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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드뷔 Sep 11. 2024

아빠존의 눈물

3. 아내는 떠나고 덩그러니


10년간 쌓인 살림 정리, 이사, 아이들 학교 서류 등 정리할 것들이 산더미였지만, 

아내님은 “나 간다. 준비 잘하고.”라며 훌렁 필리핀으로 떠나셨습니다.

아아, 님은 갔습니다.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아아, 님은 떠났습니다]



저는 두 딸과 덩그러니 남겨졌고, 한국에 남은 1달 반 동안 이사를 비롯한 모든 것을 

홀로 처리해야 했습니다.


더 큰 문제는 그 기간 동안 제가 두 딸을 전담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내가 떠난 날 저녁식사를 위해 식탁에 앉은 저와 두 딸. 

저희는 서로를 쳐다봤습니다. 어색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딸내미들과 그리 친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제 얘기를 조금 드리겠습니다. 


저라는 인간. 경상도에서 자란 데다 남중 – 남고 – 공대 – 군대 - 건설회사라는 전설 같은 세상을 살아왔습니다. 게다가 MBTI는 극 I ! 환장의 콤비네이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저와 결혼해 주신 아내님은 틀림없이 간디 님보다 더 너그러우신 게 분명합니다.) 

그런 제가 딸들에게 친근하고 좋은 아빠였을 리 만무했습니다.


‘이제 어쩐담.’ 


비상사태! 큰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엔지니어였습니다! 

저는 엔지니어답게 문제점을 찾고, 분석하고, 대응책을 마련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정사를 그렇게 접근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하실 수도 있겠지만, 제가 그랬습니다.


우선 소프트웨어적인 부분과 하드웨어적인 부분을 나눴습니다.

하드웨어적인 것들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짐정리, 이사, 각종서류 등 기한과 일정을 정하고, 비용을 지불하는 것들은 회사 업무와 닮은 것들이었기에 하나씩 익숙하게 처리해 나갔습니다.


역시나 어려운 것은 소프트웨어적인 것이었습니다. 

아마추어 아빠인 제가 어떻게 아이들을 안심시키고, 편안하게 함께 할 수 있을까.


두 가지 목표를 세웠습니다.

첫째, 엄마 없는 한 달 반 동안 아이들의 마음을 잘 돌보자. 

둘째, 아이들과 친해지자.     


정답은 없었습니다. 그냥 ‘셀프 파이팅!’을 외치며 무작정 시작했습니다.     


(Project 1) 아이들의 마음 돌보기. Part 1. 그리움 돌보기

제 두 딸은 8살, 4살. 

엄마가 떠나고 그리워할 법도 한데 생각보다 괜찮아 보였습니다. 

신통하게도 두 녀석 다 한 번 울지도 않고 엄마를 만나는 날까지 잘 견뎌줬습니다.

어느 정도 자라서 그랬는지, 아니면 영상통화 덕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다행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잠들기 전 언제나 엄마를 찾았습니다.

이미 7살, 3살 때부터 따로 자는 교육을 마쳤지만, 자기 전에는 외롭기도 하고 많은 생각이 났나 봅니다.

하지만 한참 고민해 쥐어짠 저의 최고의 위로는 고작 ‘엄마 곧 볼 수 있을 거야.’ 정도가 다였습니다. 

아주 형편없는 아빠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저의 형편없는 위로에도 첫째 딸은 알았다며 제법 의젓하게 감정을 잘 다스렸습니다.

하지만 4살이었던 둘째 딸에게 저의 로봇 같은 위로는 통하지 않았습니다. 둘째는 매일 밤 같은 질문으로 저를 괴롭혔습니다. 















“아빠, 엄마 만나려면 몇 밤 남았어요?”

“어제 30일 남았다고 했었지? 그럼 하루가 지났으니 30에서 1 적은 29일 남았겠지? 스물아홉 밤 자면 엄마 만날 거야.”

공대 출신 아빠인 제 딴에 최대한 부드럽고 친절한 목소리로 설명했지만 

실상 내용물은 ‘인풋 – 연산 – 아웃풋’이었습니다. 


둘째는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왜 매일 같은 것을 물을까?’ 저는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돌아보니 둘째 딸이 원했던 것은 마음의 안정과 위로였습니다. 

저는 눈치 없이 열심히 산수를 하면서 오답을 외치고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개똥 같은 위로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정말 형편없는 아빠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면서 잠들기 전 저와 딸들의 대화는 루틴이 되었고,

사소한 이야기들을 하나 둘 나누며 어색함도 조금씩 걷혀갔습니다.


그럼에도 한계는 있었습니다.

저는 또 고민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저질러버렸습니다.

아아, 저는 금단의 영역에 발을 들이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우아하고 순백 같은 아내분들은 결코 들어올 수 없는 오직 아빠들만, 그것도 극소수의 아빠들만 선택할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똥과 방구 이야기로 아이들을 웃기는 것이었습니다. 

대화계의 불량식품 같이 자극적이고 매콤한 주제지만 언제나 먹혀드는 주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똥’이나 ‘방구’라고 말만 해도 자지러졌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제 평생 똥쟁이, 방구쟁이의 이미지를 달고 살아야 할 운명에 처해야만 했습니다. 

아아, 운명이시어.

그래도 좋았습니다. 

아이들의 자지러지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저는 아이들의 마음을 잘 달래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나 봅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딸들은 엄마가 보고 싶어 여러 번 울었다고 했습니다. 



둔한 아빠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는데, 아이들도 아빠의 처지를 가엾게 여겼는지 

제 딴에는 아빠가 걱정하지 않도록 행동했었나 봅니다. 

기특하면서도, 마음이 좀 얼얼했습니다.

저만 아이들의 마음을 돌본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들도 제 마음을 돌보고 있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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