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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테판 Oct 11. 2020

#10 피렌체 - 안녕 피렌체, 안녕 my friend

이탈리아 여행기 10

마지막이 되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로마에서도 일정이 없는 오전에 이어폰 하나 들고, 골목을 돌아다니다 보면 그제야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피렌체를 떠날 채비를 하고 나니 시간이 남아 피렌체 구석을 돌아보기로 했다.


"또 나가?"

"응. 누난 안 가?"

"응."


피렌체에서 가장 마음에 든 것 중 하나는 두 발로 걸어서 웬만한 볼거리를 다 구경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피렌체를 떠나기 전, 두오모 코폴라를 한 번 더 눈에 담고 싶어 두오모 성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엔 이 길로 가볼까?'


그동안은 편의상 짧은 길과 빠른 길을 선택해서 갔지만 지금은 누구 하나 재촉하지 않으니 처음 보는 길로 가보련다. 지도도 따로 보지 않고, 저 멀리 보이는 쿠폴라를 등대 삼아 걸었다. 피렌체의 골목골목은 로마보다 더 소박한 분위기를 풍긴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출근하는 시민들과 몇몇의 부지런한 관광객들, 닫혀있는 상점들만이 골목을 이루고 있었다.

등대 삼았던 쿠폴라를 다시 눈에 담았다. 성당 앞에 서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언제 또 여길 와 볼 수 있을까?'


애석하게도 요즘의 상황을 보면, 정말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쿠폴라를 한 바퀴 돌고 나서 목적 없이 걸어보기로 했다. 골목골목을 걷다 보니 마치 숨바꼭질하듯 쿠폴라가 모습을 드러냈다가 다시 감추곤 한다.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의 장면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제야 내 눈에 들어오는 작은 것들이 있었다.

목적 없이 걷다 보면 주변에 더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누군가가 숨겨둔 보물을 찾는 기분이다. 얼마 전, 넷플릭스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을 재미있게 보았다. 안은영 눈에만 보이는 젤리들처럼 목적 없이 골목을 걷다 보면 작고 귀여운 것들이 내 눈에 들어온다. 세상에 존재하지만 특별한 사람들만 볼 수 있는 젤리들처럼 말이다. 분명 어제도 지났던 길인데도 무척이나 새롭다. 피렌체는 구석까지 소박하고 아름답다. 생각보다 주변에는 아름다운 것들이 많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저 살면서 지나쳐 왔을 뿐.



체크아웃을 몇 시간 남겨두고, 피렌체 중앙시장에 갔다. 한국에 있는 친구, 가족들에게 줄 선물을 사기 위해서 향했다. 피렌체에 있는 동안 가끔 가서 구경을 했지만 너무나 많은 물건과 가격에 도통 고르기가 쉽지 않았다.


중앙시장은 이탈리아에서 처음으로 한국과 같은 느낌을 준 곳이다. 시장의 분위기와 정서가 조금은 비슷하게 느껴졌다.


"사장님. 싸게 줄게요."

"예쁜 언니. 가방 보고가. 좋은 거 많아."


시장을 걷다 보면 흔하게 들리는 말이다. 여긴 이탈리아 피렌체가 분명한데 정확하고 유창한 한국말이 들린다. 너무나 좋은 발음 때문에 고개가 자동으로 돌아가곤 한다. 여기저기서 가격 흥정을 하는 것도 볼 수 있다. 눈이라도 한번 마주치면 그때부터 나를 영업하려는 전쟁이 시작된다.


처음엔 너무 놀라 자연스럽게 대답을 하고, 물건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서서히 반응하지 않자 그들도 별 반응이 없었다. 물건이라도 한 번 구경하면 세상 그렇게 친절한 사람이 없다. 한국말로 깎아준다면서 사장님~ 언니~ 하면서 온갖 친한 척을 한다. 그러나 발길이라도 돌리면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사람으로 돌변한다.


처음 시장에 왔을 때, 우연한 이끌림에 시장길 가장 끝 구석에 있는 가판에 들어갔다. 그 가판의 직원은 물가도 분위기도 전혀 몰랐던 누나와 나에게 착한 태도로 설명해주었다.


"한국 사람?"


그는 방글라데시 출신으로 한국인인 우리를 보고 자신의 거래처가 한국 사람이 있다면서 대구에 사는 어떤 한국인의 명함을 보여줬다.


명함을 내미는 그의 손을 우연히 보았다. 시커먼 손에 거친 물집과 상처들이 여기저기 나 있었다. 그리고 일부 손가락이 절단되어 보였다. 그의 손을 만져보진 않았지만 눈으로도 충분히 그 거친 감촉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얼마나 고달픈 인생을 살아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손을 보면 그 사람의 인생을 조금은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하는 영어랑 비슷해."


그가 구사하는 영어가 흑인들의 영어랑 비슷하다고 했다. 누나는 아프리카 케냐에서 1년 정도를 지냈다. 우리나라 콩글리쉬처럼 흑인들의 독특한 영어 발음과 억양이 있다고 했다. 우리는 아프리카식 영어와 콩글리쉬 등을 구사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장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우리는 조금 더 둘러볼 구실로 그에게 물건을 구입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갔다. 그러나 몇몇의 차가운 상인들과 가격으로 우리를 등쳐먹으려는 사람들을 만나고 나니 모두가 친절한 건 아니라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누나와 나는 여러 가판을 둘러보았지만 계속해서 그 구석진 방글라데시 아저씨의 가판이 떠올랐다.


그의 선한 눈빛과 거칠고 해진 손이 우리를 그 가판으로 다시 이끌었다. 물건을 사지 않으면 차갑게 돌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의 선한 눈빛은 적당히 포근했다. 결국 우리는 그 사람을 다시 찾아가서 구입해야 할 선물을 모두 구매했다.


"My friend! 나 기억하지?"

방글라데시 상인과 우리는 서로를 my friend라 불렀다.



그리고 얼마 후, 한국에서 코로나 19가 이탈리아를 뒤집어 놓았다는 거짓말 같은 뉴스를 접했다.


"뉴스 봤어?"

"응. 이탈리아?"

"그 사람 가끔 생각나지 않아?"

"My firend? 어떻게 됐을까?"

"정말... 어쩌면... 코로나에 감염됐을지도 몰라..."


피렌체 중앙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외국인 노동자가 많아 보였다. 그곳은 지금 어떻게 숨을 쉬고 있는지 가끔씩 궁금해진다.


짧지만 우리에게 강한 인상을 남겨준 방글라데시 my firend. 먼 이국에서 지내는 그의 생활이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기를 멀리서나마 바란다. 피렌체에 다시 간다면 꼭 한 번 들러야지.

안녕 피렌체. 잘 있나요? my firend.

그리고 피렌체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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