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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깜냥깜냥 Jul 22. 2020

제사를 그만 지내기로 했다

written by 범쥬


큰집인 우리 집은 한 해도 빼놓지 않고 제사를 지냈다. 내 기억으로는 단 한 번도 빠짐없이 제사를 챙겼던 것 같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제사나 차례에 아무도 오지 않았는데, 심지어 아빠도 출장이 잦아서 엄마와 나 둘이서 제사를 지낸 적도 많다. 제사를 합치지도 않아서, 일 년에 예닐곱 번을 지냈다.


다들 알다시피 제사는 정말 번거롭다. 국과 밥부터 시작해서 생선 반찬과 고기 반찬, 밤, 대추, 과일 등등을 전부 준비해야 한다. 우리 집은 심지어 예전엔 깐 밤을 사지도 않아서, 그 딱딱한 밤 껍질을 아빠가 일일이 다 벗겼다. 여러가지 음식들을 상다리 부러져라 차리는데 정작 먹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하나하나 계란물 입혀서 부친 전과 나물류는 제사가 끝난 후 곧바로 밀폐용기에 넣어 냉장고로 들어갔다.


한동안 코빼기도 비추지 않던 친가 사람들은 내가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이 되어서야 명절에 우리 집에 오기 시작했다. 셋이 지냈을 때에는 일렬로 쭉 서서 절을 하고 인사를 했었는데, 식구라고는 하지만 처음 봐서 알지도 못하는 (생판 남 같은) 남자들이 대거 앞에 서서 절을 했다. 초등학교에도 들어가지 않은 꼬마 남자아이가 맨 앞에 서서 술을 받고 절을 했다. 그들은 마치 자신들이 이 가족 행사를 위한 모든 노동을 한 것처럼 굴었고, 여자들은 자연스럽게 뒤로 밀려났다. 나는 무리의 뒤에 서서 절을 하며 딴 생각을 했다. 이 상황은 도대체 뭘까. 


절을 하고, 잠깐 쉬어가는 시간 동안 남자들은 거실 쇼파에 모여 앉아 TV를 보며 시끄럽게 떠들거나 오래 전에 자신이 가졌'던' 것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았다. 여자들은 그동안 부엌에서 여러가지 음식을 좀 더 준비하거나 아이를 봤다. 나는 종이컵에 물을 받거나 쟁반에 국그릇을 옮겨 담으며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다소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나를 제외한 모두가 그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제사를 마친 후 음복을 위해 상을 옮기고, 과일류는 잠시 집어넣는 시간. 몇몇 남자들이 상을 들어 옮기고 과일이 담긴 접시를 들고 와 식탁에 올려두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들은 그 상에 가만히 둘러 앉아서 부엌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새로 데운 국과 밥을 가져다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도(?) 여자들이 밥을 따로 작은 상에서 먹는다던가 하는 말도 안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분명 그 상황이 어딘가 정말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지만, 동시에 '내가 너무 예민한가?'라는 생각을 했다. 원래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러웠고 아무도 토달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다음에는 과일과 커피를 냈는데, 접시에 예쁘게 담긴 것은 거실에 편안히 앉아 있는 사람들의 것이었다. 반대로 과일 껍질이 가득한 쟁반 위에 놓여진, 깎다 만 것은 오전 내내 부엌에서 일한 사람들의 몫이었다. 부엌에 앉아 다 깎아서 먹을 곳이 없어 보이는 배 심지를 집어드는 숙모와 엄마를 보면서 나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는 것을 넘어서 속이 상하기 시작했다.


스무살이 되고 대학에 들어가며 내가 느꼈던 부당함을 학문으로서 접했다.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내가 예민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엄마만 설득해서 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제사 거부 선언’의 짐을 엄마에게만 지울 수는 없었다. 


나는 그때부터 엄마에게 슬쩍 제사와 차례를 지내지 않기로 결정한 친구들의 어머니 이야기를 했다. 그는 ‘속이 시원하다’며 웃었다. 그런 뒤, ‘아빠의 입장도 생각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복장이 터질 것 같았다. 엄마가 답답했다는 것이 아니다. 남성들이 남의 집안 행사에 차출돼 일한 여성들의 입장을 헤아린 적이 어디 한 번이라도 있었나, 싶은 생각이 들어 가슴이 콱 막힌 것 같았다. 하지만 답답하다고 멈출 수는 없었다. 전통이라는 미명 아래 한 쪽의 노동만을 착취하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아빠에게 이야기를 꺼내놓을 타이밍을 재던 어느 날 웬일인지 그가 제사에 대한 이야길 먼저 꺼냈다. 알고 보니 엄마가 고민 끝에 ‘이제 차례나 제사는 그만 지낼 때도 되지 않았냐’고 물꼬를 텄고, 둘이서 말다툼을 했다는 거다. 말다툼을 했다니. 나는 이 상황을 일종의 신호탄으로 받아들여 내가 그동안 생각했던 것을 주절주절 꺼내놓았다. 남성들은 자신들이 충분히 ‘도와주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애당초 이것은 여성의 몫이 아닌 것이라고. 제사가 그렇게 중요한 남성들의 집안 일정이라면 어째서 남성들이 준비하지 않는 것이냐는 말을 순화해 이야기했다.


그렇게 말을 하고 나서, 웃기게도 우리는 당장 돌아오는 추석 차례 및 제사를 지내지 않기로 했다. 나는 이 소식을 엄마에게 전해 들으며 머리가 복잡해짐을 느꼈다. 여성을 착취하는 것을 그만하고 자신들의 손으로 상차림 및 자잘한 준비를 모두 하느니 제사를 없애 버린 이 상황이, 가정 내에서 그들이 여성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례를 지내지 않는다는 것을 들은 숙모가 엄마에게 전화를 해 ‘아버님도 이해하실 거예요’ 라 말했고, 엄마는 웃으며 전화를 끊고는 나에게 ‘그 사람들이 도대체 뭘 이해해 ‘준다는’ 거야?’라며 기막혀했다. 


추석 차례를 지내지 않고, 우리는 연이어 설날 차례도 없앴다. 물론 제사도 사라졌다. 여자들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부당한 노동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로 물러나 있어야 하는 장면은 이제 우리 집에서 볼 수 없다. 과일 껍데기가 쌓여 있는 쟁반에 대충 올려진 깎고 남은 과일을 먹고, 제삿상으로부터 가장 먼 자리에 서서 절을 하는 일도 이제는 없다.


우리 집안 남성들은 그들이 제사와 차례를 없애 ‘주었다’고 생각하는 눈치다. 굉장한 열린 마음을 가지고 기꺼이 우리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주었다’고 여기는 듯 하다. 웃기는 일이지만, 우선은 이쯤 해 두기로 한다.


올 추석에는 엄마와 무엇을 할지 생각해 보아야겠다.



____ 범쥬 its.me.bom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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