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뮤지엄을 처음 방문한 때는 2017년이었다. 관람했던 전시는 샤넬 전. 그때의 전시는 꽤 인상이 깊었는데 좁은 전시장을 다채로우면서도 입체적으로 구성해 기억에 남았다. 당시 디뮤지엄은 한남동에 있었다. 벽돌로 지어진 건물이 인상적이긴 했지만 자동차가 아니고는 찾아가기가 번거로워 불편했다. 그래서 이번 방문지에서 제외시켰다. 그런데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접근성을 고려해 디뮤지엄이 자리를 옮겼다는 것이다. 성수동 서울숲역으로.
디뮤지엄이 새로 둥지를 튼 곳은 아크로 서울포레스트다. 이곳은 아파트 2개 동(주상복합 49층)과 디타워(오피스 33층), 문화/상업시설(4층)로 이루어진 복합문화 주거공간으로 대림산업에서 시행, 시공을 맡았다[아크로 서울포레스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참조]. 그러니까 디뮤지엄이 2015년 대림문화재단이 설립 20주년을 맞아 개관한 미술관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이곳으로 옮긴 것은 당연한 수순으로 보인다.
디뮤지엄은 수인분당선 서울숲역 4번 출구와 지하로 연결되어 있다. 덕분에 예전보다 대중교통으로 접근하기가 훨씬 편리하다. 현재 열리고 있는 전시는 '서울숲 개관 특별전'. 2021년 이전 후 두 번째 전시다. 전시의 제목은 <어쨌든, 사랑(Romantic Days)>. 로맨스의 다양한 순간과 감정들을 공감각적으로 선보인다더니 '로맨틱'이라는 단어에 걸맞게 연결 통로부터 분홍과 보랏빛의 하트로 가득하다.
지하 통로를 지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한 층 더 올라가면 미술관 로비가 나타난다. 티켓부스와 무인단말기(키오스크), 물품보관함, 유모차 보관소 등이 마련되어 있다. 전시 입장료는 성인 18,000원. 하지만 회원이거나 네이버로 예약했을 경우에는 12,600원(30% 할인), 신규 회원의 경우에는 50%까지 할인이 된다(전시 종료 시까지 재관람 가능).
'로맨틱'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전시장은 온통 파스텔톤 풋풋한 사랑의 빛깔로 흘러넘친다. 그야말로 사랑의 판타지다. 로맨스로부터 일찌감치 멀어진 입장에서는 곳곳에 부려놓은 로맨틱한 문구에 "구여운 것!"이라는 단어가 저절로 튀어나온다. 일테면 이런 것. '너에게 가고 있어!', '보여? 나의 마음'....
샤넬 전에서도 그랬지만 디뮤지엄은 도입과 결말이 늘 인상적이다. 샤넬 전에는 도입부에 샤넬의 작업실을,
결말부에서는 완성된 의상을 전시해 놓았었다. 그래서 전시가 도입과 결말이 맞물리는 느낌을 받았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사랑> 전은 신일숙 작가로 문을 열고 신일숙 작가로 문을 닫는다.
프롤로그 전시실에서 신일숙 작가의 『아르미안의 네 딸들』을 발견하고는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오래전, 네 딸들의 이야기에 푹 빠졌던 시절이 새록새록 떠올랐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작가의 책을 들추며 추억에 잠겼다. 신일숙 작가를 알지 못하는 지인을 끌어다 노란색 커튼이 쳐진 공간에서 만화책을 읽느라 한참을 머물렀다. 만화책 말미에 실린 '왕따를 왕따인 줄도 모를 만큼 사회성이 떨어졌다'는 작가의 이야기를 읽으며 역시나 예술가들은 반쯤은 자폐의 기질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신일숙 작가 외에도 90년대 전성기를 누렸던 천계영(언프러그드 보이), 이은혜(블루), 이빈(크레이지 러브 스토리), 이미라(인어공주를 위하여), 원수연(풀하우스), 박은아(다정다감)의 작품이 구비되어 있으니
추억의 작가가 있다면 머물러 작품과 조우하길 바란다.
이번 전시는 프롤로그를 제외하고 7개의 섹션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섹션마다 국내 작가와 국외 작가의 작품이 뒤섞여 있는데 국내 작가는 대부분 순정만화 작가이지만 국외 작가의 경우는 80~90년대 출생의 포토그래퍼와 일러스트레이터, 설치 작가 들이다. 이들의 작품이 노랑, 파랑, 분홍, 연두, 빨강, 검정의 가벽과 어우러져 로맨스의 다채로움을 뽐낸다. 그래서인지 전시는 전체적으로 사랑의 판타지에 가깝다. 순정만화처럼.
섹션 1(사랑인지도 모르고 서툴렀던 그 때)은 유년 시절의 사랑스러움을 물씬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파스텔톤의 가벽과 사진들이 풋풋함을 자아낸다.
섹션 2(언젠가는 바라봐 주기를 간절히 바라던 그 밤)는 대형 스크린이 인상 깊었던 공간이다. 이은혜의 대표작 "블루"를 뉴 미디어 아트 그룹 아이엠파인이 작업한 영상으로 만날 수 있다. 그 외에도 벽 전체를 푸른색 캠퍼스로 사용해 상당히 몽환적이다.
섹션 3(미칠 것 같이 뜨겁게 열병을 앓던 그 해)은 어린이를 동반한 부모라면 다소 주춤하게 될 공간이다. 절절한 사랑에서 빠질 수 없는 육체적 탐닉과 나신을 가감 없이 마련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미술관에서는 "관람 시 부모의 지도가 필요하다"는 팻말을 설치해 놓기도 했다.
섹션 4(애타게 기다려 다시 만난 그 날)는 높고 긴 복도를 활용한 전시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이러한 방법은 샤넬 전에서도 접했던 것인데 그때는 공중에 매달린 사진들이 위아래로 움직여 더 인상 깊었다.
섹션 5(잡힐 듯 잡히지 않는 꿈결 같던 그 시간)는 6개의 아치로 꾸며진 공간이었는데 아치의 모양이 똑같아서인지 여타의 구성에 비해 다소 밋밋하게 다가왔다.
섹션 6(소중한 추억으로 반짝반짝 빛나던 그 시절)은 포토그래퍼 헨리 오 헤드와 파올로 라엘리의 인상적인 사진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사진 속 젊은이들의 모습이 정말 반짝반짝 빛난다. 자유로우면서도 따뜻하고 애틋한 장면들을 만날 수 있다.
섹션 7(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는 지금 이 순간)은 혼자였다가 둘이 되고 다시 혼자가 되기도 하는 사랑의 외로움을 표현한 공간이다. 델피 카르모나, 파올로 라엘리, 테오 고슬린, 그리고 루카스 와이어보스키의 사진들을 만날 수 있다. 더불어 『아르미안의 네 딸들』의 명대사 "운명은 언제나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그 의미를 갖는다"라는 문장이 웅장한 음악과 함께 대미를 장식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관람을 마치고 루프탑에 올랐다. '로맨틱 가든'이라는데 천장에 드리워진 전구에 불이 들어오는 저녁이면 모를까 햇살도 뜨겁고 전시된 식물들도 모두 조화여서 전혀 로맨틱하지 않았다.
뮤지엄숍을 마지막으로 둘러보고 서울숲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러다 컨테이너 박스를 만났다. 알고 보니 이곳이 116개의 컨테이너로 지어진 공익문화공간이라는 언더스탠드 에비뉴다. 무더운 대낮이기도 하고 철수한 공간이 많아서인지 인적이 드물었다. 하지만 분식점과 카페는 영업 중이어서 디뮤지엄의 세련된 식당과 카페를 뒤로 하고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카페 서울숲'은 겉에서 보기와 달리 내부가 너무 넓어서 깜짝 놀랐다. 어림잡아 최소 컨테이너 6개는 터서 만든 모양새다. 새파란 색상이 시원스럽다. 덕분에 언더스탠드 에비뉴가 어떤 곳인지 알게 되었다(청년엔 창업 어르신엔 일터…서울숲 앞 컨테이너 숲 '세대 벽'도 허물어 (edaily.co.kr) 참조). 저렴한 커피를 마시며 시원한 실내에서 지인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 삼매경에 빠졌다. 결국 서울숲을 코앞에 두고 돌아갈 시간이 다 되고 말았다.
지하철을 타려고 언더스탠드 에비뉴에서 나와 서울숲역으로 향했다. 그러다 에스컬레이터 이정표 옆에 자리한 자그마한 표지석을 발견했다. 내용을 읽어보니 지금 지나왔던 길이 예전에는 경마로였던 모양이다. 표지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
뚝섬경마장은 1954년 5월 8일 조성되어 약 36년간 운영되었고, 과천 경마장으로 이전하면서 1989년 8월 31일 사라지게 되었다. 뚝섬경마장의 역사적 흔적을 남기고자 경마로로 사용된 구간을 보행로로 조성하였다.
경마장은 원래부터 과천에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니... 경마로였던 거리를 잠시 돌아보고는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음 나들이에서는 또 무엇과 마주칠까 무척 궁금해지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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