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생일이었다. 생일이 다가오면 한 주 내내 들뜨는 사람들도 있던데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 올해도 생일 전날까지도 아무 생각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위시리스트를 채우라는 친구의 독촉에 '아, 나 곧 생일이지!' 하고 떠올릴 정도였다.
내가 생일에 둔감한 이유는 실망하기 싫어서다. 생일이 방학인 탓에 학교에서 축하를 받을 수 없었고, 교우관계도 협소해서 따로 축하해 주는 친구도 없었다. 매사에 내게 무관심했던 가족들 역시 아무렇지 않게 나의 생일을 지났다. 생일에 의미를 부여하면 이런 무심한 반응에 상처를 입게 된다.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해 내가 더 나서서 생일 따위 귀찮게 왜 챙기냐며 덤덤하게 행동했다.
그러다 최근 몇 해 동안 분에 넘치는 생일 축하를 받았다. 특히 작년에는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과분한 생일을 보냈다. 생일 일주일 전엔 서울에 놀러 온 친구들이 깜짝 서프라이즈로 생일 케이크를 받았다. 생일 이틀 전에는 친한 친구들이 나를 위해 파티룸을 빌리고 한 명씩 선물을 증정하는데, 선물을 받으면서 기쁘면서도 '내가 뭐라고 이런 축하를 받지?'라는 생각에 떨떠름했다. 생일 당일엔 다른 친구와 단둘이 만나 선물을 받았다. 무려 세 번에 걸친 성대한 축하에 생일 자체에 의미가 없더라도 나의 생일을 축하해 주는 친구들의 마음엔 의미가 있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올해 생일은 작년보다 생각이 많은 상태로 맞이했다. 몇 년 전부터 나는 내가 한국 나이로 28살이 되는 해의 생일을 기념하는 글을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그 이유는 나의 엄마가 나를 낳았을 때의 나이가 28살이었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어릴 적엔 멀게만 느껴졌던 어른의 입장에 다가간다는 뜻이다. 그동안 나는 내가 태어나기 전까지의 엄마의 나이를 살았다. 이제부터 내가 경험할 나이는 내가 태어난 이후의 엄마 나이다. 2024년, 28살의 나는 퇴사 후 불안한 하루하루를 살아내기에 급급하고, 1997년, 28살의 엄마는 네 번째 딸을 낳았다.
몇 년 전 언니는 조카를 낳은 이후로 엄마가 어떻게 다섯 명을 낳았는지 믿을 수 없다는 말을 자주 했다. 출산의 고통과 더 길게 이어지는 육아의 고통. 형부와 사회의 도움으로 바등바등 두 아이를 키우는 언니는 마땅한 도움도 받지 못하고 혼자 다섯 명을 키워낸 엄마가 대단해 보일 만하다.
넷째라고 하면 다들 내가 첫째 언니와 나이차가 많이 날 거라고 예상하지만, 놀랍게도 고작 다섯 살밖에 차이 나지 않는다. 큰 언니와 막내의 나이차는 9살이다. 이 말은 즉슨 엄마는 고작 10년 동안 다섯 명의 딸을 낳았으며, 엄마의 90년대는 출산과 육아로만 점철되었다는 뜻이다. 큰 언니를 임신했을 때 엄마의 나이는 22살이었고, 막내를 낳았을 때 엄마의 나이는 32살이었다. 내가 대학교를 졸업하고, 아르바이트하며 취업을 준비하고, 회사에 다녔다가 퇴사하고 뒤늦은 진로 고민에 방황하며 보낸 20대를 엄마는 누군가의 엄마로서만 보냈다.
물론 옛날엔 산아제한정책이 있을 만큼 아이를 많이 낳는 경향이 있었다만, 그것도 전후 세대에게나 해당되는 일이지, 내가 태어난 90년대에는 이미 셋 이상 낳는 가정은 많이 없어진 분위기였다. 넉넉하지도 않은 가정 형편에 다섯 명이나 자식을 낳다니, 이 불합리한 행동의 이유를 나의 형제 관계를 들은 모든 이가 단번에 파악했다.
"아들 낳으려다 그렇게 됐구나?"
그렇다. 만약 내 위에 오빠가 있었다면 나는 굳이 태어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엄마 본인도 여러 차례 그 사실을 인정했다. 저 말은 어릴 적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는데, 지금도 가끔 성인 대 성인으로서 스몰토크를 하다 자연스럽게 내게 언니가 세 명이나 있다는 정보가 흘러나올 때 저 말을 듣는다. 맞는 말이라 별생각 없이 동의해 온 말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참 무례한 발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초면에 나의 탄생 이유를 '아들 낳으려다 실패해서'라고 평가할 자격이 누구한테 있단 말인가. 그 말은 나 역시 실패작이라는 것 아닌가. 선택의 여지없이 태어나고 보니 누군가의 넷째 딸이 된 나에게 저 말을 내뱉은 어른들도 참 폭력적이었다고, 다 지난 이제 와서야 씁쓸하게 생각한다.
사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물건은 만들어진 목적이 있다. 볼펜은 누군가가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글과 그림을 완성하는 도구, 그것이 볼펜의 본질이다. 그러나 인간은 아니다. 인간은 특정 목적 때문에 태어난 게 아니고, 일단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 세상에 던져진 것이다. 본질은 삶을 사는 본인이 스스로 완성하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관점에서 보면 나는 실존보다 본질이 앞선다. 나는 '딸밖에 없는 이 집안에 아들을 안겨주기 위해서' 만들어진 존재다. 그리고 나는 그 본질을 제대로 수행해내지 못했다. 불량품으로 만들어진 볼펜처럼 여자로 태어나버린 나는 본질을 상실하고 지긋지긋한 실존만 남은 사람이 되었다.
내가 딸이라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아도 어렸을 때부터 줄곧 '굳이' 태어났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딱 봐도 우리 집은 다섯 명의 아이를 감당할 형편이 되지 못했고, 우리 자매는 어른의 관심이 부족한 환경을 스스로 고군분투하며 이겨냈다. 그 와중에 나는 동생 라인이라는 이유로 앞서 고군분투한 언니들의 돌봄 속에서 비교적 편하게 성장했다. 하지만 나와 나이차도 별로 나지 않는 언니들이 어쩌다 한번 연약한 모습을 보일 때면 부모와 언니들의 짐으로 태어난 내 존재가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 없었다. 엄마와 언니들의 고통이 한 번에 터졌던 시기를 거친 뒤에는 '버려지지 않은 것만으로 감사해야지'라는 생각이 뇌리에 박혀버렸다.
평생 존재 자체를 미안해하며 살아오다가 철학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나의 실존을 긍정할 수 있었다. 버거운 1인분의 삶, 보통 사람들보다 일찍 경험한 부모의 죽음 속에서 '나도 죽으면 안 될까'라는 생각을 가슴속에 늘 품던 내게 철학은 삶의 무의미함에 몸서리치는 나의 발악이 곧 삶이라고 말해줬다.
그렇다면 끝내 아들을 낳지 못한 엄마의 실존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몇 달 전, 서울로 놀러 온 엄마와 카페에서 대화를 나누다가 다섯 딸을 낳은 엄마의 고생담을 들어주었다. 혹시 내 기억이 틀린 건 아닐까 의심하며 어쩌다 다섯 명을 낳았냐며 새삼스럽게 던진 질문에 역시나 엄마는 아무렇지 않게 '아들 낳으려다 그렇게 된 거지'라고 답했다.
아이를 임신하면 10개월을 뱃속에 품어야 하는데, 큰언니와 둘째 언니는 한 살 차이고, 둘째 언니와 셋째 언니, 셋째 언니와 나는 두 살 차이다. 엄마의 20대가 임신과 출산으로만 점철되었다는 뒤늦은 깨달음도 이때 얻었다. 자식의 성별을 결정하는 데 엄마의 영향은 조금도 없는데도(남자의 염색체가 성별을 결정한다), 엄마는 아들을 바라는 분위기에 맞춰 그 고통스러운 출산을 반복했다. 며칠 전 본가에 다녀왔을 때는 아이를 낳고 그다음 날 바로 일을 나갔다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지나친 철없음으로 많은 상처를 남긴 양육자를 이제는 그만 연민해야지 다짐했지만 쉽지 않은 노릇이다. 오랜만에 엄마가 정말 가여웠다. 태어났으면 책임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도 다섯째 딸을 낳자마자 남편을 보내고 살아온 엄마의 삶은 여전히 마음껏 미워하고 싶은 나의 발목을 붙잡는다.
90년대 초에 여아 낙태가 성행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 시기는 태아의 성별을 미리 알 수 있는 기술이 나타난 시기였다. 뱃속 아이의 성별을 미리 알 수 있게 되자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불필요한 여아의 탄생을 미리 저지했다. 시골에 위치한 우리 집은 낙태는 꿈도 못 꿀 정도로 보수적이어서 그렇게 아들을 바랐으면서도 기어코 다섯 명의 딸을 낳았다.
사람들은 본인의 의지로 통제할 수 없는 일에 무력감을 느낀다. 아들을 낳는 것도 엄마의 의지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고, 아들로 태어나는 것도 내 의지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의지와 무관하게 가난한 집안의 넷째 딸로 태어난 내가 다섯 딸을 낳은 엄마에게 보내는 연민은 참으로 공허하다.
사는 건 항상 버겁지만, 그래도 이 버거운 삶을 포기하지 않고 스물일곱 번째 생일을 맞이한 내가 대견하다. 그동안 내 생일의 의미는 타인의 축하에 달려있었다. 올해 생일만큼은 그 의미를 나 스스로 만들고 싶다. 나의 탄생에는 의미가 없지만, 내가 살아온 지난 시간은 의미 있다. 내가 함부로 연민한 엄마의 삶도 당연히 나름의 의미가 있다. 앞으로 차근차근 엄마의 나이를 경험할 나의 미래도 미리 긍정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