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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시어는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by 애니마리아





방금
벼락 치는 구름을
통과한 새처럼
내 실핏줄 속으로 당신 영혼의 피

'마크 로스코와 나 2'/19쪽『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한강




『채식주의자』, 『희랍어 시간』,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의 작가, 이제는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의 타이틀까지 있는 한강의 첫 시집이 있다. 바로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이다. 단출하고 시적인 제목의 소설과는 달리 그녀의 시집 제목은 오히려 소설의 한 구절처럼 길다.



아직 초반을 읽고 있지만 몇 편의 시를 읽으며 그녀의 소설에서 나온 낯익은 단어들이 눈에 들어온다. '어둠, 넋, 점, 빛, 언어, 영혼, 그리고 피'. 밝고 희망찬 분위기는 아니다. '영혼의 피 냄새'(19쪽/<마크 로스코와 나 2>에서)는 어떤 빛깔, 어떤 냄새일까. 실제 피처럼 선홍색일까. 빛바랜 사진처럼 노스탤지어가 느껴지는 흐릿한 색일까. 또 그 냄새는 비릿한 생선의 그것을 연상케 할까. 아니면 육체의 피와는 달리 허연 우유 빛깔일까.



위 시의 제목에는 마크 로스코라는 인물 이름과 나, 그리고 옆에 2가 붙어있다. 위 시의 앞에는 '마크 로스코와 나'라는 숫자 없는 시가 나온다. 이 사람이 누군지 몰랐기에 검색을 해보았다. 마크 로스코(Mark Rothko)는 러시아 출신 서양 화가로 추상표현주의 예술가이다. 주로 사각형의 색면 판과 다른 색과의 경계가 불분명하게 스며드는 면이 특징이었다. 그제야 한강의 시어가 조금 이해되었다. 위에 언급한 말 외에 '스며오는 것, 번져오는 것'이라는 시어가 반복되는 이유를. 그녀의 시에 마크 로스코의 그림이 영감을 주었을 것이다. 그의 사망 시기에 한강이 점으로 잉태된 시기와 맞물려 있음을 표현한 시처럼 말이다.






그는 1903년 9월 25일에 태어나
1970년 2월 25일에 죽었고
나는 1970년 11월 27일에 태어나
아직 살아 있다
그의 죽음과 내 출생 사이에 그어진
9개월여의 시간을
다만
가끔 생각한다


16쪽 <마크 로스코와 나-2월의 죽음> 중에서




긴 생각을 압축하고 또 압축한 하나의 점처럼 태어난 언어의 조합이 시인 것처럼 한강의 시에서는 소설의 씨앗이 된 듯한 언어들을 만날 수 있다. 2013년에 발표된 이 시집이 십 년, 이십 년 후에 새로이 수혈을 받고 살집이 붙어 소설로 다시 태어난 것처럼. 분야는 다르지만 초기의 시에서 한강 작가의 한결같은 결과 분위기가 느껴진다. 차분한 이미지와 다소 슬픈 양심과 관조의 눈빛까지도. 제목처럼 저녁, 새벽, 밤의 언어는 독자에게 인사를 하는 듯하다. 제목의 또 다른 축이 될 것 같은 서랍은 앞으로 어떤 식으로 형상화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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