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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나미에 Jan 01. 2021

20. 서울

겉보기에 매력적인 도시

  해외 도시에서 다시 국내로 돌아온 것은 이 도시에 대해 갖고 있는 여러 가지 감정들 때문에 무어라고 정의 내릴 수 있는 해답을 찾지 못해서이며, 아직도 나의 인생 서사가 진행되고 있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태어나서 서울에서만 살아본 친구가 물었다. 지방 사람들은 서울에 가고 싶어 하는지, 서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지방 사람으로서 그 물음에 대해 복잡한 생각이 들어 선뜻 대답해주지 못했다.  

  상경한 지 10년이 된 지금, 서울에 대한 처음의 기억과 가장 나중의 기억이 어떻게 달라져있는지 마지막으로 얘기해보고 싶었다.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인생사가 포함되어 있다. 지금까지의 도시들 중 가장 신선한 기억과 그리고 가장 밑에 깔려있는 추억에 관하여.



동경 

첫 해 봄 (2010)

  부산과 서울, 각각 한 학교에서 대학 합격 통지를 받았다. 부산의 대학을 가게 되면 학교로 매일 타고 가던 버스를 또 4년이나 더 타게 될 것이고, 고등학교 이름에서 달랑 몇 글자만 빠진 학교라니, 그만큼 인생이 크게 달라지지도 않을 것 같았다. 서울에 가게 되면, 두 배나 더 비싼 등록금과 자취에 필요한 생활비는 어떻게 감당할 것이며, 낯선 곳에서 혼자 살아갈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 3일이라는 고민의 시간 끝에 우리나라의 수도이자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 살아보기로 결심했다. 지난 10년 간 이곳 ‘서울’에서 인생의 풍파를 여러 번 겪고는 가끔 내 선택의 시간 3일에 대해 생각해보곤 한다. 그때 서울에 가지 않았더라면, 집 걱정, 밥 걱정 없이 편하게 대학교에 다니면서 좋아했던 학문을 배우고 정말 정말 운이 좋게 임용고시에 붙어 다시 모교로 출근했을까? 실제로 그런 선생님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내 선택에 대해 합리화를 하고 만다.


  자고로, 인간이 나면 서울로 가야 하는 것이 정설이니 나도 위대한 무엇이 될 것이라는 원대한 꿈을 안고 서울 땅에 발을 디뎠다. 내 인생의 반경을 벗어나 보니 새로운 풍경이 있었고 다양한 도시에서 온 새로운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그 속에서 촌뜨기에 불과했기 때문에 얼른 새로운 변화의 봄을 받아들여야 했고 만나는 사람들의 생각들을 흡수해서 내 것인 마냥 떠들어대야 했다. 버스를 한 번 타고나면 왜 항상 기본요금보다 훨씬 비싼 금액이 찍히는지, 참다 참다 궁금해서 티머니 콜센터에 전화를 걸었더니 하차할 때 교통카드를 찍지 않아 그런 거라고 대답해주었다. 서울이 너무 넓어서 거리마다 요금이 다르니 내릴 때 꼭 카드를 찍어야 한다고 했다. 부산은 안 찍어도 되는데. 


광화문광장, 명동성당 (2010)
국립 4.19 민주 묘지 (북한산 둘레길) (2011)


  서울에는 갈 데도 많았다. 학교를 떠나면 어디든 익히 들어본 낭만의 장소들이었다. 학교 앞을 지나는 지하철 1호선을 타면 금방 서울의 중심 종로에 닿을 수 있었고, 종각 젊음의 거리 한복판에서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청춘버스라고 불린다는 273 버스는 내가 가장 좋아하던 버스였다. 홍대에서 신촌을 지나 광화문 ~ 혜화동 ~ 고대 앞을 지나가는 버스는 오래 걸려도 정류장을 지나는 풍경도 좋았고 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도 재밌었다. 고등학생 때 늘 가보고 싶었던 광화문 교보문고를 가고 싶을 때 갈 수 있게 되면서도 학교 기숙사로 돌아가기 위해 더 빠른 지하철을 타지 않고 273번 버스를 탔다. 유명한 한류의 중심거리 명동까지도 한 번에 가는 261번 버스나, 북한산 우이동에서 바로 돌아올 수 있는 120번이 지나가는 것도 좋았다. 


외대앞역 (2010)

  

  수업이 없을 때나 휴일에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든 걸어서든 어디론가 가 보고 싶었던 건 내 주변에 새롭고 신기한 것들이 너무나도 많아서였다. 기숙사와 오히려 더 가까웠던 외대앞역에서 반대편 개찰구로 나가면 여기가 서울인가 싶을 정도로 정겨운 낮은 주택가 마을이 나오고 좀 더 운동삼아 걸어가 보면 학교 운동장의 트랙과는 차원이 다른 스케일의 중랑천이 짠하고 모습을 드러냈다. 이문동에서 석계역 방향으로 조금 더 걸어가 보면 유네스코 문화유산인 조선왕릉(의릉)까지 있다. 학교 주변만 해도 이렇게 가 볼 곳이 많은데, 서울 전체는 얼마나 넓은 세상인 걸까. 그렇게 갓 상경한 새내기를 거치면서 서울은 호기심을 충족하러 다니는 공간이 되었다.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낙산 성곽길이나 창신동에서 내려다본 서울 도심의 풍경이 좋아 혼자 그 배경을 찾으러 직접 가보고, 수업시간에 조선 최고의 궁궐이라 칭하던 창덕궁에도 혼자 가서 해설사의 이야기까지 듣고 오기도 했다. 거대도시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이 끊임없이 나를 자극했다. 


낙산 성곽길 (2010)


정착 定着


졸업식날 처음 가본 남산타워 (2015)

  스무 살에 만난 서울은 모든 것이 자유로웠지만 너무나도 급진적이었다. 대학시절 후반에 서울을 오랫동안 떠나 있던 것도 이러한 변화와 매번 새로 만나던 사람들에 지쳤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20년간 살아왔던 고향의 풍경이 더 그리워졌다. 건너편에 빌딩 숲이 보이는 한강보다는 수평선까지 푸른 바다가 이어져있는 해운대와 광안리 앞바다가 더 좋고, 일부러 멀리 찾아가야 하는 산보다는 항상 우리 집 뒤에 있었던 장산이 좋았다. 무엇보다 서울에는 내가 발 뻗고 누울 수 있는 내 집이 없었다. 늘 성적에 고심하며 기숙사 합격에 목메어 왔고 친척집, 하숙집, 고시원을 전전하는 주거 생활은 불안정했다. 취업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주거의 불안은 어떤 것에도 집중할 수 없게 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한 후 서울에서 살지 않기로 하고 졸업식날 짐을 싸서 부모님과 부산에 내려왔다.





응봉산 야경 (2015)


  다행히 졸업한 해를 넘기지 않고 취직을 했다. 그동안 배운 것, 해온 것들을 다 포기하고 오로지 하고 싶은 일, 재밌는 일만 바라보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다행히 내가 쓸 수 있었던 것은 처음 만난 사람들은 지방 사람인지 잘 모르는 나의 표준어 말투와 그렇게 돌아다니면서 익힌 서울의 지리였다. 이것은 운명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매일 사무실에 박혀있지 않고 일적으로 새로운 지역, 장소를 가보고 좋은 것을 보고 먹고 오기도 한다. TV에 나오는 장소를 궁금해하던 사람이 이제는 직접 그 공간을 찾아내고 만들어내는 일을 한다. 좋아하는 것이 잘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기도 하고 나만의 시간이 적고 몸까지 고되고 힘들지만 이 세상에 이렇게 재밌는 일이 있을까 싶다. 


크리스마스 명동 촬영 (2016), 아침해와 함께하는 퇴근길 (2020)


  서울에 정착해서 이 일을 하기 위해 8개월 동안 고시원에 살았고 2년 2개월을 좁은 원룸에서 2층 침대와 살았다. 처음은 회사 근처 건대에서, 두 번째는 중랑구 면목동에서 살다, 지금은 하남시민이 되었다. 전세 자금 대출을 위해 그동안 부산 해운대구였던 주민등록상 거주지가 하남시로 바뀌었다. 그렇다. 나는 서울에 살지 않는다. 서울의 비싼 집값 때문에 낮에는 서울로 출근하고 밤에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위성 도시로 퇴근하는 사람이 되었다. 다행히 중소기업 청년들에게는 착한 정부의 전세 대출 정책으로 신도시 오피스텔 대단지에 아주 조금 더 커진 방 하나 구해서 살고 있지만, 여전히 나는 주거 빈민이다. 신도시 집값 폭등으로 인해 곧 쫓겨날 날이 다가오고 있으니까. 이제는 어느 도시로 더 멀어져야 하나 걱정을 안고 산다. 


하남 미사 강변도시 (2019)


  연고가 없던 서울에 처음 올라왔을 때부터 괴롭히던 주거문제가 지금도 끝까지 따라다니고 있다. 아마 진짜 내 집을 마련할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이 문제는 비단 나뿐만이 아닌 지방러 노동자 혹은 독립한 직장인들의 가장 큰 고민일 것이다. 위성 도시는 집세는 저렴하지만 많은 것이 불편하다. 지하철역은 아직 공사 중이고 서울로 데려다주는 광역버스는 일반 버스요금의 두 배가 넘는다. 쉬는 날 서울 생활을 누리려고 하면 계산해야 할 것이 많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와 자차를 가져갈 경우의 이동 시간이나 비용, 나의 피로도 차이 등. 이런 것들이 비싼 집세와 바꾼 나의 기회비용이다. 그러나 그러한 기회비용과 바꿔서라도 서울의 비정상적으로 치솟은 집세를 낼 것인가 하면 내 답은 아직 물음표이다. 서울이 정말로 그 정도의 가치를 지닌 곳일까. 서울은 나에게 밥벌이를 해주도록 하는 도시이지만 나는 서울이 싫다.



애증 愛憎

첫 해 봄 (2010)

  따뜻한 남쪽나라 부산에서도 한 겨울이면 교복 안에 내복을 입고 다녔다. 그런데 새내기가 된 해 3월 개강을 하고 난 뒤에 눈이 내려 학교 전체가 새하얗게 변했다. 눈을 보기 힘든 남쪽 사람 눈에는 그저 신기한 풍경이었다. 그 해 12월에는 한파가 왔다고 하면서 영하 18도까지 내려간 적이 있었다. 왜 하필 그런 날 목이 짧은 양말을 신고 밖에 나갔는지, 발목이 끊어질 것 같은 고통의 시간이었다. 그때 서울은 살 만한 도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여름에도 해풍을 맞은 찐득한 더위가 아닌 숨이 턱 막히는 날카로운 더위에 역시 서울은 살 만한 도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미세먼지도 서울이 더 심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는 항상 남쪽으로 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기후가 인간의 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무시 못하는데, 서울이 과연 나의 생존에 적합한 도시일까 항상 의문이 든다.


  그래도 아직 일말의 낭만은 남아있다. 사무실 자리 창가에서 보이는 남산타워의 일몰은 여전히 황홀하고 매년 석촌호수의 벚꽃을 기대한다. 좋아하는 아이돌 콘서트도 갈 수 있다(티켓팅만 잘하면).  내가 발 뻗고 잘 수 없는 곳도 많지만 내가 발 딛고 서있을 수 있는 곳도 많다. 그래서 이 도시는 항상 물음표이다. 잘 모르겠다. 내가 좋아서 이곳에 살고 있는 건지, 벌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살고 있는 건지. 이따금씩 서울의 풍경들이 내 시선 바깥에서 낯설어지기도 한다. 그러고는 내가 진짜 이 도시 속에 있는가 반문하게 된다. 그건 언젠가 이 도시를 동경했던 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송정동의 하늘 (2019, 2020)


  그래서 내가 서울에 대해 내린 정의는 ‘서울은 겉보기에만 매력적인 도시’이다. 보이는 것은 많고 화려하지만, 살 수가 없다. 그래서 분명히 언젠가 이 도시를 떠나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언제가 될지는 다른 도시에서 내 꿈이 새로 생기고, 그것이 실현될 수 있을 때에 달려있지만, 대한민국에 살면서 서울을 경험해본 것은 큰 우물에 들어있었다는 것이고 인생에 그다지 나쁜 경험은 아니었을 것이다. 서울 사람이면 모르는 지방 사람이 느끼는 이질감을 완전히 버리고 이 곳에 살기에는 쉬운 일이 아니어서, 어쩔 수 없이 나고 자란 곳에 대한 그리움을 항상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다. 그래서 물음표는 언젠가 느낌표로 바뀌고 나는 이 도시를 떠날 것이다. 그게 단기적 일지 장기적 일지는 또 모를 일이지만.


창신동 (2017), 올림픽공원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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