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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테판 Oct 29. 2020

#12 베네치아 - 급할수록 돌아갈 수 없었다

이탈리아 여행기 12

지난밤 메스트레에서 잔뜩 겁을 먹고는 모든 것이 무서워 보였다. 이른 아침, 해가 환하게 떠 있어도 메스트레는 어딘지 모르게 삭막한 느낌이 들었다. 나에게 이 도시는 회색빛으로 기억될 것 같다. 본섬에 다녀올 일정인데 당장은 괜찮지만 돌아올 때 어두워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미리 앞섰다.


“너무 늦게 버스를 타면 돌아올 때 난민들이 많아서 위험해.”


먼저 다녀온 선배도 조언을 해줬다. 나는 해가지기 전에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 다짐했다


본섬으로 가는 버스와 본섬에서 이용할 수 있는 시간제 이용권을 구입하기로 했다. 여행의 끝무렵이라 현금을 조금 아껴두기 위해 카드로 구입하려 했다. 호텔 근처 카페테리아에서 티켓을 판다고 해서 찾아갔다. 티켓을 파는 사람은 중국인 같았다.


"티켓 두장이요."

"현금만 됩니다.”


나도 모르게 순간 머리를 굴렸다.


"... 미안하지만 지금 현금이 없어요."

"뒤쪽에 ATM 기계가 있어요.”


졌다.

하는 수 없이 지갑에서 아끼고 아끼던 현금을 털어 주었다. 현금이 없다고 했는데, 지갑에서 현금을 바로 꺼내면 이상했을 테지만, 굳이 자존심 때문에 ATM 기계까지 가고 싶진 않았다. 물론 장사하는 사람 입장에서 현금을 받으면 좋지만, 카드도 분명 되면서 안 받는 것은 너무 얄미웠다. 게다가 한결같이 웃는 인상으로 말하니 왠지 모르게 더욱 얄미웠다.


근처 정류장에서 본섬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버스에는 우리 같은 관광객과 아마도 본섬으로 출근하는 현지인들이 잔뜩 타고 있었다. 본섬으로 향한 지 몇 분이 지나고, 창밖을 보니 조금씩 바다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침 햇살에 빛나는 바다와 끝없는 수평선, 여기저기 날아다니는 갈매기들이 나를 반기며 마중 나온 것 같았다. 조금 전 티켓을 살 때, 느꼈던 얄미운 감정은 한순간에 다 사라져 버렸다.

정말 얼마 가지 않아 본섬에 도착했다. 이곳은 내가 머릿속에서 상상했던 베네치아의 모습 그대로였다. 어쩌면 더욱 낭만적이었다. 어렸을 적 읽었던 베니스의 상인이 떠오를 정도였다.


당일의 일정은 무라노 섬 - 부라노 섬 - 성 마르코 대성당 순이었다.


바포레토를 타기 위해 비교적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 기다리면서 느낀 점은 여행 온 한국인들이 정말 많다는 것이다. 특히 아침 일찍 나온 사람들은 다부분 한국사람이다. 무라노 섬에 가기 위해 탄 바포레토 안에도 절반은 한국인이었다. 마치 어느 근교에 있을법한 이탈리아 체험 테마파크에 온 것 같은 착각까지도 들었다.


"한국인들 정말 부지런해."

이탈리아에서 처음 배를 타고 물 위를 걸었다. 시원한 바람과 함께 펼쳐진 풍경은 너무나 아름다워서 눈과 카메라에 담기 바빴다. 배 안에 앉아 있을 수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풍경을 감상하기 위해 바람을 맞으며 바깥에 나와 있었다. 차가운 칼바람도 풍경을 감상하는 데 문제가 되지 않았나 보다. 바포레토 역시 한국인들로 가득했다.


무라노 섬에 도착했다. 여행에 오기 전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무라노 섬은 별로 볼 게 없어."

무라노 섬에 볼게 정말 없는 것인지 인터넷을 통해 이것저것 알아보았다. 그런데 정말 많은 사람들이 볼 게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볼 게 없다는 건 무슨 뜻일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소박하고, 평화로운 장소를 좋아하는 나에게 볼 게 없다는 말은 어쩌면 딱 맞는 여행지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나는 무라노의 소박하고, 한적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예전에 대만에 갔을 때도 허우통이라는 조용한 고양이 마을에 간 적이 있다. 정말 흔히 말하는 볼 것은 없었지만, 낯선 곳에서도 평화로운 마음을 느낄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였다. 얼마나 평화로우면 마을 고양이들이 길가에 늘어져 자고 있었을까 싶을 정도다.


무라노 섬은 허우통 마을에서 느꼈던 비슷한 느낌을 주었다. 무라노의 톤은 너무나 평화로워서 차가운 아침 바람과 따스한 햇살이 그 어느 도시보다 나에게 크게 들려왔다. 내가 걷는 발소리와 가끔씩 들려오는 물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섬을 가득 채웠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주민들도 별로 없었고, 상점들도 많이 닫혀 있었다. 아직 잠들어 있는 무라노 섬은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섬 구석구석을 보다 보면 소박하고 아름다운 것들이 눈에 보였다.

곳곳에 보이는 유리공예품처럼 무라노 섬은 아기자기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다음은 부라노 섬에 도착했다. 이곳은 무라노 섬에 비해 비교적 인파가 많았다. 특히 한국인들이 더욱 많았다. 지나가다 들은 이야기지만 아이유의 뮤직비디오 촬영장이기도 했다고 한다. 어느 무리는 아이유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노래를 따라 부르기까지 했다.


'내가 피렌체에서 <냉정과 열정 사이>를 떠올린 것과 비슷한 감성이겠지?'

부라노 섬은 형형색색의 집과 건물들이 유명하다. 그냥 봐도 예쁜데 사진까지 찍으니 더욱 예쁘다. 개인적으로 원색 계열의 색을 좋아해서 그런지 정말 아름다운 섬이었다.


배를 타고 나간 남편들이 잘 찾아올 수 있도록 집의 색깔을 칠했다는 것 같은데 섬에 사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그냥 지나칠 수 없었을 것 같다.


"너희 집은 무슨 색이니?”

“빨간 집이요.”

“우리 집은 이제 노란색으로 바꿔볼까 해.”

“그거 좋은 생각이야.”

바람이 꽤나 차갑게 불어왔다. 섬이라 그런지 바람이 더욱 세차게 느껴졌다. 어느 카페에 들러 몸을 좀 녹이기로 했다. 우리는 라테 한 잔과 초코음료 한 잔을 시켰다.


"대박. 이것 좀 먹어 봐."


무라노 섬의 이 걸쭉한 초코음료는 내 인생에서 가장 맛있는 초코음료로 남을 것 같다. 적당한 당도와 따뜻하면서도 걸쭉한 목 넘김이 예술이었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에서의 초콜릿 폭포가 이런 느낌일까.


"진짜 맛있다."


커피를 시켰던 누나도 맛을 보고는 감탄했다. 아직도 잊을 수가 없는 맛이다. 바람을 맞고 차가워진 나의 손과 얼굴을 따뜻하게 녹여주었다.


생각보다 일찍 본섬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성 마르코 대성당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지도를 보고 한참을 걷다 보니 거대한 마르코 대성당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은 굉장히 넓은 광장이 있어 인파들도 많았지만 갈매기들도 많았다. 녀석들은 굉장히 사람이 익숙한 모양이다. 이렇게 갈매기를 가까이서 오래 본 적도 없는 것 같다. 가까이사 보니 나름 귀엽다. 사방으로 갈매기가 날아든다. 새가 무서운 사람들은 오지 않는 것이 좋겠다.

꽤 오래 걸었더니 허기를 달래고 싶어 졌다. 딱히 무엇을 먹을지는 정하지 않은 터라 눈에 보이는 곳에 들어가려 했다. 여기저기 음식점에 눈길을 주니 상인들이 오라고 손짓하며 윙크를 하고 난리가 났다. 너무 걸었던 탓에 가장 가까이에 있는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훤칠한 이탈리아 남자가 한국어로 인사했다. 우리가 신기한 반응을 보이자 그는 기다렸단 듯이 손가락 하트를 날려주었다.


"대박!”

"어떻게 알았어요?"


우리가 신기해하자 종업원은 손가락 하트를 더욱 신나게 날려 주었다. 아무래도 한국인들이 많이 찾아왔었나 보다. 손가락 하트는 한국인에게 장사하기에 참 좋은 제스처인 것 같다. 그렇게 우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메뉴를 주문했다.


손가락 하트 덕분인지는 모르겠으나 음식도 굉장히 맛있었다. 스파게티는 내가 그토록 찾던 맛이었고, 허기진 배를 흡족하게 채울 수 있었다.

"근데 여기 사람들은 왜 자꾸 윙크를 할까?"

"그래? 나한테는 안 했는데."


당연히 누나에게도 했을 줄 알았는데 남자인 나에게만 날렸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에라 모르겠다. 궁금하긴 한데 깊게 생각할 필요가 있나?


이탈리아는 서비스가 참 좋은 나라다.


배도 부르겠다 주변 상점을 구경했다. 무라노 섬에서 사지 못했던 유리공예품들도 잔뜩 볼 수 있었다. 상점도 많고, 사람도 많았다. 그중에서 유리로 된 지구본이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비싸네."

"다른데 또 있겠지."


생각보다 비싼 가격에 다른 상점에서 저렴하게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감히 예상하고, 상점을 나왔다. 그리고 이곳저곳을 다녀 보았지만 지구본은커녕 비슷한 물건도 보지 못했다. 오히려 유리 지구본이 아른거려 다른 것은 성에 차지도 않았다. 결국 빈 손으로 걷기만 했다.


어느새 해가 저물어 갔다. 그 순간 갑자기 서둘러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어둠이 내린 메스트레를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있던 성 마르코 대성당에서 다시 버스를 타러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했다. 오기 전에 인터넷에서 찾으려 노력했지만 잘 보이지 않아서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여기까지 왔던 것이 문제다. 인터넷에서 본 정보들은 대부분 도착지까지 가는 방법은 많이 나오지만 다시 돌아가는 방법에 대한 안내는 별로 없었다.


"인터넷이 안돼."

"누나 폰은 돼?"

"잘 안돼."


설상가상으로 두 개의 스마트폰 모두 인터넷이 잡히지 않았다. 아무래도 섬이라 유심칩이 말을 듣지 않았나 보다. 게다가 배터리까지 얼마 남지 않았고, 구글맵에 내 위치는 이상하게 나오고 있었다. 할 수 없이 그냥 지도를 보고 느낌으로 따라가 보기로 했다.


섬은 마치 미로 같았다. 여기는 수상도시기 때문에 모든 곳이 육지가 아니다. 이쪽이 길일 것 같아 하고 가보면 물길이 가로막고 있었다. 점프해서 갔다간 자칫하면 물에 빠져 해외토픽에 나올 감이었다. 막다른 곳이 나오면 다시 돌아가고, 물이 있어 돌아가기도 했다. 해가 점점 내려가자 마음은 더 조급해지고, 주변에 아름다운 풍경과 상점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어제 겪었던 어둠의 메스트레를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아 발걸음은 더욱 빨라졌다. 급할수록 돌아가라 했던가. 급한데 어딜 돌아가란 말인지 모르겠다. 돌아가다간 그전에 내가 돌아버릴 것 같았다. 필사적으로 가장 큰길을 따라 걸음을 재촉했다. 내가 너무 급하게 가다 보니 뒤쳐지는 누나한테 조금 미안했다.


너무 넓다. 생각했던 것보다 본섬은 너무 넓었다. 나까지도 다리가 너무 아팠다. 바포레토 정거장이 보일 때마다 산타 루치아 역으로 가는지 보았지만 대게는 외부에 있는 섬으로 향했다. 결국 바포레토는 포기하고 계속해서 본섬의 미로를 탐험했다. 점점 지쳐가기 시작했다.


정말 한참을 걸었다. 상점이고 뭐고 계속 걸었다. 그리고 해가 거의 다 넘어갈 때쯤 처음 도착했던 곳이 보였다. 이 광경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안도할 수 있었다. 어느새 태양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돌아가는 버스에서도 현지인에게 메스트레에 가는 버스가 맞는지 재차 확인하였다. 내가 너무 불안해 하나 싶었다. 결론적으로는 무사히 돌아오긴 했지만 불안함과 두려움에 떨었던 그 감정은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는다. 아쉬운 것은 두려움과 걱정 때문에 돌아오는 길에 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풍경과 골목골목을 제대로 감상하지 못한 것이다. 더구나 유리 지구본을 놓친 것은 두고두고 후회된다. 나에게 마음의 여유가 있었더라면 베네치아와 조금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 텐데...라는 약간의 아쉬움을 남긴 채 하루를 마무리했다.


이것이 이탈리아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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