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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경 Mar 11. 2023

환대의 기억

2023. 03. 11. 초보 편집자의 일기

어제는 정말 아웃고잉한 하루를 보냈다. 필요한 방문 일정을 하루에 다 몰아서 잡은 것이다. 그런데 정말 모든 곳에서 환대 받아서 기운이 빠지기보다 오히려 힘이 나는 하루라 기억해 두고 싶다. 오늘의 경로는 대흥(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경험서재) → 공덕(한겨레) → 독립문(전교조 서울지부) → 신길(인권교육센터‘들’&인권운동사랑방, 조기현)이었다. 신길 이전까지는 따릉이 덕분에 힘들지 않게 슝슝 다닐 수 있었다.


먼저 포럼 후원 기념 티셔츠를 받는다는 핑계로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사무실에 들렀다. 이호림 활동가가 회의 중에 나와서 응대해 주었다. 오늘의 교육을 드리면서 소개드리고 즉흥적으로 강좌 포스터 드리면서 홍보도 부탁했는데 흔쾌히 받아 주었다.

바로 앞에 한기호의 출판학교 동문 현다연 편집자의 일터인 유엑스리뷰가 운영하는 경험서재라는 서점에 갔다. 출판사의 지향을 보여 주듯 공간부터 이용자 중심으로 잘 설계되어 있어 영감을 받았다. 그는 서점에 진열된 자사 책들을 편집자 시선에서 소개해 주었는데 넘 새로운 경험이었다! 원래 관심 없던 IT 실용서 분야인데도, 사용자(독자) 중심으로 글과 프로세스를 구성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 쉬운 책을 한 번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짐이 많아 책을 사진 못했지만 다음에는 (오늘은 부재중이던) 대표도 소개 받으면서 그에게도 책 추천을 받는 걸로.


그리고 한겨레로 가서 1층 응접실에서 최원형 한겨레 책지성 팀장을 만났다. 만나게 된 과정도 이례적이었는데, 출판학교에서 예전에 기자에게 직접 책을 전하던 방식, 그러면서 맺어지는 관계가 있었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도 한 번 몇 곳은 그렇게 해 보고 싶다고 생각한 것이다. 일단 첫 픽은 한겨레 토요판 책&생각, 주간경향으로 정했다. 두 곳에 오전에 갑자기 메일 드려서 방문하고 싶다 한 거였는데(내적부담 때문에 미루다 오늘 급 보냈다 ㅠ), 그에게 바로 언제 오라는 응답을 받은 것이다. 우편이 아닌 직접 신간을 전달하는 건 처음이라 그냥 책만 전달하고 슝 나와야 되는 거 아닌가 하면서 긴장하고 갔는데, 책도 시간들여 살펴봐 주고 이야기도 찬찬히 들어 주어서 긴장하지 않고 준비한 이야기 이상으로 더 수다스럽게 이야기하게 됐다. 마침 그의 오늘자 <불신당하는 말> 서평 기사가 너무 좋아서 막 얘기했다.


그리고 전교조 서울지부에서 정기영 참교육 실장을 만났다. 지부는 지금 시의회에서 국힘이 ‘기초 학력 부진 학생 지원 조례’를 졸속 통과시키는 것에 급박하게 맞서고 있다. 그 이야기를 듣는데 옆에서 또 인터뷰와 어떤 사건이 생기면서 생생하게 분노하는 목소리가 들리면서 긴급성이 체감됐다. 지부에서 지금 기획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그런데 우리 벗이 고민하고 있는 것과 아주 딱 들어맞는 이야기도 듣게 되고 의견을 내기도 하면서 우리는 같은 것을 바라보고 있구나 하면서 힘받는 시간이었다.


그 다음엔 들&사랑방이었다. 이번 신간에 참여한 필자이기도 한 배경내 활동가에게 책을 전달하고 사랑방으로 가려는데 사랑방으로 올라가는 그 한 층을 바래다 주며 내가 왔다고 알려 줬다. 그게 뭐라고 되게 따수웠다. 대용 활동가가 맞아 주었는데 또 너무 편안하게 맞아 줘서 막 수다를 떨게 됐다. 포스터 붙이러 다니기 시작한 건데 어쩐지 벗과 각 단체 서로 근황 나누기가 주제가 된 것 같다. 그것도 좋았다. 다음 약속 시간 때문에 금방 일어나야 했지만, 또 다시 오고 싶다 - 그때는 다른 사람들도 한 명 한 명 서로 소개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인권운동의 틀을 빼꼼 나와서 바라보니, 인권의 언어와 연결되었으면 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그런 언어의 연결 과정에서 사회과학 출판도 더 잘할 수 있게 되는 거라 생각한다.   


마지막 만남은 조기현 작가였다. 영케어러와 학교 주제로 벗에서 자리를 만들어 보고 싶어서 이렇게 저렇게 궁리 중인데 아직 기획안이 나올 정도로 숙성시키지 못하고 시간만 가고 있어서, 그런데 마침 그의 작업실 쪽에 가는 김에 저녁 식사를 하면서 좀 편하게 이야기 나누자고 제안해서 성사된 만남이다. 우리는 원래 약속된 시간보다 길게 이야기를 나눴다. 늘 느끼는 거지만 그는 뭔가 묘하게 분위기를 편하게 만드는 힘이 있어서, 저자를 만날 때 으레 하는 긴장을 하지 않고 온갖 이야기를 더 잘할 수 있게 한다. 그는 이어서 최근 나온 책자도 전할 겸 작업실에 데려가서 공자도 소개해 주었다. 너무나 사랑스러운 강아지였고 난 오늘 한겨레 방문했을 때 이미 직업만족도 만땅이었는데 여기서 300%를 느꼈다.



버스로 집에 돌아가는 길, 오늘과 비슷하게 보냈던 지난주 금요일을 떠올리게 됐다. 출판학교에서 만난 출판기획자&작가 윤혜자 씨가 책방 ‘책보냥’을 소개하고 포스터를 붙일 수 있게 부탁해 주겠다고 한 것에서 시작된, 길음-성북-혜화 투어였다. 길음에 있는 성가소비녀회 JPIC에 들렀다가 성북동에서 그를 만나고, 혜화 풀무질에 가는 일정이었다.


윤혜자 작가가 안내해 준 성북동 일정이 말 그대로 ‘풀코스’였는데, 먼저 아삐에디라는 최고 존엄 파스타 식당에서 라따뚜이와 봉골레를 먹고, 와인바 겸 카페 빠뿅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나폴레옹 과자점에서 산 딸기 케이크도 먹었다. 의도된 건 아니었지만 첫 생일 케이크였다! 그는 준비하고 있는 책에 대한 의견도 나눠 주었는데, 내가 놓치고 있었던, 계속 보다 보니 익숙해진 부분에 대한 독자 입장에서의 피드백이었다. 그는 즉흥적으로 집에 잠시 데려가서 편성준 작가도 소개해 주었는데, 그의 마음의 울타리 안으로 한발짝 들어간 느낌이라 기뻤다.


책보냥에서도, 풀무질에서도 지금까지 소비자로 서점을 방문했을 때는 느낄 수 없던 환대를 받았다. 오히려 단순 손님이 아니기에 불편했을 수 있는데, 내색 없이 맞아 주신 두 사장에게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다. 책보냥 김대영 대표는 내가 최근 만난 스승에게 드릴 선물을 사고 싶다고 하자 여러 책을 소개해 주었고(최종 픽은 편성준&윤혜자 두 분이 인상깊게 읽었다는 소설집이었다), 풀무질 김치현 대표는 그 책을 포장해 달라는 어이없는 부탁(물론 풀무질에서도 다른 책을 구매했다)을 아주 성심껏 들어 주었다.


그날 저녁에는 개똥이네 책 놀이터에 책을 사러 들렀는데, 동네 백반집에서 저녁밥까지 얻어 먹고, 김장환 편집자로부터 그의 작업 프로세스를 엿볼 수 있는 파일 모음까지 전달받았다. 지난 업무 조언의 연장선이었다. 그렇게 나를 계속 생각해 주었다는 점이 약간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이었다. 신간 담당 기자를 직접 만나는 시도를 하게 된 것도 그가 해 준 이야기 덕분이다.



지금까지의 나라면 상상도 못했을 미친듯이 외향적인 하루를 계획하고 또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런 금요일을 보내고 또 주말 동안 광주에 가서도 계속 환대받았던 기억이 깔려 있다. 3월 6일에 생일 선물처럼 《한국 교육의 오늘을 읽다》 실물이 나왔고, 저자들에게 소식을 전하자 초보 편집자를 만나 답답한 순간도 분명 많았을 텐데 수고했다며 응원해 주었다. 그저께, 3월 9일 목요일은 올 겨울을 버틸 수 있게 해 준 어떤 힘, ‘이름없는학교’ 가족구성권 반의 종강일이었다. 단순히 지식 공부만 한 게 아니라 가족, 돌봄, 시설과 관련한 자기 경험을 나누고 서로 해석해 주는 10주간의 모임이었다. 뒤풀이에서는 찐득하고 눈물어린 감사와 아쉬움의 마음이 오갔다. 그래, 나도 이 모임에서 항상 환대 받는 느낌이었어, 하고 다시 깨달았다.


사무실을 비운 동안 동료들과 카톡으로 소통하면서 내가 놓치고 있는 실무, 소통에 대해서도 다시 감지하게 됐다. 역시 책상을 비우면 실무가 밀리지만, 책상을 떠나지 않고는 배울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나는 외롭지 않기 위해서도 그런 시간을 의도적으로 종종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이 글에서 미처 언급하지 못한, 나를 환대해 준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다. 구체적인 만남뿐 아니라 인용으로, 섭외로, 인사로, 표정으로… 그 모든 것들 덕분에 꽤 괜찮게 살고 있다고, 앞으로도 자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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