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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민 Aug 27. 2020

못난이 옥수수

일상 이야기

친정아버지의 소망은 퇴직 후 텃밭을 가꾸는 것이었다.

퇴직을 5년 앞두고, 철두철미하게 텃밭을 일구기 위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셨다.

친정집 옥상에서 농작물 수확을 맛보기로 시작하셨다.

텃밭 입문을 위한 채소 상추, 그다음 입문 유혹 채소 방울토마토,

치커리, 가지, 블루베리, 고추 등등

그리 넓지도 않은 옥상에서 10종은 족히 넘는 수확물이 나왔으니

텃밭을 향한 불타오르는 열정을 말해 무엇하리.



그러다 큰 변수가 생겼다.

친정아버지는 야심 찬 계획을 뒤로 한채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친정 엄마는 상심이 크셨다.

추운 겨울 아버지를 묻고 돌아오는 길에 보이는

꽁꽁 언 밭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추위에 풀 한 포기 붙어있지 않은 차디찬 밭.



친정 엄마는 다행히 종교 힘으로  

아빠는 분명 좋은 곳으로 가셨으리라 믿었고,

지친 몸과 마음이 조금씩 회복이 되었다.



나뭇가지에 여린 새순이 보일락 말락

산을 보면 연둣빛이 보일 때쯤

엄마는 시장 출입을 시작하셨다.


상추, 토마토, 가지, 고추, 감자, 고구마, 참외, 고들빼기, 옥수수, 땅콩 등등

각종 씨를 사모았다.

  "엄마 이것 뭣하러 사 온 거야?"

  "뭐하러 사 오긴 밭에 심을라고 사 왔지."

  "혼자 어떻게 해."

  "이런 거라도 해야 재미있지."



사연 많은 이 텃밭은 엄마에게 효자 노릇을 톡톡히 했다.

열심히 일군 땅에 심고 가꾸고, 물 대주고 하다 보니 정이 듬뿍 들었다.

가끔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엄마의 친구들은

몸빼바지를 입고, 넓은 챙모자를 쓰고, 선크림 듬뿍 바르고

엄마 밭을 와서 정신없이 호미질을 하며 고구마를 캐기도 했다.

그러다 수확의 기쁨으로 우울을 털어버리고서는

본인도 작은 텃밭을 일구어 흙을 매만지며 지내는 경우도 생겼다.



시간이 날 때면 텃밭이 잘 있나 보러 다니고,

여름이면 풍성해진 텃밭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와 함께

이것저것을 뽑아 딸 집에 챙겨주고, 친구 집에 챙겨주고,

그러는 재미로 지내왔다.




얼마 전 안부 차 전화를 걸었다.

   "엄마! 뭐 하고 있어?"

   "..... 아휴...."

   " 어디 아파? 목소리가 왜 이리 힘이 없어?"

   " 밭에 왔는데,... 세상에 멧돼지가 밭을 다 헤집어 놓았네."



아들이 8시간의 눈 수술을 할 때에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던

남자로 태어나려다 잘못해서 여자로 태어난 것 같은 우리 엄마가

힘이 쭉 빠진 목소리로 전화를 받다니.



우리(나와 신랑, 아이)는 부리나케 텃밭으로 가보았다.

고구마가 맛있는 것은 어떻게 알고,

고구마만 쏙쏙 파먹고 간 밭의 모습은 처참했다.

고구마 줄기는 뒤엉켜 있고,

이 영특한 멧돼지 녀석이

아직 다 영글지도 않은 고구마를 집어삼킨 밭의 상처들을 보았다.



고구마 밭을 등지고 밭을 둘러싼 펜스 사이사이에 꼬챙이를 꽂고 있는

엄마가 보였다. 행여나 모기에 물릴까, 진드기가 있을까

빨갛고 자줏빛이 어우러진 촌스런 긴 남방을 입고서

땀으로 등판은 다 젖어 있고,

우리가 왔는지, 보고 있는지도 모르게

멧돼지를 방어하기 위한 힘든 노동에 열심이셨다.



아, 마음이 좋잖다.

이놈의 밭은 왜 처분하지 않아 가지고서는

이 뙤약볕에 저 고생을 하는지

그것 참, 널린 게 마트인데 마트에서 사 먹으면 될 것을.

이렇게 외쳐대고 싶었다.

외칠 까 말까를 고민하고 있는 데

무던하고 순박하고 해맑은 신랑은

장모 곁으로 스윽 가더니 꼬챙이를 잡고 망치질을 했다.



 "더운데 뭐하러 왔어. 나 혼자 하면 되는데."

 "이걸 혼자 어떻게 해요. 제가 해야지요."

 "반바지 입고 모기가 다 물어뜯겠네, 어쩐데."

 "아니, 이 망할 놈의 멧돼지는 하필 장모님 것을 파먹었대요."

 


나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사위와 장모는 구슬땀을 흘리며 멧돼지를 방어하기 위한

극한의 노동을 3시간 동안 지속했다.

자존심이 강한 우리 엄마는,

멧돼지 방어 작전 좀 하게 같이 가자라는 말을

왜 못하는 건지, 먼저 가신 아빠가 생각나고,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나고,

고구마 밭을 보니 멧돼지를 당장 잡아서 실컷 두들겨 패고

싶은 이 복잡함 마음이 다시 땀으로 쭉 미끄러졌다.



다음 날 아침

눈 뜨자마자 밭에 갔을 엄마가 생각나서 전화를 했다.

멧돼지의 거친 발걸음에

어젯밤 엄마의 텃밭은 잘 버텨냈는지가 궁금했다.


이런 젠장, 그 꼬챙이 따위로 지킬 수 없었는지

멧돼지 녀석은 또 다녀가서는 고구마를 집어삼키고

급했는지 어쨌는지

꿋꿋이 서 있던 옥수수 대를 다 쓰러뜨렸단다.


다행히 이 폭격 속에서도 멀찍이 서 있던 옥수수들은 살아남았다고

안도하는 엄마 목소리에,

마음 같아총 들고 산을 기어올라 멧돼지를 잡으러

뛰쳐 가고 싶었으나

현실적인 방법으로 멧돼지를 버텨낼 수 있는

야무지고 단단한 펜스를 설치하는 것으로 일단락 마무리됐다.



하루 종일 멧돼지 퇴치법을 검색하고, 후기를 읽어보고

눈이 빠져라 핸드폰과 씨름을 하고 있는데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김서방 애써서 내가 옥수수 쪄왔어. 내려와서 가져가."

 "못살아, 이런 걸 뭐하러 해서 와. 더운데, 쉬지."



단단한 펜스가 설치되기 전에

멧돼지가 또 나타날까 봐 옥수수를 다 따왔단다.

알이 작디 작고, 못난이인 엄마표 옥수수는

난폭한 멧돼지 폭격을 바라보고서

바짝 졸았는지 유난히 작아 보였다.

이러한 고난과 역경 속에서 자신의 맛을 지키려고

얼마나 사투를 벌였는지

기대 없이 베어 문 옥수수 알들은 참 달고 찰지다.



옥수수를 보고 있자니

땀에 젖은 엄마의 등판과 한숨이 들리고,

뻘쭘해하며 꼬챙이에 망치질을 하는 신랑의 땀이 보이고,

본인이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속상해하는 아빠의 모습이 떠오른다.




오늘은

단단하고 야무진 펜스가 설치되는 날이다.

멧돼지의 공격에도 끄 없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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