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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지윤서 Jan 06. 2024

마곡역 옆 '스페이스 K 서울'

2023년 마지막 미술관 나들이

2023년 막바지. 한 해를 마무리하는 장소로 미술관 '스페이스 K 서울'을 택했다. 막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지난해 여름 마티스 특별전을 관람하고 나오며 다음에는 스페이스 K에 가자고 막내와 약속했다. 그랬는데 주중에는 내가, 주말에는 막내가 도통 짬이 나지 않아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주중에 시간을 내지 못한 것은 새로 받은 사전 작업 때문이었다. 시간이 빠듯할 줄 알면서도 덜컥 일을 맡았다. 사전 작업은 처음이라 구미가 당겨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일은 재미있었지만 주중의 시간을 몽땅 저당 잡히고 말았다. 낮에는 사전 형식에 맞도록 용어의 정의를 다듬고, 밤에는 표준서를 교정하다 보니 어느새 겨울이었다. 선선하고 풍경 좋은 가을에 다녀오려던 미술관 나들이 계획은 결국 한해의 끄트머리에 이르러서야 겨우 지킬 수 있게 되었다. 


막내와 함께 이곳에 오고 싶었던 이유는 건물의 독특한 모양새 때문이었다. 우연히 접한 건축 영상에서 본 '스페이스 K'는 아름다웠다. 


https://youtu.be/V3GJCYABam0?si=s9crbuBfauWakZms


5호선 마곡역에서 가까운 점도 미술관 선택에 한몫했다. 마곡역 3번 출구에서 485미터. 천천히 걸어도 10분 남짓한 거리. 추운 날씨여도 상쾌함을 느끼기에 손색없는 거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관은 영상으로 볼 때보다는 크기가 아담했다. 개방감도 덜했다. 영상과 달리 주변으로 건물이 빼곡해서 그런 듯했다. 하지만 아치형의 외관만은 인상 깊은 모습 그대로였다. 


이곳을 설계한 건축가는 조민석. 알고 보니 제주에 있는 카카오 본사 '스페이스닷원'을 설계한 건축가이다[조민석 - 나무위키 (namu.wiki) 참조].

     

마침 <여행>이라는 제목의 전시가 열리고 있어 관람에 나섰다. 여행을 하며 접한 다양한 경험과 풍경을 몸은 사람, 머리는 나무인 '반인반목'의 인물을 통해 선보이는 전시였다. 작가는 유이치 히라코. 일본인이다. 미술관에서 접한 작가 인터뷰 영상을 보니 작가에게는 이번 전시가 첫 해외 전시였다. 


전시는 설치한 가벽과 공간 활용이 세련되지 않아 그다지 인상 깊지 않았다. 8천 원이라는 관람료에 비해 너무 무성의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상상력이 빈약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나마 2층에서 상영되고 있는 작가 인터뷰가 아니었더라면 관람은 너무 허무했을 듯하다.


이토록 무성의한 전시를 할 거면 '스페이스 K 서울'에서는 왜 이 작가를 선택한 걸까. 궁금증이 일었다. 자료를 찾아보고는 아무래도 코오롱 산하 남성복 브랜드 '커스텀멜로우'와의 협업을 염두에 두고 마련한 곁다리 전시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스페이스 K 서울'은 코오롱에서 설립한 미술관이다). 연말 시즌을 맞아 의류, 액세서리 등 11개 컬래버레이션 제품이 선보였다는데 반인박목, 일명 '트리맨'이라 불리는 캐릭터가 지닌 다채로운 색감을 접하니 고개가 끄덕여졌다[어패럴뉴스 - '커스텀멜로우', 작가 유이치 히라코와 협업 진행 (apparelnews.co.kr) 참조]. 



그림은 전체적으로 무질서하고 유치해 보였다. 그렇게 느꼈던 해답을 인터뷰 영상에서 만날 수 있었다. 나 역시 작가의 친구와 같은 자연관을 지녔기 때문.


작가는 공원을 함께 산책하던 친구가 내뱉은 탄성 "자연은 정말 좋구나"라는 말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자연이 어떤 형태인지를 알아챘다고 한다. 말하자면 작가가 선호하는 자연은 친구가 좋다고 말한, 인간이 다듬어낸 보기 좋고 쾌적한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 손대지 않은 자연, 인간조차 자연의 일부로 녹아든 형태의 자연이었던 것이다. 작가는 자연이 인간의 필요에 의해 개발되고 번식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개성대로 혼재하며 살아가는 유기적인 결합의 형태를 원했다. 그러니 어찌 보면 반인반목의 탄생은 지극히 당연한 수순으로 보인다. 


이번 전시를 보며 작가에게 캐릭터가 얼마나 중요한지 또 한 번 느꼈다. 앞으로 유이치 히라코라는 작가를 떠올릴 때면 '반인반목'이 자연스럽게 떠오를 듯하다.


왼쪽은 <Green Master>, 오른쪽은 <Wooden Wood 49>. 이번 전시에서는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추구하며 탄생시킨 혼종의 캐릭터를 거대한 화폭으로 만날 수 있다.


전시 관람을 마치고 야외 정원을 둘러보았다. 썰렁했다. 개관한 지 3년밖에 되지 않아서인지 나무는 왜소하고 잔디도 추위에 누렇게 숨을 죽이고 있었다. 건물을 한 바퀴 빙 돌아 야외 옥상으로 올랐다. 내부에서 옥상으로 나갈 수 있는 통로가 있었지만 막아 놓아서 1층으로 나와 올랐다. 



옥상에는 한쪽에는 누런 억새가, 한쪽에는 계단이 자리 잡고 있었다. 1층에서는 맛볼 수 없었던 개방감을 이곳에서 맛보았다. 주변으로 빌딩이 빼곡했지만 산업단지로 변한 마곡의 변화를 한눈에 볼 수 있어 그 또한 나쁘지 않았다. 폭이 넓은 계단에는 시커멓고 둔탁하게 생긴 바위가 하나 놓여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바위가 아니라 조각품이었다.  



작품의 제목은 <우리의 긴 점선(또는 37년 전)>. 단순한 돌덩이인 줄 알았던 물체에서 제목을 읽어내자 묘한 감흥이 일었다. 집에 돌아와 작품에 대한 자료를 찾았다. 


<우리의 긴 점선(또는 37년 전)>은 영국의 개념 미술가 라이언 갠더(Ryan Gander)가 2021년 이곳에서 열린 개인전 '변화율(The Rates of Change)'에서 선보였던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작가의 아버지가 은퇴 기념으로 회사에서 받은 롤렉스 시계와 집 근처에서 발견한 자갈을 모티브로 했다는데 자신의 시간을 돈으로 교환한 아버지가 이제는 자본주의적 체제에 의해 시간을 되돌려 받게 되었음을 이야기한 작품이라고 한다[공감언론 뉴시스통신사 :: (newsis.com) 참조]. 


개인전 당시 인터뷰에서 작가는 이 작품을 만들 시기에 시간을 정의하는 여러 방식의 자료를 읽고 있었다고 한다. 그중 작가는 크로노스(시계로 측량하는 시간)와 카이로스(적절한 타이밍에 어떤 행위를 수행하는 시간)에 대해 언급했는데, 인터뷰를 보고 나니 작가는 카이로스를 상징하는 자갈에 크로노스를 상징하는 손목시계를 감아 놓음으로써 현대인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카이로스의 시간(혹은 열망)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https://youtu.be/8YtI0bmrf20?si=rppDbPZQihWICnUu


라이언 갠더의 아버지처럼 남편과 나는 여전히 시간을 돈으로 교환 중이다. 때때로 이러한 교환 행위가 언제 끝날까 싶어 아득해지기도 하지만 그나마 하고 싶은 일에 시간을 팔고 어 위안을 느낀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사실을 새해에도 여전히 상기한다. 지금까지 질긴 자본의 유혹에 용케 휘둘리지 않고 살아온 것은 그 사실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새해에도 휘둘리지 않고 잘 살았으면 좋겠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지난해만큼. 그 정도면 족하다.


https://naver.me/59i9onz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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