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개월 전, 고대하던 퇴사의 꿈을 이루고 몇 개월 동안 황금 같은 시간을 보냈다. 가고 싶은 장소에 가고, 영화도 보고, 공연도 보고, 책도 읽고, 모임도 하고, 친구들도 만나고, 여행도 하고... 그렇게 바쁜 시간을 보내는 동안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빼먹고 살았다. 글쓰기를 멈추었다.
회사를 관두면 원 없이 글을 쓰겠노라 다짐했지만 퇴사 뒤 일주일 45시간이 더해져도 나의 손가락은 번듯한 글을 완성하지 못했다. 가지고 있는 것을 쏟아내는 대신 새로운 것을 우걱우걱 받아먹기만 했다. 그러다 해외여행을 다녀온 뒤 계속되는 시차부적응에 며칠 연속 뜬 눈으로 새벽을 보내면서 글로 풀어내지 못한 생각들이 매일 몸집을 키워가고 있음을 느꼈다. 새벽에 하는 생각이 으레 그러하듯이 그 몸집은 계속해서 부정적인 방향으로 커졌다. 어서 글로 풀어내지 않으면 언제 생각에 잠식당할지 모를 일이었다.
나에게 새벽은 언제나 감성적이고 공허한 시간이고, 그럴 때마다 나는 관성처럼 나의 최애 아이돌을 떠올린다. 그 누구도 맘 편히 좋아해 보지 못했던 내가 처음으로 온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대상이다. 나는 오랫동안 궁금했다. 아이돌이란 직업은 대체 어떤 의의를 갖기에 K-POP 시장이 이렇게 거대한 걸까? 아이돌이 하는 일은 기본적으로 춤과 노래를 완벽하게 해내는 일인데, 어떻게 그것만으로 누군가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던 내가 지금의 최애를 만나고 나서야 의문을 해소할 수 있었다. 아이돌이라는 직업의 의의는 단순히 춤과 노래를 잘하는 것에 있지 않았다. 갈 곳 잃은 사랑을 받아주는 데 있었다.
나에게 최애는 '사랑 연습장'이다.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먹을 줄 안다고, 사랑도 받아 본 사람이 줄 줄 안다. 당연히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사랑받은 기억이 없는 나로서는 아주 기분 나쁜 말이다. 나는 노력 없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누군가의 배려가 불편하다. 나는 남에게 민폐만이라도 안 끼치기 위해 전전긍긍하는데 그 사이에 누군가는 물 흐르듯이 베풀고 그 결과로 또 상대의 사랑을 받는다. 사랑받는 사람은 계속 사랑받고, 아닌 사람은 계속 소외되는 이 악순환에 오랜 시간 배가 아팠는데, 최애를 사랑하면서 내 안에 숨어 있었던 사랑을 발견했다. 어린 시절의 결핍이 반드시 성인의 결핍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었다. 내게도 사랑이 있었고,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면 얼마든지 꺼내서 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왜 최애를 만나기 전까지 타인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했던 걸까? 그건 '관계'의 유무에서 비롯되었다. 나는 언제나 내 감정보다 남의 감정을 우선했기 때문에 나의 순수한 감정을 들여다보기 전에 늘 책임감, 죄책감, 두려움이 먼저 따라왔다. 좋으면 그대로 좋아하면 되는데 '내 마음이 부담스럽지 않을까?' 따위의 고민으로 무수히 많았던 좋아할 기회를 날리곤 했다.
그러나 나의 최애는 그럴 일이 없다. 나는 그를 사랑하지만, 그와 나 사이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내가 아무리 사랑을 퍼부어도 그는 나를 모르기 때문에 이 마음이 부담으로 느껴질 일도 없다. 나는 그 점이 몹시 편했고, 곧바로 '아이돌을 사랑하는 나'에 심취해 마음껏 그를 사랑했다. 그러다 깨닫게 된 것이다. 아. 사랑이란 이런 거구나. 내가 그동안 과소평가했던 나를 향한 주변 사람들의 사랑이 이런 거였구나. 항상 완벽하지 않아도, 어떤 이득을 제공하지 않아도, 아무런 조건 없이 그저 존재 자체만으로 사랑할 수 있는 거였구나. 그런 마음으로 내 주변 사람들이 못난 나를 사랑했던 거구나. 사랑도 배울 수 있는 거구나.
그러나 한순간의 깨달음으로 모든 게 해결될 만큼 인생은 간단하지 않다. 사랑에 대해 아무리 깊은 통찰을 이뤄내도 잠 못 드는 새벽 찾아오는 공허함을 물리칠 수는 없었다. 공허함과 외로움은 없애야 하는 적이 아니라 현대인의 친구라는 생각으로 의연하게 받아들였지만, 그래도 힘든 건 힘든 거다. 밖에서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도 새벽녘 밀려드는 공허함에 몸서리치면 상비약 먹듯이 상상 속의 최애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이런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나의 최애는 착하니까 높은 확률로 '당연하지'라고 답할 것이다. 이 가상 문답은 한동안 새벽의 짙은 어둠에서 나를 구해줬다. 그러다 며칠 전 한계를 마주했다. 최애의 격려가 더는 힘이 되지 않았다. 착한 사람이 던지는 착한 답변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나 자신이 내가 사랑받을 수 있다는 걸 확신하지 못하는데. 답은 최애한테 있지 않았다. 세상에서 나를 가장 혐오하는 나 자신에게 있었다. 사랑을 물려받지 못한 나는 최애를 비롯한 수많은 소중한 인연을 통해 사랑을 배웠다. 이제 그 배움을 나에게 써먹어야 할 때였다.
나를 사랑하는 건 나를 마냥 긍정적으로만 여긴다는 뜻이 아니다. 애초에 불가능하다. 싫어도 평생 밑바닥까지 들여다봐야 하는데 어떻게 이렇게 결함 많은 나를 마냥 찬양한단 말인가. 그 대신 나는 못난 나를 '받아들였'다. 나는 나를 선택할 수 없고,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부족한 나를 견디며 살아가기로 했다. 사랑한다는 말에 '포기하지 않고 견디는 마음'이라는 의미까지 포함된다면, 완벽하지 않아도, 어떤 이득을 제공하지 않아도, 아무런 조건 없이 존재 자체만으로 나를 사랑할 수 있다. 타인에게 사랑받고 싶으면, 당장 나부터 내가 바라는 형태대로 나를 사랑해야 한다.
최근에 친구들과 사랑은 노력으로 안 된다는 내용의 대화를 주고받았다. 깊이 동의한다. 의무감으로 '좋아해야지'라며 노력했던 대상이 몇 있었지만 끝내 진심으로 좋아할 수 없었다. 지금의 최애도 전혀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별안간 흠뻑 빠진 것이다. 내가 배운 건 사랑에 빠지는 법이 아니라 가슴속 사랑을 꺼내고 베푸는 법이었다. 노력해야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그러나 나 자신한테는 노력해야 한다. 나는 나를 정말 좋아할 수 없다. 아무리 좋아해 보려고 해도 내가 끔찍하게 싫어하는 단점은 평생 나를 졸졸 따라오고, 그 단점으로 남에게 민폐라도 끼치는 날엔 정말 나를 남김없이 소멸시키고 싶다. 하지만 나는 나를 끊어낼 수 없다. 나는 이 못난 나를 평생 끌어안고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매 순간 최대한 나를 사랑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여느 날처럼 최애를 떠올렸던 며칠 전 새벽, 평소와는 다른 결론에 다다른 나는 이 생각을 꼭 글로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글쓰기라는 행위 자체가 피곤하게 느껴져 한동안 타인의 생각을 집어넣기만 했지만, 이제는 나도 내 생각을 꺼내야 할 때다. 왜냐하면 역시 나는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한심한 나라도 드러내고 싶고, 내 주변 사람은 물론 익명의 독자인 당신에게도 사랑받고 싶다. 무엇보다도 나는 글을 쓰면서 나 자신을 사랑하고 싶다.
뼈저리게 공감했던 김겨울의 책에 관련된 에세이 [책의 말들]의 한 부분을 인용하며 이 글을 마친다.
멍청한 짓을 저지른 후 그걸 수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글을 쓰는 것이다. 글쓰기가 멍청한 짓을 무마해 주어서가 아니라 내가 멍청한 짓을 했다는 걸 받아들이게 해 준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노트는 자신의 한심함과 부족함, 답답함, 슬픔, 종내는 그럼에도 이렇게 계속 살아야 한다는 체념으로 가득 찬다. 노트 속에서 세상은 그 어느 때보다도 어둡다. 그러나 빽빽이 채워진 노트는 세상에 대한 그 빽빽한 미련으로 오히려 세상과 자신을 가장 사랑했다는 증거, 더 나아가 사랑하고 싶지 않았으나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열렬한 러브 스토리의 증거로 남는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글을 쓰는 사람은 자신을 미워하면서 사랑하고, 세상을 미워하면서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