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행을 하더라도 자랑하지 말고 은밀하게 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이다. 그런데 사람이 어디 그런가? 조그만 선행에도 공치사를 하고 싶어 하는 것이 사람 심리 아니던가. 그걸 알아봐 주지 않을 땐 못내 서운해하기도 한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일이었다. 조금씩 어린애 티를 벗을 시기지만 여전히 자기밖에 모르는 철부지 나이였다. 1980년에도 빈부격차는 여전히 심했다. 호구조사를 할 때, 부모님이 뭐하시는지, 집에 칼라 TV가 있는지도 조사하곤 했었다. 칼라 TV가 있는 가정이 손에 꼽힐 정도로 잘 사는 집은 그리 많지 않았다.
가정 형편은 싸오는 도시락 반찬만 봐도 대충 짐작할 수가 있었다. 비엔나소시지나 계란말이, 진미채를 싸오는 아이는 형편이 좀 나은 편이고, 대부분은 천편일률적으로 김치에 멸치 볶음, 계란 후라이가 전부였다. 나도 그리 잘 사는 집은 아니어서 칼라 TV로 마징가 Z를 보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하며 유년시절을 보냈지만 그렇다고 끼니를 걱정하며 살 정도는 아니었다. 아버지가 목수였던 내 짝꿍은 미술에 소질이 있어 그림과 만들기를 곧잘 하였는데, 아버지를 닮아 소질을 타고났지만 형편이 넉넉지 않아서 미술시간에 만들기를 할 때면 재료가 부족하여 친구들의 남은 재료를 얻어서 하곤 했었다.
어느 날 등교를 하고 수업이 시작되기 전이었다. 짝꿍 책상 서랍에 새 공책 두 권이 있는 게 아닌가. 그 친구는 손을 들어 선생님께 외쳤다.
"선생님! 제 책상에 공책 두 권이 있는데요.."
선생님은 공책의 주인을 밝히려 했지만 드러나지 않았다. 선생님은 내 짝꿍의 가정 형편을 알기에 누가 두고 간 것이라 판단하시고는 더 이상 추궁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일명 천사 게임이 시작되었다. 이런 일이 하루가 멀다 하고 여기저기서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공책, 연필 등 나눔의 향연이 펼쳐졌다. 그러나 그건 오래가지 않았다.
한 번은 은경이라는 여자 아이의 책상 서랍에 새 공책이 들어있었다. 이 아이는 아버지가 지병으로 돌아가시고 홀어머니와 어린 동생 둘과 힘겹게 살아가는 아이었다. 공부도 꽤 잘하는 편이었으나 평소에 말수가 적고 친구들이랑 잘 어울리지도 않아 학급 내에 존재감이 그다지 없었던 아이었다. 그런데 공책이 자기 책상에서 발견되자 갑자기 책상에 엎드린 채 흐느껴 우는 게 아닌가. 자기를 도와준 친구들한테 고마워서 우는 게 아니라 또래 아이들로부터 동정을 받는다는 것이 몹시 자존심이 상했던 모양이었다. 그걸 지켜본 선생님은 천사 게임의 의도는 알겠지만 아무리 좋은 선행이라도 받는 사람이 고맙게 느껴져야 하는데 그게 오히려 상처가 될 수도 있으니 더 이상 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 이후로는 이런 일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만약 친구들이 은경이의 마음까지 헤아려 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은경이한테 필요한 건 공책이 아니라 따뜻한 말 한마디와 마음을 헤아려줄 친구가 필요했을지 모른다.
나는 가끔 자신의 실리만을 추구하는 어른들의 추태를 볼 때마다 어린 시절 훈훈했던 그때 일이 생각나곤 한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했던 어린 친구들의 착한 행동과 나눔 만큼이나 상대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는 것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해 준, 그 어떤 훌륭하신 선생님의 가르침보다 깨우침을 줬던 소중한 경험이었다.
과연 지금 우리 사회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충분히 '인지상정'을, '측은지심'을 발휘하고 있는가. '인간에 대한 예의'를, 그 '존엄'을 가지고 있는가를 진지하게 돌아봐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편리하고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지만 오히려 삭막해져 가는 요즘, 궁핍했던 시절에 어린 친구들이 보여준 아름다웠던 천사들의 합창이 더욱 그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