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 삶의 색안경

자폐 되지 않기 위한 노력

by 얄리

“사람이 되자.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냐, 사람다워야 사람이지” 어린 시절 가훈을 알아오라는 숙제를 하기 위해 아버지께 물어봤다가 얼굴이 새 빨게 지는 경험을 했다. “아니, 이게 뭐야? 창피하게” 정말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한다. 사람이 되는 것은 태어나면서부터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사는 동안 어떤 때에 짠하고 완성되는 것도 아니다. 사람이 되는 것이란 태어나서 자라고 나이 들어가는 그 모든 과정 안에 머무는 중이어야 가능하다. 그러니 사는 동안 항상 머무는 그때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 순간에 일어나는 나는 생각과 감정을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을 쉽게 할 수 없게 만드는 것들이 존재하는 것 같다.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게 만드는 것, 일종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에 덧씌워진 색안경 같은 것 말이다.


젊은 시절에는 '성공과 성취를 위한 갈망'이 내 삶을 왜곡시키는 일종의 색안경이었다면, 지금은 '그동안 살아온 경험'이라는 것이 그 역할을 이어받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살아온 시간 동안 여러 상황과 관계 그리고 그 안에서의 감정적 격동을 느껴왔던 기억들이 켜켜이 쌓이고 쌓여 나의 생각에 특정한 해석지를 만들어 놓은 까닭에 유사한 상황과 관계를 느끼면 자동반사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몸에 배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 과연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쌓아온 많은 경험들은 현재의 상황과 관계를 판단함에 있어서 유효하기만 한 해석지일까? 어쩌면 그것은 오래도록 발효한 모든 음식은 몸에 이롭다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일지 모른다.


중년에 이르러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한동안 과거를 현재의 시점으로 곱씹어 보는 일을 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과거가 있는 그대로 보존되어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의 왜곡현상, 나는 내가 필요한 방향으로 과거를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현재를 부정하고 싶으면 암울했던 기억들을 주워 모았고 현재를 긍정하고 싶으면 행복했던 기억들을 주워 모았다. 결국 현재를 살아내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과거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내게 과거란 픽션일 뿐이다. 내가 관여되어 있었지만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때때로 나의 과거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타인을 바라보는 것 같은 생경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시간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내 삶을 조망하는 일에서 마저 자신을 조작자로 만들어 버린다.


하지만 그 조작자가 만들어낸 경험과 그에 따른 판단만은 기억의 왜곡과 관련 없이 유효하다고 믿는 것 같다. 그동안 세상과 타인에게 맞춰진 채 자신에 대한 성찰을 할 여유를 갖지 못하다가 부쩍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이 많아지고 스스로를 이해해간다는 느낌이 강해질수록 경험에 의해 체득된 판단에 대한 신뢰가 높아지는 모양이다. 높아진 자기 이해를 통해 그동안 풀리지 않았던 많은 의문들의 답을 찾아내고, 자신을 옭아매었던 사회 또는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해방되며, 더 이상 쫓기지 않을 수 있는 평온함과 안정감을 느끼게 됨과 동시에 아이러니하게 자기 자신에게 갇혀 버리는 것 같은 자폐감을 느끼기도 한다. 뭔지 모르게 더 이상의 새로움도 설렘도 없을 것만 같은 권태로움의 엄습.


그것은 자신의 경험이 자신의 삶의 방경을 좁혀 놓은 것 때문이 아닐까? 어느 정도 자신에 대한 이해를 하게 되었다고 생각이 들면 자신이 알지 못했던 것들을 찾아 나서야만 하는 것 같다. 내가 내 삶에서의 주도권을 거머쥐었다고 하는 순간, 세상 그리고 타인을 탐색하려고 떠나려는 자신의 옷자락에 스스로 말뚝을 박아 어디로든 갈 수 없게 만들지도 모른다. '경험에 의하면 다 거기서 거기이고 새로운 것들을 맞이한다는 것은 또 스트레스의 상황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이 없을 것이며 안정감과 평온함을 깨는 일이 될 것이다'라는 유혹에 주저하게 될지 모른다.


이제 내게 필요한 것은 지금까지 겪어온 경험들이 아니라 지금과 다른 새로운 경험이다. 글을 통해 지금까지 내가 일터에서 그리고 소중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혹은 혼자만의 시간에서 느꼈던 것들을 정리했고 중년이라는 시기에 진입하면서 일어났던 생각의 변화들을 정리했다. 이로써 나는 더 이상 나의 과거로부터 건져 올려 이야기할 것이 없어졌고 이 과정이 내게는 필요했다. 삶의 전반기에 대한 일기장의 마침표를 찍는 일이었고 쓰던 일기장을 덮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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