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보다, 자식 걱정보다, 지금 이 순간이 더 절실했던 엄마의 이야기
엄마는 대장암 말기 환자다.
5년 전, 오랜만에 친정에 갔을 때였다.
엄마의 얼굴엔 핏기가 하나도 없었고, 몸무게도 10kg 이상 빠져 있었다.
불길한 예감에 급히 병원으로 모셨다.
검사 결과는 대장암 3기였다. 곧바로 수술을 해서 대장의 3분의 2를 절제했지만, 1년 뒤에는 간으로 전이되어 또다시 수술대에 오르셨다. 하지만 암은 멈추지 않았다. 폐까지 번지면서 수술 불가 판정을 받았고, 지금은 매달 항암 치료를 받고 계신다.
항암을 맞은 뒤 1~2주는 특히 힘들어 하신다. 그동안은 엄마와 함께 사는 오빠가 주로 병원에 동행했지만, 오빠가 몇 달간 해외로 나가면서 이제는 내가 엄마의 진료를 함께하고 있다.
오늘도 병원에서 CT를 찍고 나오는 길이었다.
항암 부작용 때문인지 엄마의 걸음이 평소보다 더 느렸다.
그런데 갑자기 내 손을 꼭 잡으며 말씀하셨다.
"집에 들러 사경책을 가지고 법화정사에 가자."
순간, 나는 고개를 돌려 엄마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피곤함보다 무언가 결심한 사람의 단단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엄마는 부처님께 사경한 법화경을 올려야 한다고 했다.
죽기 전에 법화경 108권을 모두 쓰겠다고, 부처님과 약속하셨다고 한다.
사경(寫經)은 불교의 경전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한 자 한 자 정성스럽게 써 내려가는 수행이다.
법화경 사경은 엄마에게 단순히 글씨를 쓰는 일이 아니라, 마음을 새기는 일이었다.
"사경을 하면 잡생각이 사라지고 마음이 편해져."
엄마는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래서 항암할 때를 제외하고는 꾸준히 사경을 이어오고 계신다.
나는 한편으로 놀랐다.
국민학교만 나오신 엄마의 글씨는 늘 삐뚤빼뚤 알아보기 어려웠는데, 지금의 사경 노트에는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정성이 묻어 있었다. 마치 글씨가 아니라 마음의 모양을 적어놓은 것 같았다.
이번에도 다 쓴 사경 노트를 부처님 전에 올리고, 새로운 사경 노트를 가져와야 한다고 하셨다.
가방 안에는 무려 14권의 공책이 들어 있었다. 들어보니 꽤 무거웠다.
"이걸 그동안 혼자 들고 다니셨다고요?"
나는 그 무거운 사경 노트를 어깨에 메고 걸었다. 그리고 그동안 이 무게를 혼자 감당하셨을 엄마를 생각하니, 괜스레 가슴이 먹먹해졌다.
법화정사에 도착하자, 엄마는 부처님 앞에 오랜 시간 절을 하고 두 손을 모았다.
그 모습이 마음속 깊은 염원을 담고 있는 듯했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어쩜 저렇게 간절한 기도를 하실까. 무엇을 그렇게 간절히 비시는 걸까.
암을 낫게 해달라고 하신걸까? 아니면 태국으로 떠난 말썽쟁이 오빠의 안위를 걱정하시는 걸까?
혹은, 돌아가신 아빠를 빨리 보게 해달라고 비시는 걸까’
궁금하기도 하고 애잔하기도 했다. 기도를 마친 엄마에게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엄마, 부처님께 무슨 기도를 올렸어? 마음을 다해 기도하던데"
엄마는 한참 숨을 고르시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후.. 그게..... 똥 좀 나오게 해달라고. 변비 때문에 죽겠어. 시원하게만 나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어."
"…...아….."
나는 웃음이 터졌지만 동시에 생각했다.
엄마야말로 진짜로 ‘지금 이 순간’을 사는 사람이다.
자신의 몸속 암을 부정하지도 않고, 사고만 치는 아들을 걱정하는 것도 아닌, 지금 이 순간의 불편함이 가장 절실한 사람. 그 순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단순함과 솔직함이 너무 멋졌다.
사경 노트를 다시 받아 들고, 집에 가는 길에 바로 옆 경동시장에 들러 고등어를 사기로 했다.
그런데 갑자기 엄마가 환하게 웃으셨다.
"신호가 왔다!"
하시더니 재빨리 화장실로 향하셨다.
오메, 신통해라. 부처님이 정말 엄마의 기도를 들어주셨구나.
그날, 환하게 웃는 엄마의 얼굴을 보며 나도 왜 이리 행복한지.
나는 화장실 앞에서 두손을 모으며 조용히 기도했다.
"부처님, 엄마와 함께할 시간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 시간을 소중하고 행복하게 살겠습니다."
그리고 철없다고 욕했던 오빠에게도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오빠 그동안 고생 많았어. 고마워. 오빠 없을 동안 내가 잘할께. 재미있게 놀다 와"
가족 사이에 세워졌던 벽이, 아이러니하게도 이 고약한 병 덕분에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다.
오늘도 그저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