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에 대한 나의 예민함에 대하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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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에서 이어집니다.
하지만 이런 나도 ‘술을 좋아해보려 노력’했던 시기가 있었다.
그 원인은 남자였으니, 어쩌면 저 말을 했던 꼰대들의 말이 일리가 있었다고 할 수 있으려나?
으으 정말 인정하고 싶지 않은데.
시작은 ‘외로움’ 및 ‘적막함’ 이었다. 24살에 사귀던 술을 좋아하던 남자친구와 술 때문이라는 표면상의 이유로 헤어진 후, 나는 25살에 반독립을 했다. 이전과 달리 잠을 잘 때 가족과 한 공간에 함께 있지 않고 혼자가 된다는 것에 적응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좀 심심했다. 외로웠고, 그 공간의 적막함을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혼자 있을 때 음악을 틀어 놓기 시작했고, 시트콤 프렌즈 정주행을 완료했으며, 자기 전 까지 유튜브를 보다 잠드는 날이 늘어갔다. 그러다 일이 너무 고된 어느 날이었던 것 같다. 딱히 놀자고 불러낼 동네 친구도 없었고, 그렇다고 직장 선배님들과 퇴근 후까지 시간을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처음으로 집 앞 편의점에서 맥주를 샀다. 이슬톡톡이었을거다 분명. 안주를 핑계삼아 닭강정이었는지, 과자였는지, 하여튼 무언가를 하나 사서 집으로 갔다. 씻고 로션을 바르고 머리를 위로 틀어 묶고, 안경을 쓴 채 안주거리를 전자렌지에 돌리고 맥주를 깠다. 컵에 얼음을 가득 넣고 그 위로 맥주를 부었다. 복숭아 향이 나는 게 그냥 음료수 같았다. 핸드폰으로 웃긴 영상을 하나 틀어 놓고 혼술을 했다. 영상이 웃겼고, 술은 달았다. 깔깔 웃으며 달아오르는 볼을 만져보고, ‘어머, 나 취했네.’라는 혼잣말을 내뱉고 나니, 재밌었다. 웃겼다. 집에서 마시니까 집에 어떻게 오지, 하는 걱정도, 다 씻은 상태로 마시니, 아, 가서 화장 지우고 자야 하는데, 라는 걱정도, 앞 자리에 앉은 사람도, 주변의 그 어떤 것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게 너무 좋았다.
그렇게 오늘 하루가 지친다 싶었을 때, 술을 혼자 한 2-3번쯤 마셨던 것 같다. 그래 봤자 한 캔을 다 비우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조금은 스트레스가 풀리는 듯한 느낌과, 적막함을 잊을 수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혼자서 술을 마시다 보니,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술자리에 대한 거부감도 보다 줄어들었다. 그래서 원래는 일 년에 다섯 번 정도 가졌던 술자리를 한 달에 한 번 정도로 늘릴 수 있었다. 내게는 정말 큰 도약이었다. 이렇게 수치화 해놓고 보니 정말 애송이 같아 웃기지만, ‘와, 나 요즘 술 진짜 많이 마신다.’라고 생각했었다지.
확실히 술을 마시다 보니 화려한(?) 에피소드들도 생기더라. 내 인생 올타임 레전드 썰로 회자될, 술 마시다 쓰러져서 향초에 머리카락 태운 썰도 획득했다. 처음으로 새벽 3시까지 남자랑 술도 마셔봤다. 그 때 도파민이 정말 온 몸을 휩쓸었던 것 같다. ‘와, 이게 되네.’ 싶었다. 술이 있으니까 연애 사업이 잘 풀리는구나, 라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결국 그 남자와는 3일만에 끝이 났고, 그 이후에 만나게 된 남자친구와는 썸을 탈 때, 혹은 연애 극 초기에만 술을 마시고, 술을 잘 마시지 않게 되었다. 특히 스트레스를 극심히 받던 시기에 텐동과 함께 맥주 두 모금을 마시고 완전 취해버린 탓이 컸다. 그 이후부터는 술을 마시면 근육통이 왔다. 그 다음 날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겠는 느낌이었다.
그 남자친구와도 헤어지고 몇 명의 썸남들을 거치며, 나는 점차 술을 마시지 않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에게 ‘술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막대한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임을 깨달았다. 나의 피곤함보다 이 사람과 갖는 시간의 멜랑꼴리함을 즐기고 싶은 마음이 커진다는 것이니까. 하지만 어떤 사람과 술을 마신다고 생각했을 때, 일단 ‘피곤함’이라는 단어가 연상이 된다면, 그 사람과는 아니었다. 그 장벽을 넘기가 어려웠다.
지금의 나는, 다시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술을 마시지 않는다.
술을 마시고 취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취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취한 사람들이 많은 공간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안전’이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다. 하지만 술을 마시면 사람들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을 핑계로 ‘안전하지 않은’ 수많은 상황들이 벌어진다는 점에서, 술은 안전에 위배되는 항목이다. 그래서 나는 술이 싫다.
하지만 저 ‘안전’이 보장되는 환경, 그리고 사람이라면 나도 술을 마신다.
나와 술을 마시는 이 사람이 안전한 사람이라면, 그리고 이 공간이 안전한 공간이라면.
그런 의미에서 나는 술에 예민한 사람이다.
우리나라는 지나치게 술에 관대하다고 생각한다. 술을 마셔서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면 형량이 낮춰지는 나라라니, 이게 진실이라는 것을 믿고 싶지 않을 정도다. 음주로 인한 사회적 손실, 사망, 피해 등이 높다는 사실은 이미 여러 지표를 통해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동색은 동색끼리 모인다고, 나는 술 혹은 술자리를 즐기는 사람과는 그다지 깊은 관계를 맺고 싶지 않다.
앞으로 또 내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지만, 술에 예민한 상태를 디폴트값으로 두는 삶.
내가, 그리고 나와 비슷한 모든 사람들이 잘 살아내길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