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도 멘도: 판타스틱 시티 라이프" 관람기
미술관을 방문하고 만족스러울 때는 작품이 마음에 들거나 장소가 마음에 들거나 공간이 마음에 들 때이다. 이번에 방문한 미술관은 셋 다였다.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그라운드시소.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에서 도보로 5분 거리. 알고리즘이 보내오는 얼리버드 티켓(50% 할인 가격으로 선구매하는 티켓)을 훑어보다 눈길이 멈춘 이유였다. 막내에게는 물어보지도 않고 구매를 마쳤다. 관람 날짜가 정해진 것이 아니어서 막내의 일정에 맞추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막내가 귀국한 지 29일째 되는 날, 서촌에 있는 그라운드시소로 향했다[그라운드시소는 서촌, 명동, 성수 세 곳에 있다(Visit — 그라운드시소 (groundseesaw.co.kr) 참조)]. 도착하고 보니 미술관이 자리한 곳은 서촌의 시작점에 해당하는 통의동 백송터 앞이다.
건물 외부에 자리한 연못이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았다. 중정이었다. 수면의 높이가 지면과 같아 가벼운 바람에도 연못의 물결이 일렁였다. 아름다웠다. 4층까지 뚫린 중정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며 잠시 바람을 맞았다. 햇살에 데워진 몸의 열기가 금세 날아갔다.
미술관 외벽은 얇고 길쭉한 베이지색 벽돌이 물결치듯 감싸고 있었다. 세련된 외관이 전시장을 기대하게 했다[집에 돌아와 자료를 찾아보니 그라운드시소를 건축한 곳은 건축사 사무소 SoA였다. 이름이 익숙하다 했더니 '젊은 건축가 프로그램 2015'에서 만난 '지붕 감각'이라는 작품을 제작한 곳이다(건축사사무소에스오에이(SoA) — OPENHOUSE SEOUL (ohseoul.org) 참조].
현재 그라운드시소 서촌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는 "문도 멘도: 판타스틱 시티 라이프". 스페인에서 태어나 20여 년간 유럽 대도시에서 아트 디렉터로 활동하다가 현재는 도쿄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루이스 멘도'라는 작가의 전시회이다. 전시장은 2~4층. 1층에는 매표소와 아트숍이 자리하고 있다.
기대대로 전시장은 각 층마다 제각기 다른 매력을 선사했다. 2층은 그림을 벽면이 아니라 전시대를 세워 주제별로 묶어 놓았고, 3층은 둥근 창과 가벽을 활용해 전시했으며, 4층은 높은 천장의 개방감을 만끽할 수 있도록 전시 작품의 수를 최소화했다.
2층에서는 작가 소개 영상과 자화상, 단칸짜리 작업실에서 탄생했다는 방대한 양의 습작품들과 메모를 만날 수 있었다. 익살스럽고 유쾌한 그림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 외에도 아이패드와 관련한 이야기들을 접할 수 있었는데, 디지털이 주는 자유로움 때문에 "다시 스케치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작가의 고백이 흥미로웠다.
3층에서는 네덜란드 잡지에 기고한 스카이라인 삽화들과 일본에서의 낮과 밤을 소재로 한 그림들을 만날 수 있었다. 4층에서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와 작가의 일상을 접했다.
작은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는 작가는 도쿄에 정착하며 많은 변화를 겪은 듯 보였다(아내가 일본인이다). 일본에 대한 애정과 심상의 변화를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도쿄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이 도시가 내게는 엄청난 아이디어 뱅크가 될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구석구석 그림 그리고 싶은 것들로 가득 차 있지. 나는 내 인생을 하나의 크고 두꺼운 빈 스케치북처럼 생각하기로 했다. 영감이 필요할 때면, 눈을 크게 뜨고 잠시 산책을 한다. 정말 활짝 뜨고! 폴 스미스가 말했던가? 영감은 어디에나 있으니, 잘 모르겠다면 충분히 살펴보지 않았다는 것."(만화 작품 <멘도의 세계> 중에서)
팸플릿에서 루이스 멘도의 그림을 지칭하는 대표적인 수식어가 '디지털 아날로그'라고 했는데 전시를 보니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아이패드로만 그렸다는 그림들이 꼭 종이에 그린 듯한 느낌을 자아냈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에 정착 후 그린 그림들은 그 느낌이 더 진했다.
이번 전시에서 눈길을 끌었던 것은 그림과 함께 자리한 작가의 다양한 글이었다. 아마도 만화를 그렸던 이력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따스하고 감성이 충만한 작가의 글은 그를 에세이스트라고 칭하기에 족했다.
"매년 생일마다 그리는 자화상. SNS를 통해 공개한다. 조금씩 나이가 들어가는 나 자신을 축하하는 방법이다. 이 작업을 할 때마다 지난 1년을 되돌아보게 되는데,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나체였다는 결론에 이르른다. 옷을 사고, 입지만 사실 남는 건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항상 취약하면서도 무방비의 상태로 세상이 우리에게 던지는 모든 것에 노출되곤 하니까."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서일까? 도쿄처럼 끝없는 대도시의 세계를 꿈꿔왔다. 오히려 도시에서 태어났다면 아마도 지금 꽃을 그리고 있었겠지? 도쿄는 깨끗하고 질서정연하다. 사람 역시 그렇다. 어딜 가도 친절하다. 일본 문화는 여러 층위가 존재한다. 일본 예술가들이 원근법을 그리는 방식에 놀란 적이 있다. 현실을 모방하기보다는 위계를 중시하지. 문자를 쓸 때도 그렇다. 모양보다는 획을 긋는 순서가 중요하다. 언어를 잘 몰라도 작동 방식을 알면, 일본 사람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 뿌리가 희미해지는 건 아니다. 난 스페인의 작은 마을에서 온 평범한 아이였다. 이런 배경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게 아닌가. 도시를 거닐며 정처 없이 길을 헤매곤 한다. 그리고, 일부러 잘 모르는 곳에 가 새로운 길을 탐험하며 동네를 둘러본다. 빵을 사기도 하고, 공연을 보기도 하면서... 사소한 것도 눈여겨보자. 어떤 것들은 꼭 그림이 되어, 좋은 추억으로 남는다."
탐색을 즐기는 화가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롭다. 루이스 멘도 역시 그런 화가 중 한 명이었다. 탐색이 읽히는 전시는 매력적이다.
미술관을 나와 관람객에게 음료를 10% 할인해 준다는 미술관 옆 카페(어라운드 시소)에서 시원한 커피를 마시며 막내와 관람 후기를 나눴다. 희한하게도 각자 찍은 사진이 한 장도 겹치지 않았다. 덕분에 루이스 멘도의 그림을 다시금 살펴보게 되었다. 막내에게도 내게도 더없이 흡족한 전시 관람이었다.
전시는 12월 3일까지. 매월 첫 번째 월요일 휴무(입장 마감 오후 6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