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46일. 크로아티아 4일.
배가 숙소라니 아직도 신기해. 흔들림이 전혀 없어서 아주 편하게 잤어. 어제 공항에서 급 룸메가 된 형은 포스트지에 식당으로 오라는 메시지를 남겨놓고 이미 가 있었어. 여행 와서 늦게까지 자는 건 역시 나밖에 없는 걸까? 식당에 가니 형은 노트북으로 한국에 있는 가족과 연락하고 있었어. 나도 인사를 나눴지. 내가 어제 첨 본 사람의 가족과 인사가 가능하다니 정말 여행하면서 성격이 조금씩 변해가나?
식당에 간단히 먹을 것을 찾았지만 차만 제공할 뿐이었어. 그래서 숙소를 출발하여 하얀 성의 필레지구(구시가지)로 향했어. 어제 왔던 것처럼 5분 정도 걸어 버스 정류장으로 갔어. 낮이고 캐리어도 없고, 한 번 왔던 길이라 어제보다 빨리 갔던 거 같아. 버스를 타고 필레 문(Vrata od Pila) 앞에 도착했어. 유명한 관광지여도 이른 아침이라 사람이 적었어. 아니, 생각보다 너무 없어서 의외였어.
해자를 넘어 필레 문을 통해 성안으로 들어갔어. 성 안이 너무나 깔끔해서 놀랐지. 몇백 년이나 된 곳이라니. 지금의 형태는 15세기쯤에 완성된 모습으로, 2번의 대지진과 내전으로 손상되었던 것을 현대에 복구했다고 해. 그래서 그럴까, 일자로 길게 뻗은 스트라둔(Stradun) 대로에 하얀 바닥이 너무나 반질반질해서 미끄럽기까지 했어.
입구 오른쪽에는 커다란 타원형의 오노프리오 분수(Onofrijeva fontana)가 있어. 분수보다는 공공수도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 거야. 15세기부터 성 밖 옆의 스르지 산에서 물을 공급받아 성내로 보급되었다고 해. 이 분수가 유명한 것은 동물과 사람 모습을 한 16개의 수도꼭지 때문이야.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라고 하는데 조금 무서운 인상이었어.
맞은편에는 성 사비오르 성당(Crkva sv. Spasa)이 있어. 두 번의 지진에 모두 피해를 받지 않은 곳이라 성스러운 곳이라고 전해져. 그 옆에는 프란체스코 수도원(Franjevački samostan i crkva)으로 유럽에서 3번째로 오래된 약국이 있어. 당연히 유명한 화장품이 있겠지. 하지만 성당이고 수도원이고 문이 열려있지 않았어.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수도원 벽을 따라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 구경을 했어. 대로에는 사람이 조금 있었지만 골목 안은 모두 자고 있는 듯 조용했어. 1층에는 카페나 식당이고 2층에는 가정집이나 숙소들이 많았어. 2층에 빨래들이 걸려 있는 게 관광지보다 그냥 사람 사는 도시라는 느낌이었지. 스르지 산 쪽으로는 지형이 높아져서 한 블록을 지날 때마다 계단을 올라가는 구조였어. 아마 과거에는 이쪽은 육지고 대로가 물길이고 그걸 중심으로 나누어져 있던 게 아니었나 싶었어.
골목을 구경하고 대로로 나오니 한 카페가 열려있어서 샌드위치를 하나씩 샀어. 그리고 성 블라호 성당(Crkva svetoga Vlaha) 맞은편에서 앉아 먹었어. 상인들을 위해 상업에 관련된 업무를 보던 스폰자 궁전(Palača Sponza)이 있는 곳이지만 이곳도 문을 열지 않아 사람이 없어서 편하게 앉아 있었어. 샌드위치를 먹고 있는데, 성당 계단에 책가방 던져놓고 공차는 아이들, 떼쓰다 혼나는 어린아이가 얼마나 귀여운지 저절로 미소 짓게 됐어.
다 먹고 일어나 왼쪽에 있는 아치 통로를 지나갔어. 다시 왼쪽으로 꺾으면 성벽과 건물의 사이로 좁은 길이 있어. 짧은 길이지만 정말 중세 유럽 성안을 걷는 느낌이야. 오른쪽으로 시선을 옮기면, 성벽 아래에 뚫린 아치문을 통해 바다가 보이고, 바다 쪽으로 레스토랑의 야외테이블들이 잔뜩 있었어. 바다 쪽으로 가니 옥색 바다 위에 작은 보트들이 정박되어 있어서 보트여행을 즐긴다는 걸 알 수 있었지. 투명한 옥빛 바다 위를 떠다니며 두브로브니크를 여행하는 건 어떤 느낌일까? 그리고 작은 수산시장이 장사 준비를 하고 있었어. 아드리아해를 바라보며 먹는 해산물은 어떤 맛일까?
바다를 따라 남쪽으로 걸어, 다시 성벽 안으로 들어가니 많은 사람들이 서 있는 두브로브니크 대성당(Katedrala Uznesenja Blažene Djevice Marije)을 만날 수 있었어. 이곳의 성당은 바로크 형식이 많은 거 같아. 그런데 묘하게 섞인 느낌은 뭘까?
사람도 많고 햇살이 더 강해지기 전에 성벽을 올라야 했어. 그래서 대성당 앞에 있는 도시의 선출직 통치자가 지내는 렉터 궁전(Knežev dvor)은 겉만 보고 필레 문을 향해 걸었어.
필레문 옆에 성벽을 오를 수 있는 길이 있고 매표소가 있어. 어른 2장을 사고는 얼른 성벽 위를 올라갔어. 성벽 위를 오르니 처음 걸었던 스트라둔 대로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어. 그리고 도시의 붉은 지붕들이 보이는데, 몇 백 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게 신기할 만큼 잘 갖추어져 있었어.
성벽을 따라 바다 방향으로 출발. 성벽의 첫 번째는 바다 위에 서 있는 듯한 보르카(Bokar) 요새야. 이곳에 서니 파란 아드리아해가 멀리까지 보여 시원함이 느껴졌어. 물 건너편에는 로브리예나츠(Lovrijenac) 요새가 보이는데 두 요새 사이로 작은 만이 있어. 두 요새로 방어하기 딱 좋은 장소야. 그리고 요새답게 총, 대포를 쏠 수 있는 구멍이 남아 있고, 사격수를 보호할 수 있게 삼면이 막힌 곳도 있었어.
계속 걸어가면 바다 절벽 위에 있게 돼. 높이도 더 높아져 더 멀리 볼 수 있고, 스르지 산 방향으로 성 내 모습도 더 잘 보여. 그리고 성내에 내전 이후로 복구되지 않은 곳도 보였어. 깔끔하게만 보였던 도시였는데 먼가 씁쓸했어.
이곳은 유고슬라비아 내전 때 슬픈 역사를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어. 소련이 붕괴되고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해체되면서 6개국간에 일어난 일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어. 두브로브니크는 내전 중의 크로아티아 독립전쟁 때 많은 피해를 입었어. 많은 세력과 오랜 기간의 전쟁이라 복잡해. 전쟁 후에 남는 건 하지 말아야 한다는 후회와 교훈뿐이야. 한국도 전쟁을 겪었으니 관심을 가져 보는 건 어떨까? 다음에는 그런 일이 없도록 말이야.
성 내부를 보다 보면 고양이들이 많아. 재밌는 건 사람과 달리 이들이 못 가는 곳이 없다는 거야. 길이 없는 곳은 당연하고 성벽 위, 지붕, 천막 위, 굴뚝까지. 사람들에게 잘 다가가는 걸로 봐서는 주민들이 잘 챙겨주는 거 같았어. 또 비둘기들도 있어. 건물의 빈틈에 집이 있는지 틈을 메우고 있었어. 사람만 사는 곳이 아니라 이들도 같이 살고 있는 곳이야.
바다 쪽 성벽 아래를 보면 유명한 부자(Buza) 카페가 보여. 여기서 부자는 돈 많은 부자가 아니라 구멍이라는 뜻이야. 성벽 구멍에 만들어진 카페라는 뜻이지.
아드리아해를 마주하고 있는 성 마가렛(Margarita) 요새와 성 스테판(Sv. Stjepan) 요새를 지나 성 이반(Sv. Ivana) 요새로 오면 앞서 보트를 봤던 부두가 나와. 과거 요새들은 무기와 군인 대신 현재 멋진 뷰포인트로 관광객들이 채우고 있었어. 항구를 지나니 앞서 걷던 성벽 아래 골목을 위에서 바라볼 수 있었어. 아래를 보자 성벽 높이가 실감 나더라.
그러던 중에 미국인 아저씨가 말을 걸어왔어. 형이 들고 있던 한글이 적힌 부채에 관심을 가졌어. 이런저런 대화를 하고는 굳이 어제 만난 우리들 사진을 찍어주겠다고는 내 사진기를 받아가 찍어줬어. 유럽 여행하다 보면 미국인들이 말을 잘 걸어와. 대화하는 걸 정말 좋아하는 편이라고 미국에서 유학한 형이 말해줬어. 그런데 해외여행 와서까지 그런 거 보면 영어의 힘이라고 생각해. 누구나 자국어인 영어로 여행객에게 말을 걸면 대답을 하니까. 한국어도 그런 날이 오면 좋겠다. 한류의 힘으로 몇몇 보기는 했지만 영어 정도는 아니니까. 정말 해외여행 가서 한국어로 말해도 아무런 문제없는 날이 왔으면 좋겠어.
이제 북쪽에 있는 도미니크 수도원(Dominikanski samostan)으로 가서 도시를 바라보니 한국과 비슷한 점이 있었어. 그건 십자가가 많다는 것. 성당들이 높아 쉽게 알아볼 수 있었어. 성당과 수도원을 합치면 10개가 되지 않을까 싶어. 그리 넓지 않은 곳인데 이 정도 성당을 가지려면 얼마나 대단한 부를 가졌단 걸까? 베네치아와 필적하는 상업도시라는 걸 느낄 수 있었어. 참고로 이곳은 15~19세기까지 라구사 공화국(Respublica Ragusina)이었어. 무역으로 얻은 부로서 공화국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던 거야. 역시 돈 버는 방법은 중계무역이 최고인가 봐.
서쪽으로 쭉 걸어 가장 높은 민체타(Minčeta) 요새에 도착했어. 체스의 룩처럼 생긴 성 모서리 부분으로, 내부를 통해 올라가면 둥근 넓은 곳이 나와. 이곳에서 성내부를 다 볼 수 있었어. 유럽에 많은 붉은색 테라로사로 벽돌을 만들기 때문에 붉은색 지붕이 많아. 그래서 세계대전 때 붉은 지붕은 주거지라 폭격을 하지 않았다는 말이 있어.
그 아래 신기한 게 있어. 바로 건물 지붕 높이에 위치한 농구장이야. 야간에 할 수 있게 성벽에 조명까지 달려 있었어. 왜 이곳에 만들까 싶기도 하지만 여가는 필요하니까. 그런데 이곳에서 공이 담을 넘으면 어디까지 주워야 하는 거야. 밑에 사람이 맞지는 않겠지?
이제 한 바퀴 다 돌아 다시 필레 문에 도착해서 2시간 이상의 성벽 투어를 마쳤어. 생각보다 길기도 하고 볼거리가 많아 긴 시간이 걸렸어. 여름의 더운 햇살이 아니었다면 3시간은 충분히 있었을 거 같아.
성벽 위에는 따가운 햇살만 있다면 성 안은 뜨거운 공기까지 더해져서 그대로 익을 거 같았어. 얼른 이 열기를 피하고 싶어 부자 카페로 향했어. 성 이냐시오(Saint Ignatius) 성당을 지나 cold drinks 표지판을 따라 성벽의 구멍에 도착했어. 구멍을 지나니 파라솔 아래 의자들과 탁 트인 아드리아해가 보였어. 마침 좋은 자리가 비어서 얼른 자리 잡았어. 맥주 2병을 주문해 마시니 정말 살 거 같았지. 왜 표지판에 clod drinks라 적혀 있는지 알 수 있었어. 햇살을 가려줄 거 하나 없고, 열을 뿜어 내는 돌 사이를 걷는다는 건 정말 힘들어. 그때 clod drinks를 본다면 어떤 느낌인지 알겠지. 정말 적절한 표현이자 강렬한 유혹 같아. 시원한 맥주에 바다 바람을 맞으며 파란 바다를 본다는 건 언제나 미소 짓게 되는 거 같아. 리스본에서 배운 교훈인 '오후 1시부터 3시까지는 그늘에 있기'를 이곳에서도 실행하고 있었어. 나뿐만 아니라 형도 제대로 교훈을 몸으로 익혔어.
더운 열기를 피하는 방법은 카페에 있는 것만은 아니었어. 바다 위로 크고 작은 보트들과 카누, 요트, 심지어 작은 잠수정까지. 사람들은 알차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어. 나는 그늘에서 바람맞는 게 가장 좋지만 말이야. 1시간쯤 있으려고 했던 카페는 시원한 바람과 풍경에 취해 3시간을 머물고 말았어. 성벽 그림자가 생길 때쯤 발길을 옮겼어.
골목을 통해 필레 문을 나왔어. 보르카 요새에서 봤던 작은 만을 지났어. 여기는 서쪽 부두로 이곳이 부자 카페에서 봤던 카누가 출발하는 곳이었어. 하얀 돌로 만들어진 가정집 골목을 지나 로브리예나츠 요새로 올라갔어. 관광객은 없고 현지인 꼬마들과 고양이들만 걷고 있었어. 그래서 지중해의 조용한 한 시골마을을 걷는 느낌이라 마음이 안정되었지.
요새에 가까워지자 드디어 관광객들이 보였는데, 그 뒤로 길고 높은 계단이 나타났어. 부자카페에서 쉬지 않았다면 무리였을 거야. 고양이들 낮잠 자는 시간인지 사람들이 지나가든 말든 계단 돌 위에 하나씩 자고 있었어. 계단을 올라 높이가 변함에 따라 보이는 성벽 도시의 풍경도 변해가서 힘들기는 해도 재밌었어.
요새 입구에는 'NON BENE PRO TOTO LIBERTAS VENDITUR AURO'라고 적혀 있다고 해. 우리말로 하면 '세상의 모든 금에도 자유를 팔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이 실제로 헝가리 지배하에 있을 때 금을 지불하고 자유를 얻어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어. 그리고 노예제도 없었어. 그들은 자유의 가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지. 우리가 갔을 때는 흐리게 새겨진 글들이 그늘에 가려 보지 못했어. 그래도 이걸 말하고 싶은 건 현재 미얀마 국민들도 그 의미를 알고 있어서야. 미얀마 국민들이 자유를 누릴 수 있길.
해가 입구 반대쪽으로 향해서 요새 안은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 그때 어느 아저씨가 다가와서 말을 걸었어. 조금 놀랐는데 다름이 아니라 티켓을 이야기한 거였어. 성벽 티켓으로 이곳까지 방문할 수 있어. 티켓을 보여주니 아저씨께서는 웃으며 좋은 여행 하라고 하셨지.
그곳을 지나니 햇살이 내리쬐는 넓은 공간이 나왔어. 성벽에 있는 요새는 요새라고 불리기에 부족하지만 이곳은 생각보다 넓은 공간이라 마치 작은 성 같았어. 이곳에 무기와 중세 시대의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 서 있다면 중세로 타임머신을 타고 온 느낌이 들 거야.
그늘이라 시원하고 사람이 없어 조용하니 좋았어. 특히 좋은 건 창 프레임에 맞게 있는 꽃나무. 일부러 만들어 놓은 거 같았는데 누군가의 작품인가 봐. 또 달리 그 사이로 지나가는 보트와 바다는 정말 그림 같았어.
가장 위까지 올라 테라스 같은 곳이 나왔어. 이곳은 높아서 파란 바다와 성 내 도시가 다 보여. 정말 마음도 시원해지고 바다 바람에 몸도 시원해졌어. 넓은 공간이라 공연도 한다고 해. 한참을 바다 구경을 하다 내려왔어. 내려오는 계단 난간에서 배를 보이며 사람처럼 자는 고양이가 있었어. 올라가 때 사람이 지나가건 말건 너무 편안히 자서 신기했는데, 자세만 조금 바뀌었을 뿐, 아직도 수면 중이셨어. 혹시 사람이세요?
한 여름 낮에 그늘 없는 대리석 바닥을 걷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어. 그래서 숙소로 돌아가 잠시 쉬기로 했어. 한숨 자고 해질 무렵 다시 필레지구로 나왔어. 아침에 올 때와 달리 버스에 사람도 가득. 필레 문에도 사람이 가득했어. 다들 두브로브니크의 여름을 잘 알고 있었나 봐. 이 작은 도시에 관광객만 몇백만이 된다고 하니 이게 원래의 모습일 거야.
하얀 두브로브니크가 노을빛에 노랗게 물드는 게 아름다웠어. 입구에서부터 중세 경비병 옷을 입은 사람들이 행진하고 있어서 사람들이 서서 구경하고 있었어. 우리는 보트가 있던 동남쪽 항구로 가서 한 식당에 자리 잡았어. 낮과는 달리 모든 식당들과 수산시장에 엄청난 사람들로 가득 찼어. 하지만 이번에도 운 좋게 경치가 좋은 야외 테이블에 앉았지. 그리고 메뉴판에 한글이 있어서 신기했어. 덕분에 어려움 없이 메뉴를 자세히 파악할 수 있었어. 그중에 검은 냄비에 나오는 홍합요리가 유명하다고 해서 우리도 주문했어. 홍합뿐만 아니라 해산물들이 신선해서 냄새가 나지 않고 깔끔해서 맛있었어. 식사를 마치고 맥주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형이 나와 비슷한 부분이 있어 많은 도움이 되었어.
해가 지고 어두워지며 하늘의 빛 대신 지상의 빛으로 성안을 비추는 시간이 되었어. 반질반질한 대리석 바닥이 반사되니 낮보다 더 고급진 느낌이 들었지. 남쪽의 쇼핑가 골목을 걸어가니 사람들로 엄청 붐볐어. 낮에는 숙소에 있고 밤에 나오는 거 같았어. 확실히 시원해서 밤에 다니는 게 옮은 선택인 거 같아. 좁은 골목에는 야외 테이블로 인해 더 좁아져 지나가지 않고 눈으로만 구경했어. 대성당 뒤쪽 골목으로 가자 고불고불한 길이 나왔어. 이곳은 대부분 레스토랑이었는데 걸어 다니는 사람이 없어 바닷가와 달리 조용하고, 여유로운 식사를 즐기기 좋은 곳이었어.
성 이냐시오(Saint Ignatius) 성당 쪽으로 성벽을 따라 좁은 골목을 걸어 다시 부두로 나오는 길에, 갑자기 형이 카페에 앉아있던 외국인에게 큰소리로 따졌어. 그랬더니 미안하다며 우리에게 한말이 아니라고 했어. 형에게 물으니 비웃는 말을 했다고 했어. 유학시절, 동양인들 뒤에서 안 좋은 말을 하는 서양인들을 종종 봤다고 해. 대부분 강하게 이야기해줘야 하지 않는다고. 그러니 영어든 한국어든 말해야 된다고 이야기해줬어. 속으로 동양인 깔보기보다는 무서워해서 그러한 행동을 하는 거라고 해. 영어도 짧은 데다 그런 단어들은 모르니 나만 못 알아들었나 봐. 혼자 있었으면 모를 뻔했어. 그 길로 미국에서 겪었던 일들을 들으며 동양인들에게 어떤 말과 생각을 하는지 들을 수 있었어. 유학이나 연수 갔던 사람들에게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내가 외국에서 한 달 넘게 여행했다는 게 새삼 신기했어. 한마디 보태자면 늦은 밤과 특히 술 마신 사람들을 조심해~~!! 한국도 마찬가지지만.
부두 끝에 커다란 범선이 보였어. 타고 싶어도 워낙 긴 줄에 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어서 스트라둔 대로로 빠져나왔어. 밤이 깊어질수록 도시가 아름다워 보였지만 그만큼 사람들이 많아져 좁은 길을 다니기가 쉽지 않았어. 그래서 이만 돌아가려고 필레 문으로 나오니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주말 밤 강남이나 명동정도 되려나. 다들 알고 보니 클럽을 가는 거래. 유네스코 문화유산이 있는 곳에 클럽이 핫한 줄은 전혀 몰랐지. 버스 정류장에 많은 사람들과 서 있어도, 바람이 불 때마다 향긋한 바다향이 나서 그다지 힘들지 않았던 거 같아.
숙소로 돌아오자 커다란 프라뇨 투지만 (Franjo Tuđman) 다리가 맞이해줬어. 형과 내일 떠날 일정을 이야기하고 침대에 누웠어. 여행 막바지라 정말 체력이 떨어진 게 느껴져. 특히 사람이 많아지면 급격히 방전되는 거 같아. 성벽만 보면 될 줄 알았는데 막상 다니다 보니 속속들이 다 보지는 못하고 겉만 본듯해 조금 아쉬웠어. 다음에 온다면 성안에 숙소를 잡고 일주일 정도 느긋하게 중세 자유도시를 살아보고 싶어.
유럽여행 중 다녀본 도시 중에 가장 고급스러운 중세도시였어요. 하얀 대리석과 깔끔한 도시가 그런 느낌을 강하게 해 줬던 거 같아요. 그리고 노예제가 없고 상인들의 도시여서 그런지 제약보다는 자유가 느껴지는 곳이었어요. 마지막으로 작아서 그런지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느껴졌어요. 다음에는 그 생명체 안에서 지내보고 싶네요.
야간 사진은 사람이 적은 걸로만 업로드했어요. 나머지는 사람이 반이라. 아침 일찍 다니다 보니 내용이 많네요. 긴 글을 천천히 따라와 보세요. 왠지 여행의 끝이 보여서 그럴까요. 요즘, 부족한 글을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들께 새삼 감사하다고 느끼고 있어요.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