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은 2호선과 4호선이 만나는 사당역에 위치해 있다. 그 사실을 알고 조금 허탈했다. 서울에 살면서 사당역을 수십 번은 드나들었기 때문이다. 재작년 미국에 정착한 절친과 늘 만나던 장소가 사당역이었다. 만나면 수다에 젖어 사당 주변을 둘러볼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이곳에 미술관이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남서울미술관으로 가기 위해서는 2호선 사당역 6번 출구로 나서야 한다. 지상에 오르면 자작나무가 늘어선 자그마한 공원을 가장 먼저 만나게 된다. 노후화된 수경공원을 2019년 광장형 휴게공원으로 다시 꾸민 남현예술정원이다[관악구, 광장형 휴게공원 남현예술정원 개장 : 사회일반 : 사회 : 뉴스 : 서울& (seouland.com) 참조]. 공원을 지나면 우리은행이 나타나는데 그 곁에 바로 남서울미술관이 있다.
남서울미술관은 조금 특별한 미술관이다. 미술관 건물 자체가 신산한 이야기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남서울미술관은 1905년 벨기에영사관으로 지어진 건물이다(사적 제254호). 처음 있던 자리는 지금의 장소가 아니라 회현동이었다. 그런데 1977년 영사관 터를 포함하는 일대가 재개발 사업지구로 지정되면서 1979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이 확정되었고, 1982년 마침내 외관은 원 모습으로 복원하고 실내 공간은 건축가 김수근의 의견에 따라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미술관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2004년으로, 1968년 영사관을 불하받았던 한국상업은행(현 우리은행)이 서울시에 무상임대함으로써 가능해졌다.
건물이 지닌 이러한 역사적 가치 때문에 미술관에서는 옛 벨기에영사관의 역사와 건물 복원 과정을 관람객이 들여다볼 수 있도록 상설전시실을 따로 마련해 놓았다. 이 전시실에서는 고전주의 건축양식인 이오니아식 실내 기둥과 벽난로 등 기존 건축물을 만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복원 과정을 자료와 영상으로도 만날 수 있다. 역사적 사실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언제든 방문해 살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현재 남서울미술관에서는 <정거장>이라는 이름의 기획전이 한창이다(무료, 10월 3일까지). 전시 제목인 '정거장'은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의 역사를 환기하고 미래의 비엔날레를 준비하기 위해 잠깐 머무르는 시간이자 장소를 의미한다고 한다. 주최 측은 이번 전시에 대해 "소장자원과 함께 한국미술사에 있었던 미디어 실천과 실험을 다시 읽고 미디어아트에 관한 인식을 경험적 차원에서 살펴보고자 마련"하였다고 한다.
육중한 미술관 문을 열고 전시실에 들었다. 새하얀 공간과 클래식한 전등이 첫눈을 사로잡는다. 첫 전시실에서는 지금까지 열렸던 비엔날레의 출판물을 접할 수 있다. 또한 지금까지의 비엔날레 시청각 자료를 비디오와 콜라주로 재구성한 글림워커스의 작품 <SMB 리믹스>를 만날 수 있다.
이번 전시의 특이점은 다락 관람이다. 관람하기 전부터 다락이 어떻게 생겼을까 몹시 궁금해 인터넷으로 관람을 예약했다[현재는 고온다습한 기후 탓에 예약이 8월 15일까지 잠정 중단된 상태다. 전시 관람 예약 Reservation for the exhibition (google.com)]. 그래서 예약 시간에 맞춰 다락을 먼저 찾았다.
안내를 받아 예약 명부에 이름을 기입하고 너무 더워 안전모는 생략한 채 다락에 올랐다. 다락엔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지 않아 오르자마자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더위도 더위지만 조명도 최소한으로 설치해 컴컴했다. 기대했던 아기자기한 다락방이 아니라 오래된 구조물 그대로의 다락이 눈앞에 펼쳐졌다. 안전모가 왜 마련되어 있는지 알 것 같은 풍경이었다.
다락에서 만날 수 있는 작품은 홍철기의 <가벽>과 <둥근 규철의 안쪽>. <가벽>은 전시장에서 사용하고 버린 폐기물로 다락 공간의 벽면과 유사한 집 모양의 평면을 만들어 그 위에 영상을 투영한 작품이다. 영상은 실재하는 사당동 주변의 풍경과 새로운 벽이 생기기 전 모습을 교차로 보여주는데 이는 "미술 제도를 작가의 '집'으로 비유하며, 미술관의 가장 은밀한 공간에 '집'을 지어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시각과 지각, 실제와 가상, 영원함과 일시적인 것, 물질적인 미술과 물질적이지 않은 미술에 관한 질문과 사유를 이어"가고자 하는 의도라고 한다.
<둥근 규철의 안쪽>은 이번 전시에서 만날 수 있는 이규철의 구형 다면체 작품들과 닮았다. 그래서 작품명에 '규철'이라는 단어를 삽입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작가는 어둡고 외진 한구석에 구형 브라운관을 설치하고 창고, 휴게실, 보일러실과 같은 소외된 공간을 영상으로 보여준다.
무더운 날씨 탓에 관람시간 20분의 절반도 채우지 못하고 다락을 내려왔다. 그래도 <가벽>을 만난 것만으로도 다락을 오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락을 내려와 2층을 관람했다. 2층 전시실에서 가장 먼저 만난 작품은 이규철의 <공간과 시지각> 연작들. <공간과 시지각>은 "구형으로 지각되는 세계를 보는 그대로 재현하는 방식을 연구했던 이규철의 '사진-조각' 제목이면서 작업 개념어"라는데, 특히 경복궁을 찍은 <공간과 시지각 1988-3>은 움푹 들어간 반구형 육면체에 사진을 덧붙임으로써 사진의 평면성을 죽이고 입체감을 살렸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규철의 <공간과 시지각> 연작 시리즈와 함께 연구 기록과 전시 기록, 그리고 워크숍 기록도 만날 수 있다.
건물이 예스러워서인지 복도를 건널 때마다 바라다 보이는 전시실이 참 멋스러웠다. 그래서 전시실을 드나들 때마다 자연스럽게 복도며 다른 전시실을 쳐다보게 되었다.
이규철 작가와 더불어 시선을 끌었던 작가는 박현기라는 작가이다. 그의 작품은 일단 재미있다. 모니터에 물고기가 헤엄치는 모습을 틀어놓았는데 물고기만 비추다 보니 TV가 마치 어항처럼 보였다. 그래서인지 작품의 제목도 <무제(TV 어항)>이다. 이 작품은 1979년 7월에 개최된 대구현대미술제에 처음 소개되었다는데 일상에서 접하는 텔레비전과 이를 통해 정형화되는 사회의 일방향적 사고에 관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고 한다.
<물 기울기>라는 제목의 작품도 재미있었다. 마치 브라운관 자체가 커다란 수조인 듯 작가가 브라운관을 기울일 때마다 물의 표면도 기울어지는 영상을 찍은 사진이다. 이 작품은 1979년 제15회 <상파울루비엔날레>에 출품된 작품으로, 작가의 현재작을 궁금하게 하는 작품이었다. 그래서 작가를 검색했다. 그런데 저런! 2000년에 작고하셨다. 1942년생이니 쉰여든 나이에 돌아가신 셈이다. 한창나이인데 안타까운 일이다.
미디어아트 전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을 꼽으라면 누구나 백남준을 첫손에 꼽을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도 그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전시된 작품은 <시장>. 이 작품은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의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이라고 한다. 2000년 첫 비엔날레에 출품된 작품이기도 하거니와 서구 현대미술의 중요한 작가들이 한자리에 모인 특별한 순간에 한국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던 작가의 의도가 잘 드러나는 작품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작품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작품은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는데 아마도 시장이라는 장소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개인적인 취향 탓이 아닐까 싶었다.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실제 시장만큼이나 갖가지 구경거리가 즐비하다. 시장을 즐겨 찾는 이들에게는 나름대로 재미있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1층에서 눈길을 끌었던 작품은 단연 홍순철의 <도시폭포>이다. 이 작품에 시선이 꽂힌 이유는 뒤샹의 <샘>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이미 소변기에 '샘'이라 명명한 작품이 있는데 변기에 '폭포'라는 이름을 붙이다니 발상이 좀 안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변기 뒤에 세워놓은 모니터에 비친 폭포와 물이 내려가는 소리가 변기의 그것과 흡사하기는 하지만.
이승택의 작품 <녹색 운동>도 눈길을 끌었다. 산줄기를 따라 흘러내린 강렬한 색채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 작품은 작가가 퍼포먼스, 대형 설치, 사진으로 작업의 영역을 확장하던 1980년대에 발표한 작품이라고 한다. 이승택은 한국의 전위 미술과 실험 미술의 선구자라는데 자료를 찾아보니 91세 현역 작가이다. 현재는 '묶기' 연작[실험예술 1세대 이승택…“내가 노끈으로 백자를 묶은 까닭은” - e대한경제 (dnews.co.kr) 참조]에 천착하고 있다고 하니 전시회가 열린다면 한 번쯤 찾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번 전시에서 만날 수 있는 작품은 모두 39점이다. 이 중 2점은 토요일에 워크숍 형태로도 운영된다. 안데스의 <지질학적 테크노: 땅의 비트를 들어라>와 전유진의 <코트 밀 키트>가 그것인데, 전자는 '지진파'를 '음파'로 전환하여 직접 갈 수 없는 장소를 사운드로 경험하고 상상하는 새로운 테크노음악 제작에 관한 프로그램이고, 후자는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 '코드'로 상징되는 현대 기술 문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사회적인 해석을 도모하는 프로그램이라고 한다. 워크숍에 관심 있는 이들은 미리 프로그램을 살펴 신청하기를 권한다[7월 23일~8월 27일: 지질학적테크노 (geotechno.xyz), 7월 23일~10월 2일: CODE MEAL K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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