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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안의 새로운 세계 #2 - 햇살 속의 플리트비체

여행 44일. 크로아티아 2일.

by 어린왕자

*비 내리는 플리트비체로 시작한 앞 글에서 점점 맑아지는 플리트비체로 이어갑니다.


2014년 7월

플리트비체



어느덧 검은 구름이 걷히고 파란 하늘이 옥빛 호수에 비쳤어. 그래서 후반전은 맑은 날씨에 시작해서 또 다른 풍경을 볼 수 있었어. 식당에서 조금 걸으면 선착장이 나와. 이곳은 가장 큰 호수로 깊이도 깊어 데크로 걸어가지 않고 배로 건너가. 배를 타고 가는데 호수가 얼마나 넓은지 알 수 있었어. 한국에서는 큰 호수가 흔하지 않으니까 새로운 경험을 했지. 짙은 파란색의 호수 위로 탁 트인 시야에 하얀 구름과 초록의 나무들, 멀리 작게 보이는 폭포들을 구경하다 호수 맞은편에 도착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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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하늘의 플리트비체


다시 데크 위를 걸으며 상류를 구경했어. 상류의 작은 호수는 조류에 의해 초록색과 짙은 청록색을 띠고 있는 곳이 많았어. 그리고 조류가 없는 투명한 물속을 통해 나무들이 물속으로 쓰러지고, 그 위에 석회가 쌓여 댐처럼 이루어져 많은 호수가 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어. 그런데 이곳은 향이 그다지 나지 않는 거 같아. 비에 가려져서 그런가? 비가 그쳤지만 물이 많아서 그런가? 많은 식물들이 있는데도 비향이 남아서 그런지 특별한 향이 없다는 게 특별했어.


데크 위를 걸을 때면 재잘거리는 숲 속의 계곡을, 호수가의 흙길을 걸을 때면 고요하고 커다란 호수를 만나기를 반복하다 여러 개의 폭포를 만났어. 폭포 아래로 쏟아지며 돌에 부딪쳐 잘게 부서진 물은 이제 파랗게 개인 하늘을 통해 내리는 빛을 산란시켜 폭포 옆에 작은 무지개를 만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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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이곳이 마음에 들었는지 서서 사진 찍느라 엄청난 정체구간을 발생시켰지. 가족들, 친구들과 사진을 찍는 그 폭포들을 지나니 작은 폭포와 그 앞의 못들이 반복되었어. 우리 앞에는 폭포에서 사진 찍던 한 아버지와 두 딸이 앞장서서 걸어가고 있었어. 아이들의 종종걸음과 중간중간 서서 모델 같은 귀여운 포즈를 취해서 방해하지 않기 위해 속도를 맞춰 천천히 걸었어. 멀리서 아버지의 양손을 잡고 가는 아이들을 보니 문득 엄마가 생각났어. 여행지마다 전투적으로 앞으로 쭉쭉 걷는 울 엄마라도 이곳의 풍경에 반해 아이들 걸음속도와 비슷해질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중간중간 서서 좋아할 엄마가 생각나 다음에 온다면 단풍이 질 무렵 꼭 엄마랑 와야겠다고 다짐했어.


그러다 이곳에서 가장 오랜 시간 머물게 된 에메랄드 연못에 멈추어 서게 됐어. 파란 하늘에서 나무들에 의해 갈라져 내려오는 빛과, 그 빛이 에메랄드 물과 나뭇잎에 반사되어 이루어진 반짝반짝이는 풍경은 여기가 지구라는 것을 의심하게 할 만큼 환상적인 풍경이었어. 요정이 산다는 전설이 전해진다더니 사실인 거 같았어. 떠나기가 아쉬워 걸어가다 다시 뒤돌아 서서 사진을 찍기를 반복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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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조용하고 커다란 호수가 보이자 마음도 잔잔해졌어. 그리고 멀리에는 그 호수로 떨어지는 폭포가 보였어. 길을 따라가다 보니 그 폭포를 찍으려고 삼각대에 대포 같은 렌즈를 끼운 카메라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어. 좁은 길에 다소 이건 좀 과하지 않나 싶었지. 그중에 차도르를 입은 여성이 작품 활동을 하고 있었어. 보수적인 곳에는 이런 활동이 안 될 줄 알았는데, 나의 선입견이었을 뿐이었어. 한편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사진에 담고 싶을 만큼 대단한 풍경이란 거겠지.


그러다 휘어진 길을 가자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풍경을 맞이했어. 길 뒤편에 쓰러진 큰 나무가 있고, 그 위에 앉아 아주 긴 셀카봉을 들고는 일행들과 사진을 찍고 있었어. 나무에 가려 2~3명 정도만 보였지만 휘어진 길을 따라 가까이 갈수록 셀카봉 뒤에 사람이 점점 많아지는 거야. 5, 6, 10명까지 세다 말았어. 무슨 그 큰 나무 끝까지 사람이 있는데 다 한 일행인지, 재밌어 보여 지나가는 사람들이 뒤에 붙은 건지 모르겠지만 상상 이상의 숫자였지. 단체 셀카에 나도 나올까 봐 끝나기까지 기다렸어. 꼭 찍고 말겠다는 사람들의 표정 때문에 너무 귀여워 자꾸 피식피식 웃음이 났어. 몇 번의 실패 후, 드디어 성공했는지 모두 웃으며 나무에서 내려왔어. 그제야 우리가 지나가자 고마웠던 건지 짧은 인사를 했어. 다양한 풍경 속에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작품을 만들어가는 숲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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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를 지나자 오르막길 바로 옆으로 흐르는 계곡을 걸었어. 길 위와 계곡의 물높이 차이가 없었는데도 신기하게 물은 자신의 계단을 알아서 내려가고 사람들은 그게 신기한 듯 보면서 자신의 계단을 올라갔어. 자연과 사람은 그렇게 공존하며 자신들이 나아가는 길을 가면 되겠지?


계곡 물이 흐르는 한가운데 뿌리를 내리고 있는 큰 나무들이 있었어. 사진이나 TV 화면에서만 봤지, 물속에 뿌리를 내리는 나무라니 실제로 처음 봐서 신기했어. 하류에서 다져진 길 밖이나 배를 타고 지나가다 섬 근처에서 봤지만 수면이 올라가 단순히 뿌리가 물에 잠긴 줄 알았는데 생각해보니 비가 자주 오는 곳이라 물속에 잠겨 있는 시간이 많다는 걸 깨달았어. 원래부터 그런 환경에 자라지 않았다면 뿌리가 섞었겠지. 그렇다면 원래 수륙양용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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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을 다 오르면 평지의 숲이 나오고, 풀이 나지 않은 바닥에 서로 얽힌 나무들의 뿌리가 드러났어. 아바타 판도라 행성의 생명체들이 에이와와 연결된 것처럼 이곳도 이곳의 에이와와 연결되어있는 거 같았어. 내가 걸었던 '숲은 하나의 생명체'였는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니 다양하고 많은 식물과 동물들, 크고 작은 폭포와 계곡, 다양한 색의 호수들이 한치의 어긋남 없이 조화로울 수 있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어. 사람들도 그렇게 지낼 수 있겠지?


데크가 끝나는 길에는 넓은 잔디밭이 나타났어. 플리트비체의 유일한 단점은 사진을 찍느라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점이야. 그 덕분에 사진을 찍느라 넋이 빠져 일행과 거리가 멀어졌는데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어. 이곳에서 올라올 때 본 기차같이 생긴 연결된 버스를 타고 내려갈 예정이라고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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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리트비체를 나오며


따라가기만 한 플리트비체라 이곳이 마지막인 줄 몰랐어. 아쉬움이 갑자기 밀려왔지만 미끄러운 길을 걸어오느라 조금 지치기도 했고 햇볕이 강해져 땀도 나서 버스를 타고 숲 속을 구경하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어. 버스 시간까지 화장실을 다녀오고, 주변 사진을 찍으며 기다렸어.


어느덧 도착한 버스를 타고 출발지인 하류로 내려갔어. 숲 속을 달려서 가기에 풍경이 잘 안 보이긴 했지만 중간중간 나무 사이로 비치는 호수를 보니 올라왔던 풍경들이 다시 떠올라서 기분이 좋아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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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할 때 국립공원에 생각보다 고가인 입장료를 내는 게 처음이고, 당황스러웠는데 깔끔하고 자연 그대로 유지된 상태와 배와 버스까지 운행되는 걸 보니 입장료가 부족한 거 같았어. 그리고 한국의 국립공원도 아름다운데, 무료로 운영되어서 관리가 어려운 게 아닌가 싶었어. 많은 사람이 다닐수록 자연 관리에 많은 인력이 필요한 건데. 오히려 무료를 너무나도 당연히 받아들였던 자신이 부끄러웠어. 내 것이 아닌데 말이지. 그리고 세금으로 운영된다지만 직접 이용하는 사람들의 돈을 받지 않는다는 게 오히려 이상하고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까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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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그레브로 나오는 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 '하루 밤 머물러 다른 세상 같은 플리트비체를 한번 더 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어. 하지만 그렇게 하면 일정이 엉망이 되겠지. 다음에는 다른 계절에 오자는 다짐을 남기고, 비가 내리는 풍경과 맑은 날의 풍경을 모두 볼 수 있게 해 준 감사함을 숲과 호수에게 전했어.




돌아가는 버스


자그레브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으로 향했어. 버스 정류장에 사람이 점점 많아져 한번에 탈 수 있을까 걱정이었어. 더욱이 이곳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라 다른 도시에서 출발해서 경유하는 버스이기에 남은 좌석이 얼마 없으면 못 탈 수도 있었어.


그렇게 꽤 오랜 시간 기다려 버스를 탔어. 좌석이 다 차고, 승무원이 버스 가장 뒤부터 티켓을 확인했어. 우리는 티켓이 없으니 승무원에게 샀지. 일행과 소감을 나누고 있는데 앞쪽에서 승무원의 표정으로 봐서 승객과 문제가 있는 거 같았어. 승객이 영어를 못하시나 싶었는데 승무원이 영어를 못하시더라고. 아마 티켓 문제일 거라 짐작했어. 우리가 편도 티켓만을 산 이유는 버스 회사마다 티켓이 따로 있어서야. 즉 왕복 티켓을 구매할 경우, 갈 때 '가'라는 회사 버스 티켓을 이용하면 올 때 '나'라는 버스 회사를 이용하지 못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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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속에서 한국어가 들리는 듯해서 지레짐작인 상황을 한국말로 설명해줘야겠다 싶었지만 유럽에서는 운행 중인 좌석버스에서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해. 위험하니 당연한 거겠지. 승무원은 논 외고. 대화가 길어지는 거 같아 멀리 서라도 말해줘야지 하며 마음먹자 그 앞 좌석에 있는 외국인이 뒤돌아서 영어로 승무원 말을 통역해줬어. 보기에는 가족이 여행 온 걸로 보였는데, 그중에 한 분이 영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답해서 내가 나설 필요가 없었어. 아니, 내가 나섰다면 더 어려워질 뻔했어. 거기다 아주머니의 질문까지 해서 4명이서 3개 국어로 대화하는 풍경을 보니 어지럽더라. 외국인이 통역을 나서서 모두의 답답함이 사라져 그나마 다행이었던 거 같아. 괜히 내가 나섰으면 승무원의 말을 제대로 전하지 못했을 거야. 그러다 오해라도 생기면 오히려 피해가 되었겠지. 정말 친절한 외국인들 덕분에 여행을 안전하고 편안하게 할 수 있는 거 같아. 그래도 같은 크로아티아 버스 회사면 티켓 정도는 공용으로 사용하면 안 되나? 불편하게 왜 이러는 거야. 전 세계의 얼마나 많은 사람이 방문하는 공원인데, 이런 점이 아쉬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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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그레브로 돌아와


맑게 개인 풍경이 평화로워 보이고 다시 동유럽에 있다는 걸 실감했어. 버스터미널에 도착하니 너무나 어두워졌어. 이번에는 트램 안뿐만 아니라 차도가 꽉 막혔어. 그래서 트램이 느리게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바람에 만석 트램이 더 답답했어. 걸어가는 시간과 비슷하게 걸려 광장에 도착하고는 게하로 걸어갔어. 그런데 게하 근처의 도로는 텅텅 비어있었어. 퇴근 시간이기보다는 그 구간만 핫한 가봐. 일행과 어두워진 자그레브를 구경할 겸 식당을 찾아 늦은 저녁을 먹고 게하로 돌아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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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지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 하루였어. 침대에 누워도 새로운 세계, 다른 행성에 다녀온 듯한 느낌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어. 그런 느낌을 가슴과 머리에 새기며 잠에 들었어.




감탄사 말고는 표현을 할 방법이 떠오르지가 않고, 또 어느 곳에 비유해야 할지 모를 풍경이었어요. 이런 풍경과 분위기를 가지는 곳은 플리트비체가 유일하지 않을까요? 사진을 많이 보여드렸는데 어떨지 모르겠네요. 마음 같아서는 모든 사진을 보여드리고 싶답니다. 앞 글에는 햇빛이 약해 사진 찍기가 어려웠지만 맑은 날씨에 마음에 드는 사진들을 얻을 수 있었던 거 같아요. 제 모습을 보여준 숲과 하늘에 얼마나 감사했는지 몰라요. 그리고 돌아보니 두 모습을 모두 볼 수 있어서 더 감사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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