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적 궤도, 절대 좌표값
내가 바랬던 바와 달리 내 삶은 전반적으로 특별하지 않았다. 조금은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한치의 오차도 없이 빗나갔다. 과거에 재미 삼아 미래를 물어보러 간 곳에서는 늘 한결같은 답변을 들었다. "넌 무난한 삶을 살 거고 큰 부자도 안돼" 그때는 그 자체로 실망스러웠다. 마치 너는 재능도 없고 능력도 뛰어나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 중에 너의 존재가 딱히 부각될만한 삶을 살지 못할 것이라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나의 기준에서 특별함이란 아마도 선망하는 직업을 가지는 것, 사회관계 안에서의 높은 인지도를 얻는 것, 타인과 구분되는 희소가치적 성향을 지니는 것 등이었던 것 같다. 한마디로 남과 다른 삶을, 남보다는 더 나은 삶을 살고 싶다는 소망 말이다. 거기에는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은 무조건 좋은 것이다'라는 선입견이 깔려 있는 것이기도 했다.
평범함이란 어느 범위의 삶을 말하는 것일까?
어린 시절을 보내고 공부를 해서 대학에 가고 직업을 가지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삶, 사실 이 삶이 특별할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보편적이라서 평범해 보이는 것도 아니다. 동년배를 살펴보면 비혼을 유지하는 사람, 결혼을 했으나 아이를 두지 않는 사람, 결혼해서 아이를 둔 사람, 결혼 후 아이를 두는 것과 관계없이 이혼 후 각자의 삶을 사는 사람 등 결혼이라는 하나의 기준을 가지고도 케이스가 많이 갈린다. 이렇게 서로의 차이를 나눌 수 있는 기준은 무궁무진하다. 어떤 기준에서는 희소한 편에 속할 것이고 어떤 기준에서는 많은 편에 속할 것이다.
평범함이라는 모순,
삶이라는 방경에 세대 간의 차이를 더하고, 국가 간의 차이를 더하면 그 범위는 더욱 묘연해진다. 하여 곰곰이 생각한 끝에 얻은 결론은 평범한 삶이란 없다는 것이다. 그저 한 개인으로서의 내 삶이 있을 뿐! 한 개인의 종속된 하나의 삶 자체가 하나의 세계다. 타인과 나는 각자의 세계다. 세계가 평범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것은 범위 측정이 불가한 문제가 아니라 대상 선정 오류라고 보는 게 맞다. 평범한지 아닌지를 논할 대상을 선정하는 것 자체가 틀려 먹었다.
보편적인 진리보다 소소한 변화에 주목하는 삶,
에세이가 많아지는 것이, 그것을 읽는 독자가 많아지는 것이, 단지 넘쳐나는 정보들에 식상한 사람들이 대중적인 루머나 큰 이슈들이 아니라 소소한 삶의 한순간에 쉬어가고자 하는 욕구가 커졌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과거의 과학이 거대한 우주의 원리와 측정의 일관성을 관철시킬 법칙들을 신봉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아주 미세한 세계의 불규칙성에 한방을 제대로 얻어 맞고 더 깊고 미세한 존재들로 관심을 돌린 것과 같이 인간의 삶에 대한 것 역시도 개인 그리고 그 개인의 찬라 같은 시간에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크고 변치 않는 무엇보다 미세하고 다른 무엇에.
타인과 내가 아닌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의 차이,
나조차도 내 삶의 큰 줄기를 단숨에 좌지우지할 수는 없지만, 매일의 매 순간에 나는 내 의지에 의해 변할 수 있고 그것이 쌓였을 때 어느 순간 그때의 내가 아닌 나를 만난다. 현재의 작고 사소하며 빈번한 변화들을 관찰하고 싶은 욕구, 대체로 삶은 보이는 큰 것을 놓쳐서가 아니라 사소하거나 당연해서 그다지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던 미세한 것들로 인해 요동치게 되는 것 같다. 주로 있다 사라지거나, 같은 줄 알았는데 달라질 때 비로소 느껴지는 것들. 그러니 지금의 그 사소한 것들이 내게 전해주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일지 한 번쯤 생각해 보고 싶다. 나의 관찰자가 되고 싶어진다.
상대적 궤도에서 가지는 절대좌표값,
또한 나 아닌 다른 관찰자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것을 소망한다. 우리가 각자의 개인으로 조금씩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은 그곳에서 조금은 다른 관찰보고서를 만들기 위함은 아닐까? 큰 덩어리보다 잘게 쪼게 진 덩어리들이 더 많은 접촉면을 가지게 되는 것처럼. 우리는 각자가 스스로를 관찰하여 얻은 다양한 관찰 결과를 주변과 후세에게 남길 것이다. 어쩌면 삶은 무엇을 이루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뭐든 잘 보고 전하라고 주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