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가을은 돌아올 봄에 싹이 날 씨앗을 준비하여
땅속에 묻어두는 의식의 계절이다.
가을은 의식의 계절
막가을이다. 어느 해든지, 가을은 처음보다 끝으로 갈수록 아름답다. 단풍은 바람이 차가워져도 그 붉음이 뜨겁다. 하늘이 높아져도 낙하가 두렵지 않다. 하지만, 계절에 순응하며 나의 가을도 그 끝을 향해 달리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아쉽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 아쉬움을 힘입어, 나는 해마다 '가을' 의 개념을 다시 정의하는 기회를 얻는다. 가을을 단순히 결실을 수확하는 계절로만 단정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올해는 가을을 씨앗을 찾아 되심는 계절이라 말하고 싶다. 겨울을 지나 봄이 올 때 싹을 틔울 건강한 씨앗을 준비하고 수확하여 공존을 위한 힘을 심는 '의식(儀式)의 계절'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해마다 나의 가을에 잘 심어둔 씨앗이 봄에 꽃피고 누군가의 가을에 결실할 것을 상상하면 즐겁다.
가을에 얻은 나의 씨앗
올해 가을을 씨앗을 심는 계절이라고 정의하고나니 나는 이 가을에 어떤 씨앗을 파종할 수 있는지 스스로 묻게 된다. 결실이 적은 것은 하나도 아쉽지 않은데 다시 뿌려둘 씨앗이 없다면 스스로 불편하다는 것을 알았다. 봄과 여름, 저 들판을 걸으며, 또 저 산을 넘으며, 그저 목표를 향해 걷기만 하고, 또 정상에 오르려고만 하다 다시 심을 씨앗 하나 남겨두지 못했다면 참 난감할 일이다. 다행히 나는 이 가을을 떠나보내기 전 내 삶에 남겨진 가을 씨앗을 찾을 수 있었다. 의미있는 씨앗 종자를 어떤 것은 늘 유지했고, 또 어떤 것은 새로 얻었다. 나의 그 씨앗들 중 몇 개를 정리해보면 이렇다.
(1) 걸음/걷. 기ㅡ검은 안식의 철학.
올해는 몸 관리를 잘 유지한 결과 가깝고 쉬운 길, 멀고 어려운 길도 잘 걸었다. 그래서 검은 안식의 철학이라는 씨앗을 찾았다. 이는 어둠 같은 삶의 무너짐 속에서도 발아하는 생명을 사유하는 것이다. 내달리려는 존재의 본성을 멈춤과 안식의 상태로 견제하면서도 결실을 욕망하지 않는 순수한 '되어가기'의 시간을 의미한다.
(2) 새로운 글쓰기
올해는 에세이라는 장르를 더 깊이 배우기 시작했다. 생각만 하고, 실천은 드문드문했던 이 글쓰기를 제대로 연습하는 중이다. 이 씨앗을 잘 심어 어느 날 누군가에게 좋은 결실로 나누면 좋겠다.
(3) 공동체성
언제나, 어디서나 공동체는 나의 씨앗이다. 살갑게 지내기도 했고, 거리를 두기도 했으며 친밀해지기 도 했으며, 소원해지기도 했다. 가까이 있기도 하고, 멀리 있기도 했지만 만나는 이들 모두 식구 같다. 어떤 모습, 어떤 형편이든 한결같다. 아이가 태어나기도 했고, 하늘로 돌아간 이도 여럿 있었다. 슬픔을 지우기도 전에 슬픔이 밀려오는 일도 있었다. 이것은 생각보다 큰 슬픔이었다. 그래도 함께 다독이며 이 거대한 슬픔을 산산이 부셔가며 잘 살았다.
(4) 자유
흔들리면서도 나의 길을 걸어가는 자유는 나의 씨앗이다. 이 자유는 무엇보다 나의 사라지지 않을 소중한 씨앗이다. 자유의 정치는 물론이고 '나로부터 자유'도 간과할 수 없다. 비록 나를 얽어매는 일들이 여전했지만 우울하고 좌절할만한 일들이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렇게 비틀거리면서도 두 발로 꿋꿋하게 나의 길을 잘 걸었다. 나는 자유롭다. 나에게 자유란 단지 속박되지 않는 삶이 아니다. 오히려 올람(OLAM)의 진리ㅡ무시간성에 근거하여 세계와 나를 연대하며 관계지으려는 영원한 가치ㅡ에 스스로 속박되려는 자기 결단이다.
올람은 단절될 수 없는 총체적 시간이며, 과거-현재-미래가 벡터로 펼쳐진 공간이다. 고대 코헬렛은 올람의 관점에서 어둠과 밝음을 구분하지 않았고, 밤과 낮의 경계를 명확히 가르지 않았다. 인간의 삶이 오르고 내리는 길을 걷고 멈출 때마다, 나는 가을이 오면 이 올람의 자유가 여전히 살아있는지 점검하고, 창조 질서에 속박되려는 생존 의지를 더욱 각인하며 다시 걷는다. 마치 ‘비가 내리면 꽃이 피는’ 창조 질서를 인간이 조작하지 않아도 현실에서 실현되는 질서와 같다는 것을 실 체험한다.
그래도 이 계절, 만약 ‘무슨 이유로 씨앗 하나 마련해두지 못했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 받게 된다면, 그 이유는 분명하다. 결실만 생각하다 보니 그랬을 것 같다. 누군가 결실 없는 가을은 자신이 빈약한 탓이라 힐난할 수 있다. 감사할만한 것 없는 가을은 자신이 게으른 탓이라 추궁할 수 있다.
그렇다 해도 그리 신경 쓸 일은 아니다. 그보다는 씨앗 없는 가을에 더 마음을 쓰고 싶다. 나 스스로 가볍게 지나갈 수 없으리라. 올해 수확한 이런 씨앗들은 온전한 삶이 백이라면, 아흔 아홉 개의 보이는 절망과 단 하나의 보이지 않는 희망ㅡ그것이 상상일찌라도ㅡ으로 얻게 된 것임을 다시 생각한다.
가을에 찾은 우리의 씨앗
이 가을, 나의 씨앗만 아니라 우리의 씨앗도 생각해 보고 싶다. 이런 마음으로 이 가을, 우리가 수확한 씨앗을 살펴보자
(1) 자기 삶에 최선이라는 씨앗: 여러 곳에서 올해 자기 삶을 훌륭하게 살아낸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들이 남모르게 쏟아부은 수고가 있기에 당연한 결실이리라. 박수를 보낸다.
(2) 댓글로 표현된 격려의 씨앗: 자기 삶에 턱없이 부족한 결실 때문에 한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생각보다 많다. 그런데 그만큼 격려의 댓글도 충만하다. 이런 격려야말로 사람들의 결실이 무엇인가보다 결실을 위한 과정에 설명할 수 없는 수고를 쏟아부었다는 사실을 공증해주는 증표다. 나도 그 수고만으로도 충분한 결실이라고 응원해주고 싶다.
(3) 버려야 할 씨앗: 풍요로운 논에 피가 자라듯, 의도하지 않았는데 피어난, 버려야 할 씨앗도 있다. 예를 들어, 인간의 슬픔을 악화하는 일, 스러질 수 밖에 없는 삶의 사회적 방치, 이해 불가한 논리로 갈등을 유발하는 아집, 세계의 자유를 가로막는 아전인수적 평화 논리, 물 흐르듯 흘러가야 할 ‘법’을 그 자체로 무력하게 하는 위력. ‘삶’은 돈이라는 경제 함몰의 정의 등이다.
(4) 자유를 오용하는 씨앗: 무엇보다 ‘자유’가 타인을 윽박할 수 있는 힘이라고 오용하는 일은 당연히 버려야한다. 돌이켜보면, 타인의 삶을 무례하게 훼방하는 사건들도 매일 내 삶 언저리, 세계 끝에서부터 나를 휘감고 있다. 이런 씨앗은 아무리 많아도 좋은 열매를 맺기 어렵다. 아낌없이 버려야 한다.
가을, 검은 안식의 계절
가을은 검은 안식의 계절이다. 난무하는 좌절 속에서도 안식을 선물처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아니 낙엽은 죽지 않기 때문이다. 힘겨운 중에도 순리를 따라 어둠 속에 잠시 침잠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 검은 안식의 철학을 따라 나는 다시 낙엽처럼 스러지는 이 궁핍한 시대를 사유한다. 그 틈에 나를 위한 씨앗 생각 몇 개를 마음에 품고 온몸에 심는다. 그리고 잊지 않는다.
가을은 이렇게 과도한 결핍, 지나친 소비에 몰두하는 세계에서 안식으로 이끈다. 이 평범한 사실로부터 나아가, 결실보다 씨앗을 심는 일이 공동체의 공존 가능한 삶을 유지하는 가을의 힘이라는 것을 확신한다.
가을은 씨앗을 남긴다. 다시 돌아오기 위해 겨울 틈에서 고요히 머문다.
나도 안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