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시작된 장마, 분명 이전 주에 온다 했던 것이 서프라이즈라도 하는 듯 일주일이 지나서야 시작됐다. 엄청난 양의 물이 쏟아진다.
비가 오면 잡생각이 많아진다. 나가기도 싫고 움직이기도 싫어서 가만히 있다 보니 자연스레 떠오르는 듯한, 그런 어중떠중한 생각들 중에서 한 생각을 집어 들었다.
나는 뭘까. 하고 싶은 일이나 좋아하는 일은 뭘까. 누군가 나에게 '제일' 잘하는 것이 무엇이냐 물었을 때 뭐라 답할 수 있을까. 혹은 '제일' 좋아하는 영화, 책, 취미 등을 물었을 때는 뭐라 답할 수 있을까.
평범하게 사는 것이 싫어서 하고 싶은 것들에 도전해 보겠다고 뛰쳐나왔건만 가장 살고 싶은 삶이 평범한 삶이었다. 걷는 것이 시간을 잃는 것 같아서 이곳저곳을 가더라도 급하게 뛰어왔더니 어느 순간부터 걷는 법을 잊었다.
내리는 비가 언제 그칠지 모른다. 이번 장마는 정말 우리나라의 기후 자체가 바뀌었다는 것을 증명해 줄 강한 비다. 계속해서 떨어지는 빗방울, 도로 위를 달리는 차들의 바퀴에 튀어 오르는 물웅덩이의 소리, 가끔 내리치는 번개와 울려 퍼지는 천둥. 세상이 사라질 듯한 기분이다.
따뜻한 국물에 푹 담기는 샤브샤브의 얇은 고기가 되어버린 기분이다. 분명 속까지 차오르진 않지만 겉은 확실히 묻었다. 목욕탕에 들어가서 때를 불리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의 습도.
어두운 하늘을 피해서, 세차게 내리는 빗물을 피해서, 우중충한 무언가를 피해 들어와 있는 공간은 좁고 좁다. 그렇게 피하고 피해서 숨어있다.
그렇게 피해봐도 계속해서 차오르는 빗물, 내 머릿속에는 하수구가 없다. 언젠가 주어질 망각이 이 모든 것을 증발시켜 주리라 믿고 그저 기다리는 것뿐. 우습다. 필요 없는 것을 흘려보내지 못하고 가만히 붙들고 있다 자연히 날아갈 때까지 견뎌야만 한다.
시간이 흐른다. 비가 내린다. 그렇게 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