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다익선, 이 남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천성이 미니멀리즘에 비우는 것을 선호하는 이 남자에게 단순히 많은 것은 좋은 게 아니었다.
카페에 도착한 남자, 혼자가 아닌 듯 음료 두 잔을 시키고 카페를 둘러보다 잘 꾸며진 벽 쪽의 의자를 꺼내 앉는다. 뒤이어 들어온 여자를 보고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반갑게 인사한다. 여자가 다가오자 자신이 앉아있던 자리를 비켜주고 음료를 받아와 반대편에 앉는다. “어, 전에 너가 마시던 거네? 이거 맛있더라.” 전에 조금밖에 못 먹어서 아쉬웠는데 또 먹으니 더 맛있다면서 웃는 여자를 보며 남자는 옅은 미소만 짓고 아무렇지 않은 척 자신의 커피를 마셨다. 그 후로 한참 동안 자신의 얘기를 늘어놓는 여자를 가만히 듣던 남자, 그녀가 지쳐 보이자 “여기서 사진 찍고 싶었지 않아?”라며 주제를 돌렸고 금세 화색이 된 여자를 찍어주었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카페를 나와 걷던 중 남자가 여자를 멈춰 세웠다. “끈, 풀렸어.” 덤덤한 목소리로 짧게 읊조리고 몸을 숙여 신발끈을 묶어준 뒤 다시 걸었다. “이런 거 되게 잘 보더라.” “그냥 보였어.” 조용스레 말한 그녀의 말에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남자. 심드렁한 남자의 태도에 여자가 살짝 서운한 듯 보였다. 추운 날에 손이 시려 손을 비비고 있던 여자에게 남자가 자신의 손을 주머니에서 꺼내 잡아주었다. “손이 왜 이리 따뜻해?”라며 기분 좋은 미소로 소리치는 여자, 남자는 자연스레 주머니에서 핫팩을 꺼내 들었다. 그걸 본 순간 여자의 미소는 사라지고 토라진 얼굴로 치사하게 혼자 쓰냐며 투덜거렸고 남자는 핫팩을 건네준다. 쓰던 거라고 믿지 못할 정도로 따뜻한 핫팩이었다.
핫팩을 들고 가다가 갑작스레 서운함이 솟구쳐 오른 여자가 잔뜩 토라진 말투로 서운하다고 하자 남자는 당황한다. 하지만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하고 주인의 ‘기다려!’ 명령을 들은 강아지 마냥 가만히 있었다. 그런 모습에 답답함까지 올라온 여자가 결국 이 질문을 꺼낸다. “나 사랑하긴 해?” 순간 움찔하는 듯했지만 당연스레 꺼내야 할 사랑해란 말을 하지 못하고 또다시 가만히 있다가 조용히 “당연하지.“라고 짧게 말할 뿐이었다. 어이가 없는 여자는 한숨을 쉬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고 아까처럼 다정히 걷는 것이 아닌 남자가 그녀의 뒤를 쫓아갈 뿐이었다. 걷던 중 찬바람이 세게 불자 남자는 ”저녁… 먹으러 갈래?“라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먼저 말을 걸었고 여자는 마지못해 ”어디서“라고 퉁명스레 답했다. 그 뒤에 남자의 대답에 그녀는 울먹이기 시작했다. 자신이 저번에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식당을 예약해 둔 것이다. ”미안해.“ 여자가 울먹이며 조용히 말했고 남자는 ”괜찮아.“라고 답할 뿐이었다.
엉망이 되어버린 데이트를 마무리하기 위해 식당으로 향한 남녀, 들어가 앉아 맛있게 먹으면서도 아까의 상황에 민망해서인지 여자는 별다른 말을 꺼내지 못했고 남자는 간간이 고개를 들어 미소 지을 뿐이었다. 그러다 후식을 받을 때 갑자기 남자는 꽃 한 송이를 가져와 건넸다. 그리고 짧고 조용스레 말한다. ”사랑해.“ 여자는 당황했다. 당연스런 반응이다. 연애를 시작한 지 1년이 되도록 별다른 이벤트나 선물은 없었고 그저 덤덤하고 매너 있는 모습을 보여줄 뿐이었던 그에게서 이런 모습을 보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오늘이 우리 1주년 직전 주말이잖아. 챙겨주고 싶었어.”라며 꽃을 쥐어주고 편지를 하나 꺼내어 여자에게 주고 집에 데려다주겠다며 편지는 집에서 봐달라고 말한다. 여자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그대로 아무 말 못 하고 집으로 넣어졌다. 집에 들어와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편지를 꺼내본다.
‘벌써 1년이 되었어. 그동안 무뚝뚝한 내 모습에 서운함을 표하는 것을 본 적이 많았어. 하지만 나는 그렇다고 사랑하단 말을 쉽게 꺼내지 못했지. 항상 너가 바라는 대답이나 행동을 알고 있었지만 그런 언행을 매번 계속하는 것은 나한테 맞지 않았어. 너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서 이런저런 말을 하면서 웃겨주는 것보다 함께 있어주고 맛있는 걸 먹으러 같이 가는 게 내 표현이었지. 내가 하던 모든 행동이 단순한 매너가 아니라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온 행동들이어서 이런 마음을 알아줄 거라 생각했어. 이 편지를 줄 때면 너가 정말 오랜만에 나한테서 장미꽃 한 송이를 받아 들고 사랑해란 말을 들었을 거야. 장미 백송이를 건네는 것보다 조심스레 예쁜 장미 한 송이를, 수많은 표현으로 꾸며서 말하는 것보다 담백한 한 마디로 사랑해를 말하는 게 내 사랑이야. 앞으로도 잘 부탁해.’
여자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남자의 사랑을 믿지 못해서 종종 회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던 자신을 이미 알고 있다는 말에 미안한 마음과 서운함이 함께 올라왔다. 이 남자의 표현을 다 알아주지 못한 자신이 싫었고 이런 자신을 알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방식을 고수한 남자가 미웠다. 좁혀질 수 없는 차이. 여자는 끝없는 표현만을 바랬고 남자는 그저 묵묵히 자신의 방식으로 보여줄 뿐이다. 남자의 모든 행동에 묻어 있는 사랑은 여자에겐 오늘 말해준 ‘사랑해’ 보다 못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오늘 말해준 그 사랑해 가 너무도 소중하고 진실되어 보였다. 적어도 이런 사랑을 속삭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보다 더욱더 자신을 사랑해 주리란 믿음. 그걸로 지난 1년의 방황이 끝맺음이 났다. 사랑하는 이에게 그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꺼내놓는, 듣고 만질 수 있는 사랑인가 아니면 보이지 않아도 직접 느낄 수 없어도 하나하나 곳곳에 아무렇지 않은 척 스며들어 있는 것인가. 과연 여자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