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대선 정국으로 모든 이슈를 선거가 빨아들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선거가 예전과 다른 위화감이 느껴졌어요. 이는 한국 선거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변해가는 거 같아요. 제가 위화감을 느낀 부분은 바로 사람들의 감정입니다.
그 감정을 이용한 시대가 있었습니다. 냉전 시대이지요. 전 세계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로 둘로 나누었고, 한국은 경상도와 전라도로 나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냉전 시대가 아닙니다. 고향만으로 욕부터 하는 지역감정도 희미해졌지요. 그런데 다시 그런 시대가 오는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세상에는 감정은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사람에게 감정을 뺀다면 현재의 A.I.와 다를 게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사람에게 감정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성도 있지요.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 이성과 감정이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말에서는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상식적으로 말해서, 합리적으로 판단해서'라고 하지만 현재의 세상은 감정과 이성이 균형과 조화가 이뤄져 있을까요?
팩트(fact)라는 유행어
얼마 전까지 '팩트'라는 유행어가 있었지요. 개인적으로는 사실 혹은 진실이라는 단어를 잘 사용하고 있는데 굳이 뉴스에서 팩트라는 단어를 강조하여 사용하는 것에 다소 불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객관적 사실, 진실이 중요하다는 것을 전하기 위해서라고 생각됩니다. 그러한 영향에서인지 팩트라는 단어는 뉴스뿐만 아니라 토론을 넘어 인터넷, 술자리, 일상 대화까지 퍼져 모두가 사용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만큼 대중에게 객관적 사실과 진실은 아주 중요한 가치였습니다.
사실이란 것은 사람들의 사고, 행동의 근간이 됩니다. 예측이란 것도 사실을 통해서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심지어 카지노 카드 게임도 사실을 통해 예측하여 확률을 높은 곳에 배팅합니다. 막연한 지레짐작은 상당한 위험성을 동반하기 때문이죠.
또한 많은 사람들과 사는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과 생각을 나누거나 행동을 같이 하여 공통된 이득을 위해서는 객관적 사실이 필요하지요. 객관적 사실은 신뢰성에도 큰 영향을 줍니다. 왜냐면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사실에 근간하여 의견을 나누어야 하기 때문이죠. 객관적 사실이 없다면 서로의 생각만을 이야기할 뿐 공유하기 어렵습니다. 사실이 아닌 거짓을 말한다면 신뢰 관계는 형성되지 못합니다. 형성되더라도 자신의 이권에 관해서만 행동하게 되지요. 결국 신뢰가 없는 인간관계에서의 행동은 따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과 같은 결과에 도달합니다.
사실이 중요하지 않은 시대
하지만 지금은 과거보다 '사실'이라는 존재가 그리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보다 사실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더 맞을 것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팩트 체크'라는 것이 아주 중요한 관심이었는데 말이죠. 그럼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정보량의 증가와 변화
과거에는 제한된 정보를 일부가 독점하였습니다. 하지만 인터넷의 발달로 검색어 하나에 쉽게 정보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정보로 이득을 얻게 되는 방법을 익히게 되었죠. 하지만 현재 모든 이에게 정보가 공평하게 제공되고 있나요? 아니죠. 정보를 독점하는 방식이 바뀌고 고도화되었습니다. 방법은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바로 진실 속에 거짓을 섞는 방법과 필요하지 않은 정보, 즉 빈정보까지 넣어 정보량을 뻥튀기하는 것입니다. 이는 정보량 증가로 더욱 효과적인 방법이 되었습니다.
정보의 해석과 판단, 예측
정보는 단순 사실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흩어진 정보들을 이해하고 가치와 관계를 파악합니다. 즉, 해석과 판단의 과정을 거치지요. 더 나아가 정보를 통해 새로운 사실 혹은 드러나지 않은 사실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는 미래에 겪어 보지 못한 일들에 대한 대응력을 가지게 해 줍니다. 따라서 학교에서도 정보를 해석하고 판단하여 응용하고 적용시키는 과정들을 익히게 하지요.
진실의 가치
이와 같은 과정은 말처럼 그리 쉬운 과정은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열심히 공부를 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을 정확하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바로 정보가 진실이어야 합니다. 갈림길에서 왼쪽이 길이라는 정보로 걸어갔으나 낭떠러지라면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그만큼 시간과 노력이 낭비되지요.
정보의 정제 과정
결국 정보를 올바르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많은 정보 속에서 빈정보와 거짓 정보를 제외하는 작업을 거쳐야 합니다. 그런데 한 번의 과정으로 끝날까요? 'A는 B와 같다'라는 간단한 명제에서 같다는 내용만을 확인하면 끝날 것입니다. 하지만 A자체가 사실일까요? 누군가가 만들어낸 거짓이 아닐까요? 이벤트를 A라는 회사에서 진행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A가 실존하지 않는 회사라면 이벤트도 거짓이 됩니다. 즉, 'A는 B와 같다'에서 A와 B도 진위를 확인해야 하지요. 결국, 과정은 엄청 길어집니다.
현대인은 바쁘다
그런데 현대인에게 진위를 확인할 시간은 있을까요? 현대인들은 아주 바쁩니다. 모든 것에 하나하나 따져가며 알아내기에 시간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그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선택을 하게 됩니다. 힘들고 어렵고 귀찮다는 이유로 말이죠. 제목만 읽거나 '요약 바람'이라는 댓글이 달리는 이유죠.
언론의 신뢰도
개인이 할 수 없기에 언론이 있습니다. 언론은 개인이 닿을 수 없는 곳의 정보까지 대중에서 전달해 줍니다. 그리고 객관적 사실과 진실성을 확보해주는 검증과정도 거쳐줍니다. 그런데 현재 언론의 말을 믿을 수 있나요? 언론이 일부 거짓과 은폐로 대중을 속였왔던 일들을 대중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뢰도는 점점 떨어져, SNS와 개인 미디어에 비교되는 현실이 되었지요.
SNS와 개인 미디어
그럼 SNS와 개인 미디어에는 진실만이 있을까요? 빠르고 직접적이라는 장점은 언론의 뒷모습을 알리고 숨겨진 진실을 찾는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덕분에 영향력도 커졌지요. 그러나 반대로 검증이라는 단계는 얇아졌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거쳐 전혀 다른 사실이 되듯이 '카더라'가 몇 명이 퍼고 몇 군데에 나르면 사실이 되어버렸습니다. 또한 자신의 거짓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쉽게 찾을 수 있지요. '삼인성호, 세 사람이 호랑이를 만든다'라는 말처럼 거짓을 여러 사람이 말하면 진실이 되는 것을 SNS에서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기 어렵다
앞서 같은 이유로 정보의 진위를 확인하는 과정은 길어지고 어려워졌습니다. 진실을 찾는 과정 또한 의심이 들고 확신도 없으니까요. 그리하여 사람들은 진실과 거짓에 대해 무감각 해지고, 생각을 하지 않게 되고 있습니다. 타인에게 맡겨버린 것이죠. 결국 진위 확인이 되지 않는 정보들이 너무나도 쉽게 떠돌아다니고 있지요. 그런 것들이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말로 용인되고 있습니다.
긍정보다는 부정의 감정을 이용
사람들은 긍정의 감정보다 부정의 감정에 쉽게 반응합니다. 그래서 사람과의 관계에서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요.
사람은 자기 방어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경계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기에 자신이 중요시 여기는 것에 반한다면 더욱 경계하게 되지요. 반대로 긍정적인 감정은 천천히 스며들게 됩니다. 물론 사람의 성향에 따라 다르기도 합니다만 적어도 자신과 친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같이 보낸 시간이 적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부정적인 감정을 이용하여 이간질이라는 것이 사용되지요. 선거에서는 네거티브(negative)라는 전략으로 사용되고요. 뜻 그대로 부정입니다. 즉, 사람들이 싫어할 것을 그 대상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부정의 감정을 자극하는 것입니다. 싫어하는 존재가 뭘 하든지 싫을 테니까요.
앞서 내용들을 적용하면 후보의 무수한 정보가 있고 그 정보들이 진실과 거짓이 확실하지 않고, 대중의 혼란을 증가시키면 사람들은 자신이 싫어하는 점이 먼저, 크게 다가옵니다. 선거가 아니라도 인간관계에서도 네거티브 전략은 마찬가지입니다. 단, 선거는 짧은 2~3개월이므로 더 잘 통하는 것이죠. 왜냐면 긍정의 감정이 들 때쯤에는 선거가 끝났을 테니까요.
관심을 돌린다
네거티브는 시작일 뿐입니다. 진짜는 그다음에 있지요. 진실에서 눈을 돌리는 것입니다. 바로 감정을 자극함으로써 사실을 가리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감정으로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거나 관심 자체를 없애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진실을 찾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싫어하는 존재에게 관심을 줄 여유도, 필요도 없죠.
그리하여 그 결과의 인과관계와 의도를 알려고도 하지 않지요. 결과가 항상 의도대로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거짓에는 반드시 의도가 숨어있습니다. 그렇기에 결과뿐만 아니라 의도와 이유도 알아야 하지요. 그런 뒤에는 어떤 사실이 이해될 때도 있고, 공감될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건의 흐름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살 수 있는 이유이지요.
하지만 관심이 떠난 상태에서는 남는 건 뉴스의 헤드라인과 가까운 이들의 말들뿐이죠.
우선순위의 착각
세상은 다양한 요소들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은 정해져 있으며, 자원도 한정되어 있습니다. 결국 우선순위를 정하고 선택을 해야 하지요.
이것을 이용하여 완전한 거짓보다 사람들의 우선순위를 바꾸는 방법도 있습니다. 이럴 때는 조금의 거짓만 있으면 됩니다. 이 사실이 다른 사실보다 중요하다고 말이죠. 이때도 부정의 감정을 이용합니다. 바로 '손해'입니다. 선택을 한다는 것은 어떤 하나를 놔두고 다른 하나를 취한다는 뜻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하나는 버려야 한다는 것이죠. 버린다는 것은 손해로 연결됩니다. 그 점을 강조하는 것이죠. 장점보다는 단점을 부각함으로써 선택되지 않게 우선순위가 뒤로 밀리도록 유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에서 한 발 더 나가면 '무엇이 중요하다. 이것부터 해야 한다'가 아니라 '무엇이 중요하지 않다,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한다.'로 긍정에서 부정으로 우선순위는 바뀌어 갑니다.
진실과 신념
감정의 이용한 방법의 단점은 무엇일까요? 그건 감정은 쉽게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속적인 자극을 주어야 하지요. 그러면 어느새 신념이 됩니다. 감정에다 의지를 넣은 것이지요. 한 번 세워진 신념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사실과 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지요. 신념에는 생각과 사상을 기초로 세워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 생각과 사상이 감정만으로 채워졌다면 어떻게 될까요? 사실은 그들에게 의미가 없는 것이죠.
살아가면서 신념은 필요합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힘든 일들을 견뎌내게 해 주며 꿈을 이루게 해 주지요. 하지만 신념에 객관적 사실과 진실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리고 집단을 이룬다면요?
과거 가수 타블로와 관련된 타진요가 예가 되어줍니다. 한 명의 거짓이 모여 집단의 거짓이 되고 집단의 신념이 되어 광기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은 가수 타블로가 스탠퍼드 대학교를 졸업한 것은 거짓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에 대해 스탠퍼드에서 정식으로 발급된 졸업 증명서와 성적 증명서를 보여주어도, 지도 교수의 말에도, 학교와 학우들의 증언에도 타진요 회원들은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조작되었고 자신들의 주장만이 진실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주장이 진실이기를 바랐을 뿐 진실이 아닌데 말이죠. 그 결과, 아무 거짓 없는 진실에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과 친구들까지 비난받고 상처받아야 했습니다.
과학을 하나의 의견으로 여기다
과학은 이론과 실험적 증거로 만들어집니다. 이는 갈릴레이 이후 관찰과 실험을 통해 직접적으로 확인한 것을 토대로 근대 과학의 기초를 만들었습니다. 그렇기에 실질적 논증이 가장 중요한 기본이죠. 하지만 현재 과학을 객관적 사실이라 생각하지 않고, 하나의 의견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과학의 발전을 눈으로 확인하고 생활에서 실감하고 있는데 말이죠.
아직도 지구가 평면이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고, 약 안 쓰고 아이 키우기라는 안아키들로 인해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으며, 인터넷에는 코로나 백신을 맞으면 블루투스가 연결된다고 주장하거나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칩을 넣는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지요. 그런데 개인의 주장으로 끝이 아닙니다. 그들은 집단을 이루며 주장을 굽히지 않으므로써 개인을 넘어 집단에게 피해를 주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백신 부작용으로 접종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위와 같은 이유로 접종을 거부하는 경우도 많아 접종률이 더욱 낮아 최대 감염국이 되었습니다.
이도 앞의 이유와 같습니다. 과거보다 쉽게 논문을 접할 수 있으며, 거짓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진실로 만드는 경우도 많으며, 심지어 제품 광고에도 당당히 나옵니다. 하지만 내용에 대한 해석과 판단은 전문가 영역이지요. 그리하여 과학이 아닌 유사과학이 많아졌습니다. 그 결과, 어떤 이는 너무나도 쉽게 과학을 말하고 어떤 이는 과학을 믿지 않습니다. 그 결과, 현대에 과학자의 일은 연구가 아니라 대중에게 설명, 설득하는 것이라는 여러 가지 밈도 인터넷에서 유행하게 되었지요.
나의 상식, 너의 상식이 다르다
사람들은 취할 수 있는 정보량과 지식량은 다릅니다. 그리고 어떤 분야에서 일하냐에 따라서도 달라지지요. 그렇게 다른 정보로 예측을 함으로써 다양한 시선과 다양한 예측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정보의 증가로 과거보다 어렵지 않게 예측이 가능해졌지요.
그로 인해 사람들은 착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내 해석이 반드시 맞다는 것과, 예측을 확정된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이죠. 반복되는 사실은 다르지 않은 결과를 보여줌으로써 예측은 확고해지고 예측이 일어난 사실로 인식됩니다. 특히 경험을 동반한다면 변수를 고려하지 않고 사실로 확정하는 이도 많습니다.
하지만 예측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일어난 객관적 사실로 인지하면 어떻게 될까요? 자신의 경험만으로 예측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자신이 당연한 상식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다른 이들에게는 상식이 아닌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상식일까요?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주관적 의견이 아닐까요? 예측은 예측입니다. 우리는 예측을 통해 준비를 하는 것이지, 확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탈진실(post truth)
탈진실이란 객관적 사실과 진실보다도 개인의 신념이나 감정이 여론 형성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현상으로 진실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앞서 같은 이유들로 탈진실의 세상에 있습니다.
현대에는 많은 정보들 속에 거짓들이 숨어있고 그 속에 각자의 의도들이 담겨있습니다. 모두 느끼다시피 그 의도는 대부분 개인 혹은 특정 집단의 이득을 위한 의도입니다. 왜냐면 사람들은 객관적 사실을 언제나 기준으로 삼아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존재하는 것이고 거짓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말뿐인 것이지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곳에 손을 내밀어 봤자 손에 닿는 건 없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알기에 언제나 사실, 진실을 추구해왔습니다.
하지만 개인의 감정과 신념을 앞세워 사실과 진실을 뒷전에 둔다면 허공에 손을 젖는 일을 반복하게 될 것입니다.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이 될 것이며, 아무것도 얻지 못하겠지요.
생각하는 것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많은 정보 속에 진실은 알기 어렵고, 귀찮아지며, 주장하는 이들에 따라, 감정에만, 신념에만 휩쓸려 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의도를 가진 자들이 거짓 정보로 혼란을 주며 부정적인 감정을 자극하며 관심에서 멀어지게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최후에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 대중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의도를 가진 자들은 쉽게 대중을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겠지요. 결국 그들이 온전히 지배하는 세상이 되겠지요.
그렇기에 우리는 생각하는 것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객관적 사실과 진실을 얻고자 하는 노력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진실의 가치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다행히 생각하기 귀찮고, 진실을 찾는데 귀찮은 정도에 있습니다. 아직은 기득권과 맞서 진실을 전하는 기자들도 있습니다. 또한 인터넷 상에서도 내용을 인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출처를 확인하고, 진위를 확인하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거기다 적극적으로 근거를 통해 거짓을 찾아내고 서로 확인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진실을 찾는 것은 사람의 본능입니다. 선사 시대, 사냥을 위해서 동물의 정보를 모았고, 그를 통해 정확한 판단으로 식량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지형에 대한 정보를 모아 해석하여 계절에 맞게 적절한 온도를 찾아 이동하였습니다. 동물의 정보가, 지형에 대한 정보가 객관적 사실이 아니었다면 정확한 해석과 판단, 예측은 불가하고 결국, 사냥감에 오히려 사냥당하거나 추위에 얼어야 했습니다. 즉, 생존의 문제이지요. 그렇기에 우리의 DNA에는 객관적 사실과 진실이 모든 판단에 기초이며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 새겨져 있습니다.
숨겨진 객관적 사실과 진실을 얻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터넷이 있기 전보다는 어렵지 않은 것도 사실이지요. 그러니 우리가 원하다면, 대중이 원한다면 진실은 찾을 수 있습니다. 진실을 찾아왔기에 인류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죠. 물론 개인에게 한계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진실의 가치를 모두 알고, 거짓을 경계하는 대중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모두가 힘을 합친다면 더 빠르고 쉽게 진실에 다가갈 수 있을 겁니다.
이 주제에 고민하고 글로 옮기는데 오래 걸렸네요. 선거철에는 다양한 의견과 주장을 듣게 되지요. 그런데 거짓이 너무나 쉽게 통용되고 있었습니다. 했던 말도, 했던 행동도 너무나 쉽게 하지 않은 말과 행동이 되었습니다. 가족들이 하는 말보다 동네 아저씨, 아줌마들의 말들에 더 신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화학 에너지에 관한 내용도 화학 전공한 이의 말보다 원자를 모르는 이들의 말들을 더 신뢰했습니다.
누가 했냐에 따라, 나의 감정과 신념이 어떻냐에 따라 믿고 있을 뿐이었죠. 그래서 이참에 탈진실과 탈지식에 관해 글을 써볼까 싶었는데 대학 다닐 때부터 생각하던 내용이라 글이 너무나 길어졌어요. 과거, 이런 이야기를 하다 '그래 너 잘났다'라는 식의 말에 상처받은 이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대화의 의도가 그것이 아니니까요. 그래서 조금 망설였습니다. 그래서 더 글이 길어졌고, 오래 걸렸네요. 쳐내고 바꾸고 몇 번을 고쳤는지 모르겠습니다. 결국 탈지식에 관한 내용은 빼버렸습니다. (더 변을 하자면 주말마다 다른 지방에 나갈 일이 왜 이렇게 많은지, 오미크론 때문에 정말 무서운데 말이죠...... 안 갈 수가 없었습니다. 덕분에 마스크를 벗을 수가 없어요.ㅜㅜ)
생각보다 너무 오래 걸리니 괜히 시작했다, 괜히 자극을 주는 건 아닌지, 이 시간에 화학 글을 써야하는 건 아닌지 생각이 몇 번이나 들고, 이번 주는 꼭 완성해야지를 반복했습니다. 그래서 조금 진이 빠지네요. 책도 많이 보고 영화도 보며 생각하고 글 쓰는 것을 더 많이 노력해야 할 거 같아요.
부족한 실력이지만 한 번쯤 생각해야 하는 주제이기에 보여드렸습니다. 늘 읽어주시는 분들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