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이 품은 '쉼'의 땅
연고도 없고 잘 알려진 역사유적도 없고 유명한 빵집도 없고(당시만해도) 집이랑 가깝지도 않지만 지리산이 품고있는 이 남쪽의 시골 땅에 간 적이 딱 두 번 있었다. 그 때 구례에 간 이유는 첫 번째로 지리산 둘레길을 걸을 지역을 선택할 때 아무 것도 모르는 미지의 도시어서, 두 번째는 지리산 속에 있는 절을 선택할 때 피아골 골짜기에 생소한 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구례에 간 두 가지 이유 모두 민족의 명산 ‘지리산’있는 동네이지만 ‘잘 모르는 곳이어서’였다. 지리산에 올라가보고는 싶지만 너무 높아 쉽사리 오를 엄두는 안나고 근처에라도 가 노고단을 올려다 보면서 산의 기운이나 받고 오자는 속셈으로 갈 수 있는 곳이 구례이다.
지리산 둘레길의 기억
때는 바야흐로 21세, 대학생이 되어 처음으로 여름방학 내일로를 성공적으로 끝내고 국내여행에 대한 호기심과 도전정신으로 가득차기 시작했을 때였다. 여름방학이 얼마 남지않아 가장 뜨거울 때였던 8월에 기숙사에만 있기 갑갑해서 부산에 있던 고등학교 친구에게 지리산 둘레길에 가자고 꼬셨다. 제주 올레길의 대성공으로 전국적으로 걷기 코스 조성 바람이 불면서 지리산 둘레길도 조성을 시작한 후 코스가 완성되어 이제서야 관련된 책이 나오기 시작했던 때였다.
서울에도 북한산 둘레길이 생겨서 운동삼아 우이동까지 다녀오곤 했다. 북한산 정도야 당일에 다녀올 수 있는 산이지만, 지리산이나 설악산의 경우에는 정상까지 오르기가 쉽지 않다. 하루 종일 산을 타야하고 여러 행정구역에 걸쳐있는 거대한 산이라 종주하려면 산 속에서 숙박까지 감행해야 해서 쉽사리 마음먹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직 주변에서 이렇게 산을 타는 사람을 부모님 밖에는 보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체력이 이보다 더 떨어지기 전에 마음 맞는 사람을 찾아 꼭 올라보겠다 생각한다. 아니면 부모님 가시는 산악회 버스를 같이 타거나.
새로 조성했다는 지리산 둘레길 중에서 책도 열심히 읽어보고 공식 홈페이지도 참고하여 난이도를 신중하게 고려한 결과 깊은 산 골짜기를 걷는 구간은 제외하고 너른 평야 옆을 걷는 구례의 ‘오미 - 방광’ 구간을 선택했다. 산청이나 하동, 남원같은 경우는 살면서 들어 본 곳들이었지만 구례는 정말로 생소했기 때문에 낯선 지역에 대한 호기심이 컸다. 그리고 가는 곳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는 여행지의 경우 예상치 못한 순간을 마주할 확률이 더 높아진다. 게다가 여행의 필수요소인 먹고 자고에 대한 계획이 없다면 더더욱.
두 친구는 구례터미널에서 만나 버스를 타고 둘레길의 시작점인 오미마을로 향했다. 오미마을에서 유명한 고택인 운조루에 오니 그제서야 둘레길을 걸으러 왔다는 것이 실감났다. 그 때는 무슨 배짱이었는지 하루종일 길을 걷다보면 식당이 있을 것이고 종착지에 다다르면 우리를 재워줄 민박집이 하나라도 있겠지라는 생각으로 둘레길을 걸었다. 도시를 벗어나 시골길을 마음껏 걸을 수 있다는 것에 마냥 들떠있었다. 그러나 거대한 지리산을 옆에 두고 마을과 마을 사이에 평지 길이 이어지면서 가장 덥다는 8월 뙤약볕 아래로 그늘 없는 논둑을 걷는 것이 슬슬 힘들어졌다.
어느 마을을 뒤로 끼고 산길이 나왔다. ‘지리산 둘레길인데 이제 산길 정도는 나와줘야지’ 하며 산길을 하염없이 올랐는데, 오르막이 계속 이어지던 찰나에 운 좋게도 계곡을 만났다. 계곡에는 중년층의 친구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피서를 즐기고 있었는데, 인적이 드문 둘레길에서 많은 사람이 모여있는 곳을 보니 괜히 반가웠다. 그곳의 사람들도 젊은 여자 두 명이 산길을 헤메고 있으니 측은해 보였던듯, 같이 삼겹살을 먹자고 선뜻 옆자리를 내주었다. 우리는 점심도 못먹었는데 왠 떡이냐 싶어서 그 순간만큼은 낯가림이고 뭐고 없이 싹싹한 말투로 어른들의 대화에 끼여들었다. 그들은 구례에 사는 동년배 친구들인데 그 직업이 문인이나 작가, 예술가 등 다양했다. 이 신기한 만남이 점심을 굶을 위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해 준 것도 있지만 우리가 알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심도있는 대화를 들을 수 있게 해 줄 것이라고는 이 산을 오르기 전까지 상상도 못했다. 고기로 배를 든든히 채우고 우리가 가야할 길을 떠나기 위해 일어서야 했는데, 정말 우리가 안쓰러워 보였는지 그들의 패기넘치던 20대가 생각이 난건지 나중에 잘 곳이 애매하면 연락하라고 명함을 받았다.
우리는 다시 산을 올라 조성 초기라 그런지 방향이 애매한 표지판을 다시 돌려놓기도 하고, 내려가면서 유명하다는 화엄사 가는 길도 지나고 우리가 지리산에 있음을 상기시켜주는 지리산탐방안내소 앞의 반달곰 동상도 지나갔다. 둘레길에는 산길, 숲길, 마을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길이 맞나 싶은 자동차 도로도 있었다.
해가 저물어서야 종착지인 방광마을에 도착했는데, 지리산 둘레길이 조성된 지 2년이 갓 지났을 때에는 이렇다할 민박 시설이 마을마다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우리가 갔던 코스가 하필이면 가장 유명한 1~5코스도 아니고, 괜히 생소한 지역에 왔다가 막상 밤이 찾아오니 무계획의 밑천이 드러나던 참이었다. 지금까지 여행자에게 안전한 게스트하우스, 한옥 민박, 팜스테이 등의 숙박시설에서 하룻밤을 해결해왔는데, 어디 시내에 있는 모텔이라도 가야 하나 두려움이 엄습했다. 순수한 우리에게 모텔이라니, 모처럼의 여행에서 모텔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어디를 간다고 해도 이 시골마을에 해가 져버린 이 시간에 버스가 있을리 만무하니, 콜택시 번호도 모르는 우리에게 남은 것은 낮에 받은 그 연락처였다.
“안녕하세요, 저 아까 낮에 산에서 인사드렸던 그 대학생인데요.. 혹시 저희 재워주실 수 있으실까 해서요…”
“그럼 괜찮지~~ 지금 어디에요??”
“저희 방광 마을에 있는데요…”
“우리 읍내에 나와있는데, 여기로 올래요?? 그쪽으로 택시 보내줄게”
“네 감사합니다!!”
우리는 진짜로 마을까지 온 택시를 타고 읍내의 어딘가로 갔다. 지하에 있는 한 노래방이었다. 그 선생님들은 피서의 마무리로 노래방을 즐기고 계셨는데, 뭐 잠도 재워주는 마당에 체면이 어디있겠는가. 우리는 오늘 처음만나 삼겹살을 대접해주셨던 그 분들을 위해 헌정곡 체리필터의 달빛소년을 열창했다. 몸을 아주 신나게 흔들면서.
덕분에 용전 마을에 있는 한 작가님 댁에서 아늑하게 하룻밤을 보낼 수 있었다. 어젯밤에는 한 잔 하신데에 대한 호사였는지 아침이 되니 작가님이 좀 예민해지셔서 얼른 짐을 싸서 크게 인사를 드리고 나왔다. 그래도 그 마을의 서늘한 아침 공기는 가슴을 벅차게 했다. 거의 무전여행 수준으로 교통비만 지불한 이 지리산 둘레길 여행에 대해 아직도 어떻게 이 여행이 가능했는지 의문이 든다. 이 여행을 계기로 측은한 여행자에게 잠자리 하나 내어줄 수 있는 부자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