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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얄리 Jul 22. 2021

트레블러

'삶 속에서의 인간의 본질'이라는 뜬금없는 생각

  그렇다. 너무도 너무나도 뜬금없지만...


 ‘삶 속에서의 인간’의 본질은 ‘트레블러(여행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인간은 자신이 인지를 하든 그렇지 않든에 관계없이 많은 시간에 걸쳐 여러 지역을 여행하는 자로 한 여행지가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의 삶(이생)의 의미가 된다는 것이다.


  여행을 통해 자극을 받고 깨달음을 얻고 여러 에피소드를 겪어내며 인간은 광의적 의미에서 성장하고 어느 날 더 이상 여행의 의미가 사라질 때 한 곳에 정착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장소와 그 장소에서 겪는 경험과 그 장소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한 모든 것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저장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어느 곳을 여행하고 어떤 경험을 하고 누구를 만나든 근본적으로는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껴 움직이지 않아도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질 때 비로소 인간은 삶이라는 여행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 아닐까.


  그  과정에서 인간의 삶의 전후에 포진되어 있는 종교란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전적으로 보기도 어렵지만 신이 사람을 만들었다고 전적으로 보기도 어렵다. 인간은 신과 동시에 공존하며 각자의 일부로  태어나고 사라짐을 반복한다. 그 과정이 트레블이다. 각자의 여행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순간에도 그들은 그들만의 여행의 주인공이면서도 또한 그 여행지 안에서는 손님일 뿐 여행지의 주인은 누구도 아니다. 행위의 주인공은 될 수 있어도 결과의 주인일 수 없는 것 같은. 다만 과정 중에 알게 되는 어떤 공통적인 인지의 끝에 신이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만들어냈다고 할 수도 그가 우리를 만들어냈다고 할 수도 없는 이유는 그것이다.


  같은 여행을 하는 사람은 없다. 어떤 사람은 상당히 몸과 마음이 편한 여행지를 방문하게 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고전을 면치 못하는 여행지를 방문할 수 있지만 여행은 고생의 여부와 관계없이 유의미하다. 다만 그것이 이루어지기 전에 인간이 인지적으로 알고 선택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전혀 무관하지도 않다. 이전의 여행에서의 느낀 것이 다음 여행에 영향을 주었을 테지만 기억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 정도가 아닐까. 왜냐하면 이전을 알고 있다면 현재를 겪는 것은 이전과의 끊임없는 비교의 연속이고 그 결과를 다음의 미래까지 가져가려고 하는 일을 발생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구나 생애 처음으로 여행을 하는 기분으로 떠나도록 되어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선택했지만 선택하지 않았던 것 같은.


  여행을 하면서 만나게 되는 근본적인 딜레마(실존주의에서 다루는 인간의 궁극적인 관심사를 대입해 보자면)는 첫째, 여행은 반드시 끝나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출발은 종착을 예비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죽음에 의해서. 해서 여행을 하는 동안 필사적으로 여행을 통해 뭔가를 이루려 하면서도 공허해진다. 아무리 보아도 곧 사라질 것들이기에. 둘째, 누구와 함께하든 동행하는 사람과 내가 보고 느끼는 것이 같을 수는 없다. 철저하게 나의 여행은 나만의 여행일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고독(소외)에 의해서. 우리는 동행인 듯 동행 아닌 여행을 한다. 하지만 여행이 나만의 것이 되려면 절대 내가 될 수 없는 대상은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셋째, 누구나 자신의 여행은 자신의 의지와 선택에 따라 경로와 경험이 달라진다. 이를테면 자유에 의해서. 하지만 선택을 한 것은 본인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결과 역시도 본인의 것으로 남는다. 설령 아무리 자신의 여행이 패키지 상품과 같이 자신이 아닌 어떤 이에 의해 과도하게 세팅된 듯한 것이라고 해도 그런 여행을 하겠다고 한 것 자체의 선택은 자신에게 있다. 넷째, 위의 3개를 전제로 하고 걸어온 여행이지만 결국 얻는 것은 없다. 여행자로 온 존재는 다시 여행자가 되기 때문에 기억은 남아도 영구적인 의미가 규정되지는 않는다. 이를 테면 무의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트레블러로서 존재할 수밖에 없고 그래야만 자신만의 생에 자신만의 의미를 자신이 부여할 수 있다.


  삶에 있어서의 실존적 관심은 그런 게 아닐까? 한 생에 대한 것만을 본다면 한정적이겠지만 지속되는 생의 관점으로 본다면 실존은 여행자에게 있어서 필히 지참하게 될 패스포트 같은 것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여행자라는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실존에 대한 무의식적인 고뇌를 내려놓지 못하는 것 자체가 아닐지. 하지만 패스포트가 자신의 국적과 신분을 보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것은 임의적인 규정이지 그 자체가 자신의 존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것으로 그 사람이 '여행 중'이라는 상황을 표시할 뿐이다.


  문득,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뜬금없지만. 그리고 그 생각이 지금의 내 삶에서 어떤 가시적인 변화를 가져오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도 아니라고 본다. 원래 자신의 범주를 훨씬 벗어난 대상은 그 자체로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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