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무, 『즐거운 소란』. 천년의 시작. 2022를 읽다가
정치적 인간의 정의(正義)
요즘 일반적으로 정치적 인간이라 하면,
어제의 나에게는 관대하고
미래의 나를 과장하고
현재의 나를 과시한다.
동시에
어제의 너를 폄하하며
미래의 너를 혐오하면서
오늘의 나보다 강한 너에게는 미소 띤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올바른, 정치적 인간이라면
어제의 우리를 다독이고
미래의 우리를 격려하며
오늘의 우리를 한마디 말과
두 손으로 북돋는다
신영복 님의 인간미 넘치는 수필, <청구회 추억>(1969)을 읽고 나니 뜻밖에 ‘정치적 인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각설하고, 정치적 인간이란, 여린 이들에게 가장 인간다운 자긍심을 불러일으켜 주려는 의지를 실현하는 사람이리라.
정치가의 기본소명
이런저런 생각하다 시인 이재무의 시집 『즐거운 소란』 중 ‘걸어온 길’이라는 시도 읽게 되었다. 그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걸어온 모든 길들은
세포 속에 쟁여져 있다.
그리고 이렇게 마친다.
언젠가 길들은
내 몸을 빠져나갈 것이다.
이 시의 시종에는 인간 안에 어지럽게 뒤섞여 있는 ‘세포의 미로’에 인간다움이 스며있다는 시인의 속 깊은 관망이 담겨있다. 다시 말해 모든 인간은 자신이 살아온 길이 세포처럼 몸에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나는 좀 더 넓게, 이 시에서, 그 인간다움을 자기 몸에 장착하지 못하면, 결국, 다른 이의 인간다움을 일깨워주는 데 어렵다는 말로 이해했다. 그리고 ‘타인의 인간다움’을 일깨워주는 데 소명을 가진 사람이 바로 정치적 인간이라는 데 생각이 이르렀다.
요즘 통치자의 행보 비평
요즘 대통령의 행보가 세간에 화제다. 하루 이틀 일은 아니지만, 이번 임기의 통치자는 다소 다른 면에서 뉴스의 중심에 있는 것 같다. 바로, ‘인간을 대하는 정치가의 태도’에 관해서다. 나라 안의 사람이나, 나라 밖의 사람이나 그가 대하는 태도 속에서 일상적인 사람들은 ‘정치적 이념’에 묶인 폄하보다는 이념 너머에서 진정으로 정치가의 면모를 주목한다는 것이다. 이전 경우보다 가장 현저한 특징은 그가 ‘남다른 배려,’ ‘작은 배려’를 세심하게 실현한다는 점이다. 물론 그런 배려가 정치적 계산에 의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에 대해 정치적 계산을 부정적으로 비판하는 태도에 이견을 말할 마음은 없다. 그러나 타인의 인간다움을 드높이기 위해서는 세심하게 계산된 정치적 배려가 때로는 그저 무심한 공약(空約) 보다 더 큰 정치적 공의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것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점은 정치가의 계산에 담긴 공익의 세계관이다. 다시 말해, 그의 정치적 태도가 궁극적으로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타인-국민, 세계시민의 인간다움 보호와 보장’이라는 지속 가능한 안정된 삶(전쟁 금지는 필수다)을 위한 것인지가 올바른 정치가의 인간다움을 가르는 기준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최근 통치자의 일상에서 포착된 태도와 그에 대한 뉴스 영상, 흥미 위주의 짧은 영상 어디서나 흠보다는 의아하다, 새롭다는 반응이 곁들여져 있다(물론 중국 주석에게 위태로운 농담도 던지긴 했지만). 따라서 나는 그의 행보를 전해 들으면서, 그가 정치적 인간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는 데 공감한다. 요컨대, 그의 정치적 인간의 면모는 타인의 인간다움을 드높여 주려 상대방의 처지에서 계산된 행동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말에서 드러나는 통치자의 자격
생각해 보니, 예전 선거를 앞두고 그 후보들이 참여했던 토론회가 생각난다. 사실, 겨우 1000명 안팎의 여론으로 네 사람이 선정되고, 그중 한 사람이 통치의 최고 타이틀을 거머쥔다는 것이 어불성설 같긴 하다. 하지만, 어떻게 되었든 누구에게나 꼭 되어야 할 사람이 있을 테니 각 사람이 기대하는 대로 지지한다면 그만일 뿐이라는 생각은 여전하다. 다만 나는 그때 토론을 보면서 한 가지 사실을 나에게 좀 확인해 두고 싶었다. 전문적인 통치 공약이나 주관적 견해들은 내 우선 관심이 아니었고, 나는 그들의 ‘언어 속에 인간을 이해하는 정도’를 가늠할 만 요소가 있는지 제대로 듣고 싶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나는 정치가가 그 토론을 얼마나 능숙하게 해내느냐를 대통령의 최적한 자격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또한, 이전 삶에서 무엇을 이뤄냈는지는 더더욱 자격여건으로 보려 하지 않는다. 정치란 모름지기 토론으로 승패를 보는 게임이 아니며 과거 업적이 현재 그를 평가하는 유일한 기준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정치인들-필연적으로 위장을 업으로 삼는 이들-의 인간 이해를 주목하려 한다. 즉, 그가 자기 토론에서 지금까지 걸어온 길, 그리고 지금 걷고 있는 길, 앞으로 나아갈 길을 함께 걸으려는 ‘보편적 인간’에 대해 어떤 내적 태도를 함양하는지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지나온 길에는 겸허한 자기 성찰적 고백이, 지금 길에는 흔들리지 않는 숭고한 결심이, 지날 길에는 용기를 일깨운 명확한 신념이 그를 감싸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요컨대, 나는 이것이 정치적 기술이나 수사가 아니라 정치를 받아들이는 한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인간에 대한 태도로서 중요하다고 여긴다. 사실, 이런 요소들은 토론에서 결국 하나로 다듬어져 표출되는 것이다. 자기 생각을 말할 때나, 상대에게 자기 질문을 던질 때나, 질문에 답을 할 때 무의식 중에 하나로 이어져 언어나 비언어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그들의 지난한 삶에서 지금 내가 볼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자기 길에서 습득한 인간에 대한 ‘지금 여기’에서의 태도이다.
최고통치자의 존재의의
다시 시인 이재무의 말을 밀리자면, 정치인들이 자신이 걸어온 길은 무엇이든 ‘그의 세포 안에 내장되어 있다’. 그것은 변할 수 없어서 어떤 순간에라도 감출 수 없다. 어느 선거에서나 토론에 나선 후보들은 각각 자기가 살아온 삶에 대한 자긍심이 크기 마련이다. 누구나 그러하듯, 자기 삶에 대한 과도한 자신감이 묻어난다. 그것은 겸허한 고백이라기보다는 자신 넘치는 선언에 가깝다. 상대를 완벽하게 깎아내려야 자신이 살아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서로 주고받는 이야기 속에 흠집이나 돌이킬 수 없는 비리를 들춰내려 한다. 그들 모두는 현재 자기 길에 대한 적절한 정치적 수사를 능숙하게 구사한다. 거짓인지 참인지 단정할 수 없는 말들이 오간다. 그러나 그들의 관심은 인간을 비인간화해야 자신이 살 수 있다는 정치적 당위성이다.
그러니 어느 경우이든 나는 그들에게서 지금 그들이 걷고 있는 길, 걸으려는 길에 대한 숭고한 결심이 허구라는 의구심을 부인할 수 없다. 그들은 말속에는 참과 거짓이 섞여 있다. 어떤 경우에는 인간을 무시하듯 토론에 할당된 자기 책임 시간마저 성의 없이 흘려보낸다. 토론자들이 남기는 마지막 말이 이런 인간다움의 절정이다. 정치에 관심을 두는 이들에게 더 많은 상상보다 냉정한 이성이 필요한 것도 바로 이 마지막 말을 잘 알아듣기 위함이다. 예를 들어, 경제 분야 질문이 ‘먹고사는 문제의 중요성’이라는 것을 모를 리 없지만, 모든 의식주에는 한 가지 사실이 전제되지 않는 한 부와 빈의 격차를 줄여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전제는 바로 최고 통치자가 이 땅에 사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곧 가난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스운 말이지만, 대통령 주변에는 부자가 되고 싶은 이들로만 가득하다. 우리 시대에 부한 삶을 거부하는 이는 드물다. 그 부를 쟁취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사람들이 많다. 통치자가 그 좋은 배경이라고 여기는 사람들 말이다. 하지만, 대통령이라는 최고 통치자, 정치가는 전혀 다른 존재 이유로 자기 방어를 견고히 해야 한다.
오늘날 정치가의 새로운 정의
신영복의 수필로 돌아가자면, 최고 통치자에게 가장 필요한 자격은 인간에 대한 예의다. 그것이 가장 뛰어난 사람이 누려야 마땅한 자리다. 여기서 인간은 ‘땅의 사람, 가난한 이’를 우선 의미한다. 정치가 그래서는 안 되지만, 인간을 수단으로 치부하고, 목적 도달을 위한 방편으로 삼는 태도가 평범한 사람 몸에도 도사리는 것 같다. 민주주의는 경제적 최고 부에 도달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그것은 자본 중심주의다. 오히려 인간의 자유가 모든 인간에게 미치기를 기대하는 인간 근본의 정치행태다. 제도는 본질을 표현할 수는 있지만, 담아낼 수는 없다.
따라서 정치 본질을 제대로 담으려면, 그것에 어울릴 제도가 적절하게 상호보완되어야만 한다. 그래도 겨우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의 정치다. 그런 정치를 한 문장으로 말해두자면, ‘인간이 인간의 웃음을 보장하기 위한 정의로운 조치’ 일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인간의 울음을 행복하게 보장하는 공의로운 태도’이다.
인간다운 통치자를 경계하는 힘
말하자면, 정치는 인간과 이 세계에 이바지하는 도구이지, 인간을 통해 자기 유익을 쟁취하는 힘이 아니다. 지금 세계는 이런 유형의 정치가가 더 보폭을 크게 하며 횡보한다. 물론 한낱 토론에서 인간의 아름다운 삶을 현실로 그려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런 의식을 평소에 갖고 지낸다면, 자신도 모르게 자기 삶에서 자기 말로 그런 인간다움의 정치를 실현하는 때도 적지 않다. 그 ‘인간다움’을 자기 문제로 인식하고 실현하기 위해 분투하는 이가 진정한 정치가가 아니겠는가.
나는 나의 이러한 기준에서 우리 시대에 진정한 정치가를 선별하는 데 매의 눈을 다듬어 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