니라 내 인생의 수레바퀴는 빠르게 도는 톱니날과 같았다. 빠른 생일이라 학교도 1년 빨리 들어갔고 대학도 열아홉 살에 갔다. 휴학 한 번 없이 스물세 살에 4년제 대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에 대학교 교직원으로 바로 취직을 했다. 그다음 해에는 대학원에 진학했으며 밤에는 논문을 쓰고, 낮에는 일을 했다. 시간이 모자라 늘 쪼개 쓰는 삶이었지만 내가 고생하는 만큼 성취와 인정이라는 달콤한 열매가 돌아오는 시기였다. 또한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어린 나이' 혹은 '사회 초년생'이라는 방패는 나의 미숙함을 꽤 잘 감추어주었던 것 같다.

통장에 내 명의의 월급이 꼬박꼬박 들어 오던 때. 벌써 10년전이다

  

  문제는 건강이었다. 서울에서 혼자 자취하며 주경야독으로 지내니 밥을 잘 차려먹을 수가 없었다. 원래 밥을 먹을 때도 배부를 때까지 먹지 않고 조금씩만 먹는 데다가 식욕이랄 게 없는 사람이다. 친한 친구는 나에게 '고양이 밥' 혹은 '새 모이'를 먹는 것 같다고 했다. 바쁠 때엔 식사를 거르고 단백질 바를 손가락 반개만큼 나눠 먹었다. 일부러 다이어트를 하는 게 아니라 먹는 것 자체의 즐거움을 몰랐다. 음료수 한 캔을 다 마셔 본 적도 없었고, 아침엔 양배추와 요구르트를 갈아 마시고 저녁으로는 떡볶이를 종이컵 한 개 분량만큼 사서 먹었다. 이렇게 보면 경악스러울지 몰라도 그땐 그게 그저 자연스러운 내 생활이었다. 무언가를 먹을 시간조차 사치스럽게 느껴졌다. 할 일이 늘 넘쳐 났고 자기 계발도 해야 했으며, 저녁엔 대학원 수업과 논문 준비로 벅찼다. 자주 응급실을 들락 거렸다. 큰 병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스트레스가 많았다. 스트레스는 몸 안에 독소처럼 천천히 쌓여갔다.


  4년 가까이 대학교 교직원으로 일을 하다 남편과 결혼을 한 이십 대 중반에 쉼이 찾아왔다. 남편의 직장과 내 직장은 너무 멀어 그 사이에 집을 구할 수가 없었다. 내가 직장을 그만두고 남편의 회사가 있는 지역에 집을 구했다. 생전 처음 와보는 지역에 집을 구한 건 집값 때문이었다. 남편과 내가 그때까지 일하며 모아둔 돈으로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아파트였다. 그러나 교통도 생활도 너무 불편했다. 바로 아이가 찾아와 친구를 만나러 서울에 가기도 힘들었다. 친구들은 이제야 취업과 소개팅을 시작하는데 내 삶은 너무 빨리 중지 버튼이 눌린 것 같았다. 다시 일을 할까 몇 군데 서류를 넣고 면접까지 보았지만 합격했음에도 입사하지 못했다. 한 군데는 아주 먼 지방으로 이전을 앞둔 공기업이었고, 또 다른 곳은 집에서 교통이 매우 불편한 서울이었다. 우리가 첫 집을 구한 동네는 도시라고도 시골이라고도 할 수 없는 애매한 수도권이었는데, 남편 회사가 위치한 산업단지 외에는 직장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세탁기를 돌리며 내가 이 버튼을 누르려고 밤늦게까지 공부를 하고, 대학과 대학원을 나왔나 하는 자괴감이 밀려왔다. 아이는 너무 귀여웠지만 이따금씩 경력 단절에 대한 두려움이 밀려왔다. 토익 유효기간이 끝난 인생이 유통 기한이 지난 우유처럼 아둔하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다시 서류에 무언가를 채워 넣기엔, 내가 돌봐야 할 생명이 너무 작았다.


  그렇게 십 년이 흘렀다. 아이들이 자라온 만큼 20대의 시절이 전생만큼이나 희미하다. 그럼에도 여전히 다시 일을 해야 하는 건 아닐까, 가정 주부라는 건 직업이 아니지 않나, 너무 아이들만 보고 사는 건 아닌가 하는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질문들이 따라다닌다. 얼마 전, 친한 지인에게 들은 한 조언이 다시 내 머릿속을 휩쓸기 시작했다.


  "돋을볕아, 너도 다시 OO대 XX과라도 들어가서 일 시작해 봐."


  지인은 나를 생각해 해준 말이지만, 나에겐 두려움이었다. 아이 양육에 학업까지 할 수 있을까? 지금도 아이들 보내놓고 두세 시간 있으면 집에 오는데 언제 할 수 있지? 충분히 할 수 있는 건데 내가 너무 게으른 건가. 너무 일을 오래 쉬어서 자신감을 상실하고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 건가.


  고민이 번지면서 치욕적이라는 생각마저 일었다. 이제야 '나' 위주로 살아가던 어린 시절을 벗어나 누군가를 위해 헌신하는 주변인으로서의 삶에 적응하고 기쁨을 느끼고 있는데, 다시 이 자리를 벗어나 무언가를 이루어 내라니. 이건 나에 대한 배신 아닌가? 결코 OO대를 비하하는 건 아니지만, 결국 이럴 걸 왜 나는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교와 대학원까지 들어갔었나 하는 자괴감이 밀려왔다. 허탈감과 상실감마저 들었다. 아니, 이건 주부로 있는 내 삶이 마치 불온전하다는 가정이 깔려있는 말이었다. 워킹맘과 전업맘의 차이는 무엇인가? 소득의 여부다. 내가 소득이 없나? 눈으로 보이는 수입은 없어도 막고 있는 지출은 상당하다. 아침에 아이들을 깨워 따뜻한 아침밥을 챙겨주고, 준비물과 가방을 챙겨 등교/등원시키고, 초등학교에서 오후 1시면 돌아오는 첫째의 방과 후 수업들과 친구 약속, 학원 스케줄 등을 챙기고, 4시에 둘째 유치원 하원시키고, 아이들 간식과 정서적/물리적 돌봄을 책임진다. 월요일엔 첫째 손가락 골절로 정형외과, 화요일엔 둘째 감기로 소아과, 수요일엔 둘째 흉터 치료로 성형외과를 갔다. 교우 관계를 돕고 숙제와 홈 스터디를 봐주는 것만 해도 이미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을 하고 있다.


  세상의 엄마들이 두 종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일하는 사람을 단순히 '회사원' 혹은 '노동자'라고 통칭할 수 없듯이 엄마도 워킹맘과 전업맘 두 부류로 묶어서 대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세상에 날 때부터 '엄마'인 사람도 없고, 단순히 소득만으로 '일을 하고 안 하고를' 나눌 수도 없다. 나는 아이 둘의 엄마이고 경력단절 10년 차이지만 그것만으로 나를 설명하긴 힘들다. 나를 설명할 수 있는 각도가 다양하겠지만 그 모든 각도를 다 합쳐도 '나'라는 복잡한 인간구조를 담아내긴 어려울 것이다.


  나는 그냥 이런 인간인 것이다. 경력 단절보다 아이들과의 정서적 단절이 더 두렵고,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 아이들의 손을 잡는 게 더 좋다. 말랑말랑하고 품에 찰싹 안기는 그 고요한 신뢰가 내 세계를 참 풍요롭게 만든다. 내가 다시 OO대를 가고 XX과를 가고 전혀 다른 어떤 일을 하게 되더라도 그 이유가 '주변의 시선' 혹은 '두려움' 때문은 아니길 빈다. 과거의 후회와 미래의 불안감은 끊임없이 너울대며 현재를 침범하지만 이것이 나를 삼켜버리진 못한다. 사람은 장례식장에 가서 인생을 배운다고 하지 않던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게 인생이고, 오늘이 마지막일지 아무도 모르는데 두려움으로 선택을 하는 건 어리석다. 나에게 너무 잔인한 짓이다.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가장 존경하는 소설가인 '다자이 오사무'는 불안한 청춘의 통과의례와도 같은 소설 <인간 실격>을 저술했다. 작품의 주인공 '요조'에 자신을 투영한 다자이 오사무는, 세상을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친구의 조언에 이렇게 대응한다.





세상이란 도대체 무얼 말하는 걸까요. 인간들의 집단을 말하는 걸까요. 어디에 그 세상이란 것의 실체가 있는 걸까요. 그 실체가 뭐가 됐든, 강하고 엄하고 무서운 것이라고만 생각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나였지만, 호리키에게 그런 소릴 듣고 나니 문득 "세상이란 건 널 두고 하는 말 아니야?"라는 말이 혀끝까지 튀어나왔습니다. 하지만 호리키를 화나게 하는 게 싫어서 꾹 참았습니다.

'그런 짓은 세상이 용서치 않아.'

'세상이 아니라 네가 용서치 않는 거겠지.'

'그런 짓을 하면 세상으로부터 큰일을 당한다.'

'세상이 아니야. 네가 그러고 싶은 거겠지.'

'당장에 세상에서 매장된다.'

'세상이 아니야. 날 매장하는 건 바로 너 아니냐?'




  이후 주인공 '요조'는 세상이란 개인을 말하는 것이라고 결론지으면서 지금까지 보다 약간은 내 의지대로 행동할 수 있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가까운 사람의 말일 수록 내면에 더 큰 파장을 불러온다. 누군가 쉽게 던진 조약돌이 물수제비를 뜨며 강물을 튕기고 날아가 소용돌이를 일으킨다. 이런 파장에 일일이 대응했다가는 현재의 행복을 보지 못하고 일상이 무너져 내릴지도 모를 일이다. 조언은 고맙지만, 그저 그뿐이다. 조약돌이 만든 소용돌이도 금방 사라질 현상이다. 인생의 항로를 결정하고 책임지며 살아가는 건 온전히 자신의 몫이다. 실체가 없는 '세상'이 두려워서,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미래가 걱정돼서 현재의 행복을 포기할 순 없는 일이다.


  가정 주부가 사회에서 도태되는 위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정 주부는 주변인도, 불온전한 자리도, 불필요하거나 돈을 못 벌어서 어쩔 수 없이 있는 한심한 잉여 인력도 아니다. 주부가 만나고 겪는 모든 것도 사회이고 진짜 세상이다. 생명을 돌보고 가정을 살리는 게 왜 중요치 않은가? 원하는 것을 적정선의 금액에 구입하고 필요한 물품을 때에 맞게 갖춰 놓는 게 왜 사회에서 도태되는 것인가? 아이에게 맞는 발달 과정과 기관을 물색하고 가정 경제에 맞게 수입/지출을 운용하며 맛있는 음식으로 가족을 위로할 수 있는 모두에게 필요한 사람이 바로 가정 주부이다. 회사원이 출근한다고 다 좋은 성과를 내는 건 아닌 것처럼, 주부도 각자의 역량에 따라 가정 살림과 분위기가 달라지고 자기를 계발할수록 성숙한 가정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가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아이는 나중에 크면 집에 있는 엄마보다 밖에 나가서 돈 버는 엄마를 더 좋아해. 차라리 돈을 벌어오라고 한다더라" 나도 이 말에 흔들렸다. 내 자녀들은 아직 어리고 가보지 않은 길에서 마주칠 어려움이 나를 오그라들게 했다. 그러나 다시 반문하고 싶다. "우리나라에 있는 700만 명의 아이들이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한 가지 유형의 엄마를 원하나요?" 그건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내 유년 시절에도 학교에 다녀온 뒤, 엄마가 모락모락 김이 나는 빵을 구워 나를 기다리던 때가 정말 소중하고 즐거웠으니 말이다. 지금도 고향에 갔을 때, 일하러 나간 엄마보다 옆에서 같이 맛있는 것을 나눠먹으며 수다 떨 때의 엄마가 더 좋다.


   아이에게 엄마가 일하러 나가서 용돈을 더 많이 주는 게 좋을지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아이가 화들짝 놀라며 억울한 표정으로 말한다. "엄마가 왜 일을 안 해? 엄마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있는데. 엄마는 우리도 돌보고 글도 쓰잖아. 난 돈 필요 없어. 지금처럼 학교 갔다 오면 엄마가 따뜻하게 맞아주는 게 훨씬 더 좋아. 엄마는 우리보다 일 하는 게 더 좋아?" 하며 정곡을 찌른다.

첫째가 대필한 둘째의 편지(위)와 첫째가 써 준 편지(아래)
아이들과 다양한 놀이를 시도 중이다. 내가 조금만 판을 깔아주면 아이들이 무한 확장 시킨다. 사진은 코로나로 집콕하던 시절이다.


  너희보다 더 소중한 게 있을 리가 있나. 오늘도 학교에 다녀온 아이를 꼭 안고 "사랑해. 학교 다녀오느라 고생했어. 참 잘하고 있어. 있는 모습 그대로 참 훌륭해"하고 말하는데 아이가 나를 더 세게 끌어안으며 대답한다. "엄마도.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해" 내가 해 준 말이지만 나에게 다시 되돌아온 말을 들으니 가슴이 뭉클해진다.

  훌륭하다. 엄마도, 아빠도. 월소득이 얼마든, 무언가를 하든 안 하든 지금 모습 그대로 참 잘하고 있다. 이런 삶을 살 수 있도록, 선택하게 해 준 남편에게 고맙다.


둘째가 사랑하는 알파카. 유치원에 데려가려고 자기 가방에 넣어 두었다.
둘째는 가드닝을 좋아하는데 화분에 알파카 가족 이름을 붙여 주었다. 알파카, 알파카 누나, 알파카 형아, 알파카 딸, 알파카 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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