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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지윤서 Jun 07. 2023

광화문역과 경복궁역 옆 '성곡미술관'

"그 너머_원계홍 탄생 100주년 기념전" - 이미 끝난 전시 관람기

호퍼의 전시를 보고 꼭 보고 싶은 전시가 있었다. 바로 "그 너머_원계홍 탄생 100주년 기념전". 뉴스에서 원계홍의 그림을 접하고는 깜짝 놀랐다. 호퍼의 그림과 너무 닮아서였다. '한국의 호퍼'라 해도 하나 이상할 것 같지 않았다. 우리나라에도 호퍼 같은 그림을 그린 이가 있다니! 난 줄 알았던 전시가 2주 연장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고는 부랴부랴 성곡미술관을 찾았다. 


성곡미술관은 3호선 경복궁역 7번 출구나 5호선 광화문역 1번 출구에서 나와 6백 미터를 걸어가야 한다. 지하철역에서 가까운 거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멀다고 하기에도 애매한 거리다. 나는 이곳을 주로 광화문역을 이용해 찾는다. 광화문광장과 서울역사박물관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계절도 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는 여름이나 칼바람이 부는 겨울보다는 포근한 봄이나 단풍이 아름다운 가을을 택한다. 주변에 경희궁과 서울역사박물관이 있어 관람 후 이곳의 아름다운 풍경을 만끽하면 그야말로 횡재 맞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계홍 전시를 찾았을 때는 한여름. 어쩔 수 없이 땡볕 속을 걸어야 했다. 


오후 3시쯤 찾은 미술관에는 사람이 꽤 많았다. 커다란 마로니에 나무 두 그루 사이로 표를 사려는 사람이 구불구불 줄을 서 있었다. 평소라면 발걸음을 돌렸을 테지만 이번에는 기꺼이 줄을 서서 티켓을 구매했다. 햇살이 따가웠지만 새파란 하늘과 하얗게 피어오른 뭉게구름을 구경하느라 기다리는 동안 지루함은 덜했다.


성곡미술관을 처음 방문한 것은 2009년이었다. 그림책 작가 데이비드 위즈너의 전시[세계적 그림책 작가 위즈너 “그림책 목적은 독자의 상상력 확장”  - 경향신문 (khan.co.kr) 참]를 관람하기 위해서였는데 당시 예상치 못했던 미술관의 모습에 놀랐던 기억이 생생하다. 전시도 전시지만 미술관 야외를 돌아다니며 조각상을 구경하고 카페에서 음료를 마시며 재잘대던 아이들의 모습은 성곡미술관을 인상 깊게 만들기에 충분한 요소였다. 


10여 년이 지나 다시 찾은 미술관은 여전했다. 쇠락했다면 야외 뜰에 있던 카페가 문을 닫고 조각상들도 세월의 더께를 입었다는 정도라고나 할까. 그래도 카페에 있던 벤치는 남아 있어서 그늘막 아래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을 보니 그때의 일이 어제인 듯 다가왔다. 



성곡미술관은 쌍용그룹을 창업한 김성곤 회장의 자택을 미술관으로 개조한 곳이다. 김성곤의 호 '성곡'을 미술관 이름에 사용한 것도 그래서이다. 처음 문을 연 것은 1995년. 이후 '한국중견작가초대전'을 기획하고 '성곡내일의 작가'상을 이어오며 한국미술 발전에 힘을 보태고 있다고 한다[Museum Introduction – Sungkok Art Museum (sungkokmuseum.org) 참].


지인과 함께 표를 받아 전시장으로 향했다. 원계홍 전시는 1관에서 열리고 있었다(성곡미술관의 전시관은 모두 3개다). 제1, 제2, 제3 전시실에서 은지화 3점을 포함한 유화 그림 100여 점과 작가노트, 작가의 사진, 아카이브 자료들이 관람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림의 크기도 작고 별다른 효과 장치도 없어서 전시실의 전체적인 인상은 아담하고 소박했다.  


제1 전시실에는 작가노트가 전시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호퍼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을까 싶어 작가노트를 읽었지만 어디에도 호퍼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다. 대신 세잔, 몬드리안, 보링거의 이름이 여기저기에서 엿보였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정물화는 '정확한 소묘'를 무시한 세잔의 정물화를 닮았다.



그의 작업노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적혀 있다. 


"균형이 잡혀 있고 색채가 조화되어 있으면 작품으로서는 충분하다. 주제 같은 것은 필수한 것은 아니었다. 회화는 말하자면 그 자체가 주제이매 아름다운 것에 영원한 기쁨이었다."


주제보다는 그림의 균형과 색채의 조화를 중시한 작가. 그런데 정물화와 인물화에서는 작가가 염원한 그런 아름다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떤 그림은 조악하고 어떤 그림은 거칠게 느껴졌다. 그가 말한 균형이 잡히고 색채가 조화를 이뤄 기쁨을 주는 작품 대부분은 강북의 골목 풍경을 그린 작품들이었다. 투박하지만 정겹고 단순하지만 친근한 그림들은 호퍼의 작품과는 또 다른 맛을 느끼게 했다.



원계홍은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지만 정작 앙리 마티스의 제자였던 일본 미술가 이노쿠마 겐이치로에게서 사설로 그림을 배우는 데 더 열심이었다고 한다[[이은주의 아트&디자인] 에드워드 호퍼보다 원계홍, 이유 있는 인기 | 중앙일보 (joongang.co.kr) 참].  


그런 그가 화가로 데뷔한 나이는 55세. 2년 뒤 심장마비로 돌연 세상을 등지기까지 화가로서 얻은 이력이라고는 두 번의 전시와 "중앙미술대전"에 작품을 출품한 이력이 전부였다. '요절'이라는 단어를 붙여도 하나 이상할 것 같지 않은 여정이었다. 골목 풍경 연작들을 보고 있자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연작 중 가장 마음을 끈 작품은 <성북동 풍경(산동네)>이었다. 마치 호퍼의 그림 <바다 옆 방>처럼 얼핏 보이는 좁은 골목길과 반쯤 열린 붉은색 문이 시선을 끌었다.



그의 이야기를 좇다 보니 그가 왜 55세 늦은 나이에야 첫 개인전을 열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는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완성하기 전까지는 남들에게 작품을 보이기를 거부했던 완벽주의자였다. 한 번은 그렸던 모든 작품을 불태워버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의 그림이 세상에 얼굴을 내밀게 된 사연도 극적이다. 부암동에 집을 보러 갔다가 집에 걸린 그림에 반해 그림을 갖기 위해 집을 샀다는 이야기. 그의 그림을 발굴해 내 지금의 전시에까지 이르게 한 이들의 이야기가 대단해 보인다(“그림 정말 좋다” 망각의 늪에서 건져낸 괴짜 화가 원계홍 (naver.com) 참).


85세까지 장수했을 뿐만 아니라 아내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오랫동안 그림을 그렸던 호퍼를 떠올리니 부친의 극심한 반대로 마음 편히 예술의 세계에 천착할 수 없었던 원계홍 화백의 삶이 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그를 비운의 화가라고 할 수만은 없겠다.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리는 전시회가 이리도 성대히 막을 내렸으니 말이다. 아마도 원계홍은 이번 전시를 통해 한국의 '골목 풍경'을 그린 연작 작가로 한국미술사에 당당히 기록될 것이다.



https://naver.me/583vw3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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