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호선 안국역에 내려 1번 출구로 나섰다가 깜짝 놀랐다. 풍문여고가 있던 자리에 못 보던 건물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아니, 학교는 어디로 가고 박물관이... 코로나 기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알고 보니 작년 11월에 개관한 서울공예박물관이었다. 오호라!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미술관에 가려던 발걸음을 돌려 박물관으로 향했다. 그렇게 시작된 서울공예박물관 탐방.
먼저 안내동을 들렀다. 대략의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안내동은 유리 통창과 높은 천장, 백색과 대나무 색상이 어우러져 세련되면서도 따듯함을 선사했는데, 특히 조명, 의자, 안내데스크 등에 쓰인 가구들이 여느 공공 박물관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함을 자랑했다. 알고 보니 모두 작가들이 만든 공예품이 아닌가!
서울공예박물관은 7개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전시동 3개와 안내동, 교육동, 별당, 관리동. 이 중 전시1동과 안내동은 새로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건축 탐구] 땅의 기억을 품은 서울공예박물관 (brunch.co.kr) 참조]. 가장 최근에 지어진 박물관이어서일까. 서울공예박물관은 몇 가지 점에서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우선, 창문. 걸음을 옮기며 만나는 창문에서 내다보이는 풍경마다 탄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 그야말로 창으로 보이는 풍경이 한 폭의 그림 같다. 재미있는 것은 그림을 감상하라는 듯 창마다 의자까지 갖다 놓았다는 사실.
그다음으로는 가구. 로비에 마련된 안내데스크와 휴게 의자, 수납장 등이 작가의 작품이라 독특한 멋을 선사했다. 작품의 이름은 주변 벽면을 살피면 만날 수 있다. 특히 도서실의 책장과 탁자, 그리고 의자는 여느 공공도서관에서는 볼 수 없는 고급스러움을 풍겨 너무 좋았다. 도서실의 정식 명칭은 공예도서실. 공예 관련 서적과 건축, 디자인 등 미술 관련 도서들이 비치되어 있는 전문 도서실이다. 전시1동 1층에 마련되어 있다. 이곳에는 전시 도록이 마련되어 있어 전시와 관련한 이야기가 궁금한 관람객이라면 한 번쯤 들러 책을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책은 열람만 가능하다. 운영시간은 화요일에서 토요일 오전 10시에서 6시까지이다.
그다음으로는 동선. 건물의 동선이 매우 효율적이다. 전시3동 3층에서부터 관람을 시작했는데 어느새 흘러 흘러 전시1동 로비에 다다랐다. 교육동을 제외하고는 한 번에 모든 전시를 훑어볼 수 있는 동선이었다. 이런 동선이 가능한 것은 194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서로 다른 시기에 지어진 학교 건물 다섯 동에 두 동을 덧대 신축한 덕분이다. 전시1동은 경교장을 설계한 김세연 건축가가, 전시3동은 장충체육관을 설계한 김정수 건축가의 작품이라고 한다. 7개의 건물은 저마다 멋스러움을 자랑했는데 특히 어린이박물관이 있는 교육동은 외관이 무척 이채로웠다. 십자형 건물에 색색의 띠로 둥글게 외관을 둘렀는데 띠는 철제 프레임을 붙인 뒤 얼레에 연실을 감듯 원형 테라코타 판을 일일이 연결해 만든 것이라고 한다[서울 한복판에 나타난 얼레?… 공예박물관입니다 - 조선일보 (chosun.com) 참조].
건물 주변으로 담이 없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윤보선길이든 율곡로(덕성여고 앞길)든 가로질러 갈 수 있다. 건축가가 "초등학교 때 정문으로 가지 않고 담을 넘어가는 마음을 떠올리며 학교 안과 밖을 경계 짓던 담을 여기저기 허물었다"고 하더니 정말 누구나 골목을 드나들 둣 박물관을 지나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나치며 바라보는 풍경은 또 얼마나 근사한지!
마지막으로 400년 된 은행나무. 전시1동과 전시2동 창문을 지날 때마다 슬몃슬몃 보이는 은행나무는 그 자체로 작품이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멋스러운 생명체는 나무가 유일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실감할 수 있는 풍경이었다.
서울공예박물관에서 현재 진행 중인 전시는 상설전 6개와 기획전 3개. 전시장을 어찌나 잘 꾸며 놓았던지 연신 감탄하며 둘러보았다. 가벽과 전시대, 전시물의 조화가 일품이니 꼭 들러 감상하기를 바란다.
기획전시 중 가장 인기몰이 중인 전시는 '로에베 재단 공예상' 전시. 방문한 날이 평일인데도 줄이 꽤 길었다. 로에베 재단은 문화의 소외된 분야를 지원하기 위해 스페인 명품 브랜드 로에베(LVMH그룹 소속)가 1988년에 설립한 재단이라고 한다. 장인들의 탁월한 기술과 예술적 가치를 기념하기 위해 2016년 공예상을 제정했는데 2022 공예상에는 총 116개국에서 3,100여 명의 아티스트가 지원했고 그중 30개 작품이 최종 결선에 올랐다고 한다. 대상은 정다혜 작가의 ‘성실의 시간’(2021)[[인터뷰] BTS RM도 주목…‘로에베 재단 공예상’ 한국인 첫 우승 정다혜 작가 - 농민신문 (nongmin.com) 참조]. 그 외에도 후보 30명 중 7명이 한국 작가이다[2016년 탄생한 로에베 공예상…한국 공예강국으로 자리매김 | 한경닷컴 (hankyung.com) 참조]. 그 사실을 알고 나니 줄이 왜 그렇게 길었는지 알 것 같았다.
개인적으로는 수묵화를 연상케 하는 정소윤 작가의 <누군가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Someone Is Praying for You)>라는 작품이 눈에 들었다. 소재는 방충망, 낚싯줄, 모기장에 주로 쓰이는 모노필라멘트라는데 마치 안개 자욱한 산등성이를 보는 듯해 인상 깊었다.
서울시에서 운영해서인지 모든 전시는 무료다. 세금으로 운영되는 곳이니 누리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손해가 아닐까.
상설전은 작년 7월에 처음 선보여 기한 없이 이어지고 있는 반면, 기획전은 모두 기한이 정해져 있다. '로에베 재단 공예상' 전시는 7월 31일까지, '공예, 시간과 경계를 넘다(2부)' 전시는 8월 15일까지, '이 땅의 풀로 엮는 초경공예' 전시는 8월 28일까지. 박물관을 찾지 않은 이들이라면 전시도 볼 겸 새로운 박물관도 구경할 겸 발걸음하기를 강력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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