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즉에 가보고 싶었던 미술관이 있었다. 지상의 유리 돔 천장을 통해 지하 4층 아래까지 햇살이 내리쬐고, 지하철역 곳곳에서 미술 작품과 신록의 푸르름을 만날 수 있는 곳. 바로 서울 6호선 녹사평역 미술관이다.
2019년 매스컴을 통해 처음 소식을 접하고 그곳 주민들을 부러워했었다. 들고나며 일상에서 수시로 미술관을 접할 수 있다니... 게다가 지하철역에 마련된 근사한 정원이라니....
그 생각은 나만의 것은 아니었는지 사진작가 윤광준은 그의 저서 "내가 사랑한 공간들"에서 '모든 전철역은 아름다워야 한다'라는 제목으로 녹사평역에 대한 이야기를 책의 첫머리에 올리기도 했다. 그는 책에서 '공공시설에서 마주치는 디자인의 수준이 곧 그 사회의 품격을 드러낸다'고 말하며 사람들이 자주 드나들고 머무는 버스정류장이나 전철역, 어린이집, 주민센터, 도서관, 우체국 같은 곳이 다른 어느 곳보다 아름다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백 번 맞는 말이다. 그래서 녹사평역 미술관이 더 궁금했다. 그런데....
코로나 때문일까, 아니면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비극적 종말 때문일까. 예상했던 모습과 전혀 다르게 펼쳐진 모습에 깜짝 놀랐다. 예상했던 모습은 '2018년 서울은 미술관'이라는 글을 통해 본 초창기 모습[녹사평역 지하예술정원, 2018 (seoulismuseum.kr) 참조]이었다. '푸른 풀이 무성한 들판'을 뜻하는 '녹사평'이라는 이름을 너무도 잘 보여주는 풍경 말이다. 그런데 방문한 녹사평역은 '새로운 미술관'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그곳이 맞나? 싶을 만큼 퇴락한 모습이었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모습은 <시간의 정원>이었다. '총 600여 개의 식물이 시민정원사들의 정성과 보살핌 속에서 쑥쑥 자란다'고 매스컴을 탔던 모든 식물이 사라지고 '철거예정'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눈가림을 위해 얼기설기 심어놓은 조악한 대나무, 텅 빈 진열대, 식물은 뽑히고 흙만 남은 빈 화분과 얼룩진 도자기... 버려진 흔적이 역력한 <시간의 정원>을 바라보며 마음이 착잡했다. '녹사평역 공공미술 프로젝트'와는 너무나도 대비되는 모습이어서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텅 비고 차가운 교통시설을 자연과 예술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문화명소로 만든다는 취지'가 무색했다[녹사평역, 정원이 있는 미술관으로 탈바꿈 완료 - 머니투데이 (mt.co.kr) 참조].
이대로 방치하는 건가 싶어 근처 사무실 문을 노크하고 관계자에게 슬쩍 조성 계획을 물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계획이 없다는 것. 이런 모습이 얼마 동안 이어질지 알 수 없다니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건 승강장 벽면 전시물과 개찰구의 조형물들은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파노라믹 스크린을 활용한 정진수 작가의 작품 <흐름>의 경우에도 방치의 흔적을 비켜가지는 못했다. 한쪽 벽면의 스크린이 고장이 났는지 화면을 하얀 종이로 가려놓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서울과 뉴욕의 전철을 이용하며 보았던 경관 중 위로가 된 순간들을 포착하여 재구성했다고 한다. 화면으로는 넘실대는 물결과 구름, 바삐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끊이지 않고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 모습은 한쪽 스크린으로만 송출되고 있어 더 을씨년스럽게 다가왔다.
녹사평역에서는 지하 5층 승강장에서부터 미술작품을 만날 수 있다. 광고판에 광고를 부착하는 대신 미술작품을 전시한 것인데 <깊이의 동굴-순간의 연대기>가 그것이다. 이 작품은 지층의 흐름과 무늬를 읽어보는 시간을 갖도록 유도한 작품이라고 한다.
지하 5층 승강장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 4층 개찰구에 오르면 조소희 작가의 <녹사평 여기...>라는 작품이 시선을 빼앗는다. 코바늘 뜨기로 알루미늄 선을 엮어서 5개월 동안 139개의 레이어를 조합하여 만든 작품이라는데 식물의 증식과 성장을 은유하고자 했다고 한다. 천장 가득 드리운 레이어들은 마치 오로라 같기도 하고 숲 같기도 했다.
그 오른편에는 남산의 숲을 표현한 김아연 작가의 <숲 갤러리>가 자리하고 있다. 남산에서 자라고 있는 다양한 나무들의 밀도와 변화를 시각, 청각, 후각을 통해 느낄 수 있도록 실제 숲처럼 재구성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걸어보니 보는 것과는 느낌이 달랐다. 겉에서 볼 때는 웬 막대들만 세워놓았나 했는데 나무 사이로 걸음을 옮기니 마치 숲 속을 거니는 듯한 묘한 느낌을 자아냈다.
녹사평역에는 벽화 형태의 전시물도 있는데 최범진, 안혜경 작가의 <교렴(轎簾)>과 <상생>이 그것이다. 특히 <교렴(轎簾)>은 조각보의 느낌을 반영했다는데 컬러 유리를 사용해서인지 스테인드글라스의 느낌이 더 강하다. 지하 4층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르다 보면 정면으로 점점 화려하게 다가드는 작품과 마주할 수 있다.
그 외에도 녹사평역 주변의 담을 표현한 작품도 있다. 정희우 작가의 <담의 시간들>이 그것이다. 이 작품은 녹사평역을 나서면 마주하게 되는, 지금은 빈 터로 남아 있는 미군기지의 담에 주목한 작품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시간을 상징하는 각기 다른 모양의 담을 탁본하여 역 안으로 들여왔다고 한다. 탁본은 담의 미세한 균열까지 담아내기 때문에 흔적도크기도 실재에 가까워주변의 담을 녹사평역 내에서도 그대로 경험할 수 있다.
왼쪽 사진은 녹사평역 주변의 담을 탁본한 설치작품 <담의 시간들>, 오른쪽 사진은 색연필을 활용해 만든 작품 <깊이의 동굴-순간의 연대기>.
왼쪽 사진은 조각보를 묘사한 설치작품 <교렴>, 오른쪽 사진은 알루미늄 선을 코바늘로 떠 그물 형태로 만든 설치작품 <녹사평 여기...>.
지하 5층에서부터 지하 1층까지 전시물을 돌아본 후 1번 출구로 나서 녹사평 육교에 올랐다. 거리를 달리는 자동차와 남산이 정면에 바라다보였다. 세계적인 지하철역 공공미술관으로의 가능성을 점쳤던 수많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떠올리며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서울에 살면서도 처음 발길이 닿은 역. 그곳에서 처음 시도와 다르게 펼쳐진 풍경을 마주했다. 모쪼록 흉물스럽지 않게, '녹사평'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푸르른 미술관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