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여행기 11
베네치아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며 맥도널드에서 시간을 보냈다. 기차 시간을 여유롭게 예매했더니 생각보다 오랜 시간을 맥도널드에서 보냈고, 곧 화장실이 가고 싶어 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유럽에서 한 번도 돈을 지불하고 볼일을 본 적이 없던 나는 조금 참았다가 기차 화장실을 이용하려 했다. 한국에서는 흔하게 무료로 공중 화장실을 이용하다 보니 유료인 것이 괜히 아까운 것도 있었지만, 사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처음 영국에 갔을 때, 지하철 역에서 화장실에 가고 싶었는데 커다란 캐리어를 들고 들어가는 것도 걱정이었지만 어떤 동전을 내야 하는지, 어떻게 기계에 넣고 들어가는지를 몰라서 그냥 이용하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글을 쓰면서 생각해보니 나의 의식 깊은 곳에 그때의 두려운 마음이 숨어있었다. 아직도 화장실 앞에서 머뭇거렸던 그 장면이 머릿속에 선명히 남아있다.
'기차역 안에 무료 화장실이 있을 거야.'
스스로 장담하고서 기차역을 둘러보았다. 어디서도 화장실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상점들이 많은 지하상가로 내려가 보니 화장실 표시 하나를 발견했다. 조금씩 상황이 급해지고, 발걸음을 재촉해 화장실에 도착했다.
'성공이다!'
그곳은 어느 주차장 옆에 위치한 허름한 화장실이었다. 그런데 문 뒤에 좁은 공간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화장실에 왜 책상과 의자를 두고 앉아있지? 이상하게 생각하던 찰나 그는 나에게 손을 내밀며 돈을 요구했다. 그것도 심지어 맥도널드 화장실보다 비싼 가격이었다.
'이럴 거면 맥도널드 화장실을 가지!'
급한 상황에서도 이상한 고집이 생겼다. 고생해서 달려왔는데 더 비싼 돈을 지불할 수 없다는 일념 하나로 다시 걸음을 급하게 재촉해 맥도널드 화장실로 갔다.
할 수 없이 다시 돌아온 나는 그렇게 난생처음으로 유료 화장실을 사용했다. 유럽여행에서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나만의 기록이 깨져 버리고 말았다. 그렇지만 내 마음속에 숨어있던 두려움은 이제 사라질 것 같다. 역시 해보면 별 것 아닌 것들은 세상에 많다.
놀라운 반전은 맥도널드 영수증을 보여주면 주문 후 1시간 이내는 화장실 이용이 무료였다는 것이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순순히 1유로를 지불했다. 덕분에 누나는 무료로 이용했다.
피렌체에서 베네치아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로마에서 피렌체로 왔던 기차보다 조금 더 좋은 좌석을 예매했다. 몇 푼의 돈을 더하자 좌석도 넓어지고, 중간에 음료와 간식까지 제공되었다. 짐도 편안하게 올리고, 여러모로 쾌적했다. 아마도 좋은 기차를 먼저 타고, 덜 좋은 기차를 나중에 탔더라면 이만큼의 즐거움은 느끼지 못했을 것 같다. 특히 저 S 모양의 쿠키 맛은 잊을 수가 없다.
베네치아는 섬으로 이루어진 도시다. 주 관광지인 본섬과 육지인 메스트레가 있다. 보통 본섬은 관광지로 둘러싸여 있고, 물가도 비싸다. 허름한 숙소조차 꽤나 비쌌다. 우리는 가성비를 생각해 메스트레에 머물기로 했다. 어차피 버스나 기차를 타고 금방 본섬으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메스트레에 도착했다. 무거운 캐리어를 끙끙 거리며 내렸다. 한국인으로 보이는 일가족도 함께 내렸다. 잘못 내린 건 아닐까 걱정도 했지만 한국사람들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여기가 혹시 산타 루치아 역이에요?"
함께 내렸던 가족 중에 누군가가 물었다.
"여긴 메스트레예요. 산타 루치아는 한 번 더 가셔야 하는데..."
가족들은 순간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했다. 오히려 그 가족들이 잘못 내린 것이다. 아마도 한국사람이(내가) 내리는 것을 보고 따라 내렸는지도 모른다. 나는 다음 기차표를 다시 구해서 한 정거장만 가면 된다고 말해주고, 발걸음을 돌렸다. 그런데 누나가 무엇인가 생각이 났는지 그 자리에서 여행 책자를 펼쳐 어떻게 하면 되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주었다. 가족들은 조금 전보다 더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어?"
"책에 실수로 메스트레에서 내렸을 때, 어떻게 하는지 나와 있어."
"그런 것도 있어?"
여행정보가 담긴 책은 잘 찾아보지 않는 편이지만 생각보다 디테일한 부분에 놀라웠다. 누가 구성했는지는 몰라도 실수할 수 있다는 가능성, 그리고 실수했을 때 당황하지 않고, 다시 목적지를 향해 갈 수 있도록 배려한 섬세함에 감동했다.
메스트레의 첫인상, 지금까지는 나쁘지 않았다. 숙소 지도를 보니 역 바로 앞에 호텔이 있었다. 우선 무거운 캐리어를 많이 끌고 가지 않아도 되는 사실이 좋았다. 호텔에 들어가자 화려하고, 깔끔한 분위기에 놀랐다. 지금껏 로마와 피렌체에서 묵었던 호텔보다 훨씬 좋은 호텔이었다. 분명 가격은 더 저렴했는데도 말이다. 객실은 더욱 놀라웠다. 방의 평수는 물론이고 환기가 잘 되는 넓은 창과 뷰를 처음 보았다. 메스트레가 땅값이 싸서 그런지, 본섬에 비해 관광지의 메리트가 없어서 인지 가격에 비해 룸 컨디션이 너무 좋았다.
길었던 여행의 마무리를 조금 편안하게 보낼 수 있어서 좋았다. 기차와 마찬가지로 좋은 컨디션의 숙소가 마지막이어서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저녁은 친한 선배에게 추천받은 중식당에 가기로 했다. 여행에선 웬만하면 현지 음식을 먹으려 하는데 워낙 강력추천을 받은 터라 오랜만에 아시아 음식도 먹을 겸 중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오랜만에 먹는 쌀 음식과 매콤한 맛, 익숙한 향으로 인해 한국에 돌아온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맛도 너무나 익숙해서 음식이 술술 넘어갔다. 이탈리아에서 피자, 스파게티 위주로 먹다 보니 중국 요리는 너무나 자극적이었다. 한국 음식에 대한 갈증이 있었는데 어느 정도 해소가 되어서 살짝 아쉬운 마음도 있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라면도 먹고, 삼겹살도 먹고, 김치찌개도 먹고 싶었는데 갈증이 조금 사라졌다. 아껴 두었던 음식을 조금 일찍 먹어서 살짝 덜 맛있게 먹은 기분이다.
이탈리아에서 안 좋은 기억이 딱 하나 있다. 바로 메스트레의 밤이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린 메스트레는 다시 가고 싶지 않은 곳이다.
저녁을 먹고, 근처에 엄청 큰 대형 마트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선물도 사고 구경도 할 겸 가보기로 했다. 지도를 보고 천천히 따라가는데 해가 지고 어두워서 길도 잘 보이지 않았다. 기차역과 호텔을 지나고 조금 걷다 보니 불빛도 별로 없고, 삭막한 거리가 펼쳐져 있었다. 그리 늦은 시간도 아닌데 건물의 불이 켜진 곳도 몇 없고, 어둠이 내린 메스트레의 밤은 너무나 무서웠다. 지도를 보고 마트를 향해 가고 있는데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어느 길에 접어들자 양쪽엔 펜스가 쳐져 있고, 난민들이 거리 양쪽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지나가는 나와 누나를 쭉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태연한 척 길을 걸었다. 누나도 조금 무서운 느낌이 들었나 보다.
"길 잘 찾고 있는 거야?"
"모르겠어."
구글맵을 다시 유심히 보니 길을 잘못 들고 있었다. 서둘러서 나와 누나는 건널목을 건너 그 무섭던 길에서 빠져나왔다. 난민들은 여전히 우리를 멀리서 주시했다.
방향을 바꾸어 올바른 길로 향했지만 그 길마저도 무서웠다. 몇 개의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길을 걸어야 했다. 가끔씩 지나가는 대형 버스들은 큰 소를 내며 지나가곤 했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보니 저 멀리 대형 마트가 보였다. 그곳에 가기 위해선 8차선 정도 되어 보이는 큰길을 건너야 했다. 신호등에는 불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때, 로마에서 가이드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이탈리아에선 그냥 손을 들고 건너세요. 그러면 차가 나를 죽일 듯이 달려오다가도 모두 다 멈춥니다."
그렇게 용기 내어 손을 들고 건너자 정말 신기하게도 차들이 죽일 듯이 달려오다가 모두 멈춰 주었다. 마법같이 신기한 경험을 하고 나서 길을 건너자 신기하기도 했지만 마음이 괜히 두근댔다. 아닌 척했지만 무서운 길을 지나고, 위험한 도로를 건너고 나니 심장이 빠르게 요동치고 있었다. 마트에 가서도 다시 돌아갈 생각을 하니 그 위험한 길이 아른거렸다.
그렇게 마트에서 별다른 즐거움을 얻지 못하고, 필요한 물건 몇 개만 사서 나왔다. 돌아가는 길은 최대한 크고, 밝은 길로 걸었다. 온몸의 신경을 곤두 세우고 올바른 길을 찾아 무사히 돌아왔다. 호텔 건물이 보이자 마음이 놓였다.
"앞으론 저녁엔 나오지 말자."
"응."
메스트레에서는 해가 지면 다시 나오지 않기로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