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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삼 Feb 21. 2024

좋은 관리자였다면 참 좋겠어요.




중간 관리자가 된 후 본격적인 책임감과 중압감이 나를 짓눌렀다. 현장만 관리하면 되었던 과거와 다르게 이젠 행정적 업무까지 하게 되면서 눈코 뜰 세 없이 바빠졌다. 특히나 '주 관리자와 부 관리자 3-3명' 시스템이 무너지고, '주 관리자 2 - 부 관리자 3- 하위 관리자 1명' 으로 바뀌면서 도저히 불가능할 거 같은 업무가 배정되었다.


일단 영화관에서 가장 중요한 매점 주 관리자로 있으면서(당시 위생 점검 이슈가 있었다) 스텝들의 인사와 스케줄을 관리해야 했다. 거의 2명의 주 관리자 업무를 맡는 건 굉장히 이례적이었다. 이전에도, 앞으로도 이런 일은 없었다.



그러길 몇 개월 다행히 기존 체재로 돌아갈 수 있었고 나는 플로어 주관리자가 되어 스텝들의 인사를 계속 담당하게 되었다. 오랫동안 인사를 담당하다보니 스텝들이 좀 더 재밌게 일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가진 능력을 활용해 보기로 했다.





1.

극장의 스텝들은 해당 포지션의 관리자에게 매월 평가를 받는다. 그 중 상위권을 선발하여 우수 스텝으로 시상하는데, 지금까진 봉투에 이름만 적어 상품을 전달하곤 했다(상품은 영화 관람권과 매점 이용권, 스텝 포인트를 지급한다).

상을 받아 좋긴 하지만 아무래도 밋밋한 시상이다 보니 스텝들의 마음에 크게 남을 거 같지 않아 주면서도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몇 달 고민하다 나는 교육실 벽 한 켠을 꾸미기 시작했다. 거창하지 않지만 그곳에 '이 달의 수상자' 섹션을 만들었다. 그리고 매월 우수 스텝의 사진을 찍어(컨셉을 항시 달리 했다. 어떤 달은 선글라스가 주제였고 어떤 달은 팝콘이 주제였다) 상장처럼 편집한 뒤 붙였다.

받는 사람도, 축하해주는 사람도 모두 즐거웠으면 하는 마음에 포토샵으로 간단히 수정했다. 또, 수상자들이 받는 봉투엔 직접 그림을 그리고 축하 메세지를 적었다. 보는 사람에 따라 낙서...라고 생각할 수 있었겠지만 대부분의 스텝들은 기억에 남는다며 좋아했다.

나도 한동안 놓고 있던 펜을 다시 드는 기회가 되어 즐거웠다.


기실 관리자가 처음 됐을 땐 신년 축전을 그려 배부하기도 했는데, 점점 일상과 가까운 사이가 되면서 그림과는 멀어져만 갔다.


못내 아쉬웠는데 이렇게라도 그려보니 나쁘지 않더라.

대부분 직장에서 본인 능력을 최대한 감추라고 하지만, 반복되는 일상 속에 개인적인 즐거움이기도 해서 일을 놓는 그 날까지 계속 그렸다.





2.

같은 출근 시간대의 스텝이 모두 모이면 관리자가 조회를 진행한다. 일반적으로 조회는 게시판에 업데이트 된 서비스나 부정 사례, 그 날의 이벤트나 이슈를 주지 시키고 마친다. 정보 전달이 제일 중요한 조회임에도 가끔 나는 변화를 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흰 눈이 내리진 않지만 예매율은 가득 쌓인 크리스마스의 극장. 대부분의 상영관이 매진이기에 특히나 더 힘든 날이다. 담담한 마음으로 출근하는데 문득, 오늘은 스텝들에게 다른 말을 해주고 싶었다.

업무적인 이야기 말고 전혀 다른 말을.


빨리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영상 하나를 분주히 찾았다.

그리고 아침 조회 때 노트북을 펼쳐 영상을 틀었다.

영화 <러브 액츄얼리>의 하이라이트,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 를 부르는 그 장면을 말이다.


조용한 조회실에 노래가 울려 퍼지고 스텝들은 화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드럼을 치는 어린 나이의 '토마스 생스터'가 마냥 귀엽고, 그 와중에 노래는 감미롭게 잘 부르고, 조용히 웃고 서로를 쳐다보고 생경한 조회에 모두의 표정이 풀어졌다. 영상이 끝나고 스텝들의 시선이 나에게 멈추는 순간, 나는 말했다.


"오늘 많이 힘들겠지만, 너희들도 오늘이 행복한 크리스마스가 되길 바라, 해산"




나는 스텝들의 기억 속에 이따금씩 생각나는 사람이고 싶었다. 좀 깐깐하긴 한데 속마음은 착한 사람으로.

지금은 아무도 연락되지 않아 내 생각나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혹 떠오른다면 좋은 쪽이었으면 좋겠다. 비가 와서 그런가 오늘은 살짝 그때가 그리워진다. 훌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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