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모른다>와 <아동학대에 관한 뒤늦은 기록> 속 그 아이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엄마가 일하다 크게 다쳐 한 달 동안 병원에 입원했다. 그 한 달이 당시 십 여 년 인생에서 엄마와 가장 오래 떨어져 지낸 기간이었다. 엄마는 우리 가정의 유일한 어른이었다. 할머니를 비롯한 여러 친척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어른을 잃은 우리 형제들은 그 한 달을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때의 경험으로 나는 집을 지키는 어른의 존재가 얼마나 절대적인지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 어른이 폭력적이거나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면 어떨까. 「아무도 모른다」와 『아동학대에 관한 뒤늦은 기록』이 아니었다면 떠올리지 않았을 질문이다.
아무도 모른다
2004년에 개봉한 영화 「아무도 모른다」는 1988년 도쿄에서 일어난 ‘니시스가모 네 아이 방치 사건’을 모티프로 만들어졌다.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자신의 에세이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에서 영화의 배경을 자세히 소개한다.
실제 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소년의 아버지는 일찍이 증발하고, 백화점에서 일하며 몇 몇 남성과 알고 지낸 어머니는 임신과 자택 출산을 반복해 아버지가 다른 네 아이를 더 낳는다. 그중 한 아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목숨을 잃고 남은 네 아이와 살아가던 어머니는 결국 아이들을 완전히 떠나버린다. 가끔씩 보내주는 현금에 의지하며 살아가던 중 장남의 친구에 의해 삼녀가 폭행을 당해 숨지고, 이후 집주인이 아이들끼리만 산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사건이 드러나게 된다.
영화는 이 처참한 실화의 흐름을 그대로 따른다. 엄마와 함께 새 집으로 이사 온 아이들은 학교는커녕 집 밖에도 벗어나지 못하는 삶 속에서 서로 의지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엄마는 곧 그들을 완전히 떠나버리고 남겨진 아이들은 힘겹게 하루하루를 버틴다.
이 영화에 ‘아무도 모른다’라는 말보다 더 어울리는 제목은 없다. 아이들이 부모도 없이 비참한 생활을 이어나가는데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른다. 장남 아키라가 자주 가는 편의점 아르바이트생들은 알지만, 그들이 내어줄 수 있는 도움은 편의점 폐기 음식뿐이다. 이 영화를 지배하는 정서는 ‘무기력’이다. 자신들이 얼마나 폭력적인 상황에 놓여있는지에 대해 자각이 없는 아이들은 엄마를 찾지도, 울지도 않고 위태로운 삶을 간신히 버티기만 한다. 아키라는 아르바이트라도 해보려 하지만, 열두 살밖에 되지 않은 그를 받아줄 일자리는 어디에도 없다. 그에게 도움을 주는 아르바이트생은 경찰서나 복지센터를 찾아가보라는 합리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만, 그러면 넷이서 함께 살 수 없다는 아키라의 말에 그 해결책은 바로 힘을 잃는다. 영화가 후반부에 접어들면 이런 의문이 든다.
‘정말 아무도 몰랐을까?’
최근 정인이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은 한국 사회는 해진 옷을 입거나 씻지 않은 아이를 보면 아동학대를 의심하고 신고하라는 안내문을 내걸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구멍 난 옷에 기름진 머리를 한 아키라를 대하는 편의점 점장의 무신경한 태도는 직무유기가 아닌가. 막내 유키가 허무하게 목숨을 잃고 그를 묻어주기 위해 유키가 좋아했던 초콜릿을 잔뜩 사는 아키라와 이웃 소녀 앞에서 점장은 실없는 웃음을 지으며 소풍이라도 가느냐고 묻는다. 물음에 아이들은 착잡한 표정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현대 사회는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눈다. 경제적 능력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후자에 속하는 아이들은 전기세와 수도세를 내지 못해 전기와 물을 모두 차단당한다. 집은 창고처럼 썩어가고, 바깥세상은 한 번도 그 집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으면서 돈을 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집 안의 생명들을 지워버린다.
모티프가 된 실제 사건에서 버려진 아이들은 모두 출생신고가 되어 있지 않아 학교에도 간 적이 없었다. 법률적으로는 모두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당연히 영화 속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주먹다짐 장면 하나 없이 세상에서 가장 폭력적인 영화를 만들었다. 이 영화에서 러닝타임 내내 자행되는 폭력은 바로 ‘무관심’이다.
네 아이를 집 밖으로 꺼내주지 못한 일본 사회의 무관심은 한국에도 존재한다. ≪한겨레신문≫ 탐사기획팀이 집필한 『아동학대에 관한 뒤늦은 기록』이 바로 그 증거이다.
별이 된 아이들 263명, 그 이름을 부르다
이 책은 2015년 한겨레신문 기자들의 아동학대 사망 사건을 전수 조사하는 취재에서 시작되었다. 어른에게 맞거나 방치되다가 죽은 아이가 몇 명이나 되는지 제대로 세어보고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주자는 게 기획의 취지였다.
조사 과정에서 기자들은 아동학대에 관한 공적인 기록들이 얼마나 허술한지 알게 된다. 터무니없는 통계 수치는 아동학대를 ‘남의 가정사’로 치부하는 인식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였다. 그렇기에 기자들은 뒤늦게나마 기록을 다시 쓸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2008년에서 2014년 사이 아동학대에 의해 사망한 아이들이 총 263명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래서 이 책은 ‘별이 된 아이들 263명, 그 이름을 부르다’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씁쓸한 사실은 이마저도 공적으로 기록된 사건에 한해서일 뿐, 실제는 훨씬 많다는 것이다. 책은 우리 사회가 편협한 인식에 갇혀 외면해왔던 모든 형태의 아동학대 범죄를 다루는데, 「아무도 모른다」의 아이들이 겪은 방임 학대도 그중 하나로 언급된다. 책에서 나열하는 방임 학대의 종류 중 ‘유기’를 제외하고 모든 종류가 영화 속 남매들의 상황에 해당된다.
방임은 물리적 방임, 교육적 방임, 의료적 방임, 유기로 나눌 수 있다. 쉽게 말해 아이를 굶기거나, 학교에 보내지 않거나, 아픈 데도 치료를 하지 않거나, 추운 밤 집 밖에 오랫동안 세워두는 경우 등이다.
-p.91. 류이근·임인택·임지선·최현준·하어영, 『아동학대에 관한 뒤늦은 기록』
책의 저자 중 한 명인 류이근 기자는 미국에서의 일화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자녀들이 유독 좋아하는 김밥이 있는데, 그는 한국에선 종종 아이들을 잠시 차에 두고 혼자 나가서 김밥을 사곤 했다. 그러나 이는 미국에서 엄연히 불법행위이다. 미국 법률상 잠시라도 아이들만 차에 두는 행위는 아동학대로 간주된다. 아이가 우연히 차를 움직일 수도 있고, 다른 운전자가 후진할 때 아이를 보지 못할 수도 있고, 아이가 납치될 수도 있는 위험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단 1분도 아이를 홀로 차에 두지 말라고 하는 세계와 버려진 아이들끼리 몇 개의 계절을 보내는 「아무도 모른다」의 세계는 천지차이다. 한국 사회는 당연히 그 후자에 속한다.
중요한 건 이 방임을 나쁜 부모의 잘못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에서 가해자 엄마를 향한 감독의 복합적인 시선이 드러난다.
분명 이 불행한 사건은 어머니의 무책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 홀로 아이들을 낳고 그럭저럭 키워 왔다는 것 역시 엄연한 사실입니다. 만약 어머니가 그저 신경질적으로 아이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존재였다면, 장남도 동생들을 똑같이 대하지 않았을까요. 그들 모자 사이에는 적어도 보도에서는 엿볼 수 없는 풍성한 관계가 구축되었던 시기도 짧을지언정 있지 않았을까요…….
-p.184.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
실제 사건에서 여동생이 “오빠는 다정했어요”라고 말한 것을 신문 기사에서 보고 싹튼 의문이었다. 감독은 아키라를 자상한 오빠로 묘사하고, 눈물 흘리는 엄마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장면 등을 통해 이러한 생각을 표현한다.
「아무도 모른다」와 『아동학대에 관한 뒤늦은 기록』 모두 아이들이 겪은 폭력에 분노하다 분노가 향해야 할 대상이 한 명이 아니라는 점에서 답답함을 느끼게 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가해자의 안간성에 집중한 건 결코 그녀를 옹호하기 위함이 아니다. 관객의 분노가 개인이 아닌 사회구조에 향하도록 하기 위한 장치다. 가해자에게도 잘못은 있지만, 영화는 그렇다면 어린 아이들은 시끄럽다며 집에 들이지 않는 집주인이나 한 사람이 힘겹게 네 아이를 키우는 동안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는 복지 시스템에는 잘못이 없느냐고 묻는다.
최근 아동학대 이슈가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가해자의 추악한 면모가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렸다. 가해자에게 경악하는 대중들의 심리는 분명 선하지만, 개인의 악마성에만 주목하는 것은 아동학대를 ‘남의 가정사’로 치부하는 기존의 통념과 다를 바가 없다.
책은 단순히 아동학대 사례를 알려주는 것을 넘어 아동복지센터의 인적·물적 자원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 신고의무자가 신고를 하지 않았을 경우 가해지는 처벌이 전무하다는 점 등 아동학대를 가능케 한 사회의 잘못된 구조도 지적한다.
네 명의 아이가 부모 없이 사는 걸 아무도 모르는 영화 속 세상처럼 우리가 사는 이 현실도 263명의 아이들이 별이 되어가는 동안 외면으로 일관했다. 아무도 모르는 고통을 막기 위해서는 이제라도 알려고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아무도 모른다」를 처음 봤을 땐 상상도 못한 수준의 슬픔이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어떻게 저런 현실이 펼쳐질 수 있느냐며 영화를 다 보고나서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최근에 이뤄진 관람에서는 전혀 다르게 느껴져 당혹스러웠다. 몇 몇 장면에서 어린 시절의 내가 겹쳐보였기 때문이다. 아무렇지 않은 줄 알았던 나의 유년시절에도 학대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책 제목 중 ‘뒤늦은’이라는 단어에 시선이 간다. 아동학대 문제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도 뒤늦은 대처다. 이미 너무 많은 고통이 싹텄고 너무 많은 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늦었다는 게 문제를 외면하는 것의 면죄부가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만은 잊지 않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