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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나미에 Oct 30. 2020

15. 평창

차갑고 시원한 바람이 부는 도시

  일을 시작하고 수도권을 제외한 지방 도시 중 가장 많이 간 곳으로 손에 꼽을 수 있는 곳이 바로 강원도 평창이다. 최근 올림픽 개최로 많은 사람들이 비로소 ‘평창’이라는 도시가 가진 진가를 체감한 듯한데, 내가 몸담고 있는 광고계에서는 꽤 오래전부터 국내에서는 어느 도시도 대체할 수 없는 평창만의 이미지를 가치 있게 여기고 있었다. 사실 이 일을 시작할 때, 이렇게 황태해장국과 오삼불고기를 쉽게 접하게 될 줄은 몰랐고, 머리 위에 하늘밖에 없는 해발 1000미터 목장에 입장료 대신 대관료를 내고 들어가 칼바람에 떨고 올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해마다 적어도 두 번 이상은 가게 되는 평창에 올해는 또 몇 번이나 가서 시원한 바람을 두드려 맞고 올는지 늘 기대가 된다.

대관령 삼양목장 (2016)


정동진역 (2011)

  내가 좋아했던 지리 시간에 배운 평창은 해발 700미터 지역에 위치해 있어 여름이 서늘해 고랭지 농업이 발달하는 아주 특수한 지역이라고 했다. 그래서 평창의 지리적 특성은 무조건 외울 수밖에 없었다. 지리학 전공은 포기했지만 한 번쯤은 가서 드넓은 초원과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인생 사진을 남겨보고 싶은 로망의 여행지였다. 그래서 한 때는 부푼 가슴을 안고 대관령 삼양목장에 가서 셔틀버스를 타고 동해 전망대까지 올라간 적도 있다. 

  그때가 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였는데, 여름의 평창 여행은 인생에서 강원도에 대한 기억이 처음 새겨진 여행이었다. 까맣게 있고 있다 이제야 기억났다. 무궁화호 밤기차를 타고 청량리에서 정동진까지 일출을 보러 갔던 여행 속의 평창행이었다. SRT를 타고 2시간 반 만에 수서에서 부산까지 가는 것이 익숙해진 지금은 6시간 동안 기차를 탄다는 것은 시간 낭비로밖에 여겨지지 않는 일이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그래도 행복했던 그 시절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여행지로의 평창은 털이 복실복실한 양들이 실제로는 그렇게 인형처럼 귀엽기만 하지 않다는 사실과, 거대한 풍차와 드넓은 초원 사진 속에는 어마어마한 강풍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 강원도에서만 먹어볼 수 있다는 감자 옹심이를 드디어 대관령 터미널 앞에서 맛보았다는 것으로 기억한다.


그해 여름 삼양목장 (2011)




목장의 기억


  평창에 가면 높은 산과 산등성이마다 우뚝 서있는 거대한 풍력발전기가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만큼 바람이 많이 불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며, 그곳에서 오랜 시간 있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해발 1,000미터의 드넓은 초원 위에 하늘이 겹쳐지는 배경을 가진 장소도 평창의 대관령만 한 곳이 없어, 주변에 아무것도 걸리지 않고 오로지 산길만을 달리는 자동차나 하늘을 배경으로 서있는 제품이나 사람이 필요하다면 꼭 이 곳에 오게 된다. 그리고 겨울에는 초원이 새하얀 눈으로 덮이기 때문에, 깨끗한 설원의 이미지도 찾을 수 있는 곳이다. 근래 드라마에서 가장 유명한 도깨비가 소멸하여 고통받는 지옥에서의 장면이 그 예시라고 할 수 있다.

대관령 하늘목장 (2016)

   나는 갈 때마다 추위로 고통받았다. 그리고 인생 최고의 추위를 해발 1,140m 삼양목장 동해 전망대에서 느껴보았다. 물론 계절마다 달리하며 눈을 뗄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도 선사받고 일하면서 이 곳에 서있을 수 있다는 것이 행복이라는 감정도 느껴보았지만 대관령의 겨울은 너무나도 길다. 그러나 촬영 스탭들은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설원 위의 거센 바람과 강추위를 견딘다. 입사 3개월 차에 멋모르고 따라간 강원도 촬영에서 3월 말임에도 불구하고 하늘 목장 위는 한겨울이라, 미처 보온에 신경 쓰지 못한 탓에 추위로 눈물만 줄줄 흘리고 왔던 기억은 잊을 수가 없다. 그 후로 올림픽 특수로 평창을 배경으로 한 광고들이 많아지면서 마음을 단단히 먹으며 중무장을 하고 12월의 삼양 목장 꼭대기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인생 최고의 추위를 경험했다. 도저히 서 있을 수 조차 없는 추위를 견뎌가며 촬영을 해야만 하는 우리의 일은 어찌 보면 극한직업이다. 반면에 여름에는 정말 시원해서 촬영지가 곧 피서지가 된다. 겨울이든 여름이든 대자연과 바로 맞닿아있다는 느낌을 단번에 느낄 수 있는 목장에서의 촬영은 항상 설렌다. 


대관령 삼양목장 (2017)



오대산 월정사 전나무 숲길 (2016)

오대산 월정사


  대관령에 가면 꼭 함께 다녀오는 곳이 있다. 대관령 IC에서 진부 IC로 나오면 금방 월정사 입구에 다다를 수 있다. 사찰의 가치는 차치하고 월정사 앞에 있는 숲길은 대체할 곳이 없는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숲길이다. 사람이 걸을 수 있는 아름다운 숲길은 많겠지만,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에 난 숲길이 이렇게 정갈한 곳은 몇 곳이 안된다. 특히 월정사의 전나무 숲길은 침엽수라 겨울에도 푸르름을 지니고 있어, 잎이 다 떨어져 휑해 보이는 겨울 풍경 속에서도 푸른 숲길을 달리는 자동차의 모습을 연출할 수 있다. 나 또한 이 길의 공간적 가치를 일을 하면서 알게 된 터라, 직접 걸을 수 있는 월정사 숲길도 좋을 테지만 그 옆에 난 차도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오대산이나 월정사의 방문객이 많아질 때는 촬영 허가를 받기가 어렵다는 사실이 안타깝기도 하지만, 언제나 다시 갈 기회가 오기를 바라고 있다. 지금 글을 고쳐 쓰고 있는 이 시점에서, 도로가 월정사의 사유지인 탓에 월정사에 내야 하는 촬영료가 터무니없이 올랐다. 이제 월정사 숲길을 달리는 자동차의 모습을 티비에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숲길 보전을 위해서인지, 단순한 사리사욕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럴 때는 항상 아쉬울 뿐이다. 



  올림픽을 거치며 평창의 이미지는 처음 갔을 때와는 많이 변했다. 대관령 시내 거리도 깔끔해지고 이곳저곳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는 것이 눈에 띈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후배의 친가 시골집이 횡계인데 오랫동안 살아왔던 집이 올림픽으로 인해 강제로 헐리고 그 자리가 주차장으로 변했다고 한다. 친척들의 따뜻한 정을 시골집에서 오래 느끼고 싶었지만 국가의 보상금을 받고 부랴부랴 근처의 아파트로 이사했다고 한다. 그렇게 오랜 세월 지켜온 삶의 터전을 국가 권력이 빼앗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당사자에게는 평생 그리워해야 할 아픔이 생긴 것이나 마찬가지다. 후배의 시골집은 민박을 운영하면서 한 투숙객이 집을 너무 마음에 들어하여 민박집 안에 카페까지 차릴 정도였다는데, 그 정취가 사라지니 시골집으로 향하던 설렘도 사라질 뿐이다. 그렇게 도시는 변해간다. 


대관령 삼양목장 (2016)

  그래도 여전히 공기는 맑고 풍차는 열심히 돌아간다. 도시가 개발되고 성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평창에서만 느낄 수 있었던 서늘한 겨울 도시라는 이미지는 그대로였으면 한다. 황태해장국과 오삼불고기의 맛도 변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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