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산악부로 활동할 때였다. 주말 산행이 있는 날이었고, 선발대로 다른 일행들은 먼저 산에 올라가 있었다. 시간대가 맞는 98학번 남자 선배와 둘이 후발대로 산에 올라갔다. 여러 사람이 있을 때는 주로 이야기를 듣는 편이지만, 단 두 명이 있는 경우 어색함을 상쇄시키기 위해 주저리주저리 말이 많아진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릴 때부터 그랬던 것 같다. 포항 출신 선배였는데 운동으로 다져진 다부진 몸매를 가졌고,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인물도 좋았다. 그런 선배와 단둘이, 비록 대중교통을 이용했지만 어쨌든 옆에 붙어 앉아 가는데 어떤 말이든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여야 했다. 상대를 심심하게 하지 말아야겠다는 강한 의무감 같은 것도 한몫했다. 드디어 목적지에 거의 다 와갈 무렵 선배는 잊지 못할 한 마디를 내게 건넸다. "너는 만나서부터 음식 이야기를 하더니, 지금까지 음식 이야기만 하는구나! 진짜 대단하다."
그해 겨울이었다. 매년 부산학생산악연맹에서 주최하는 설악산 동계 합동 훈련이 있어 선배와 함께 훈련생으로 참석했다. 나는 초급반이었고, 선배는 고급반이었다. 날씨는 매우 추웠고, 산장에는 따듯한 물이 나오지 않아 찬물로 머리를 감아야 했다. 머리 위로 찬물이 떨어지기 무섭게 코피가 쏟아졌다. 순간 당황했지만 어쩌랴. 휴지로 코를 틀어막고 머리를 마저 감을 수밖에. 그렇게 아침은 시작되었고, 40리터가 넘는 배낭을 짊어지고 발에는 빙벽화에 아이젠을 끼고 스노우 커버를 신발 위에 감싼 채 빙벽훈련을 하러 출발했다.
20년도 지난 일이라 설악산의 어느 폭포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하루 종일 빙벽을 타면서 후발주자로 빙폭을 찍을 때는 땀을 흘렸고, 밑에서 빌레이를 보거나, 다른 사람이 빙폭을 찍는 모습을 구경할 때는 추위에 벌벌 떨어야 했다. 내 평생에 정말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 또 잊지 못할 추억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군 고마였다.
산에 다니면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주변에 동그랗게 둘러앉아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나누는 경험은 이전에도 했었다. 하지만 설악산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앉아 있는 것은 이전과는 달리 어색했고, 긴장되었다. 그때 선배가 살며시 다가와 건네주는 은박지에 쌓여 있는 검게 그을린 군고마는 뜨거웠고 몸과 함께 꽁꽁 얼어 있는 마음도 녹여주었다.
"뜨거울 때 침낭 밑에 넣어 뒀다가 식으면 먹어"
선배가 고구마를 주면서 건넨 한마디였다. 너무 추워서 침낭 밑에 넣어 두진 못했지만 앉아 있는 내내 고구마를 손에 꼭 쥔 채 추위를 녹였다. 그리고 고구마가 식자 고구마를 감싼 검은 은박지를 벗겨내고, 고구마 껍질을 살며시 벗겼다. 노르스름하게 익은 고구마에서 곧 사라질 듯한 연기가 수줍게 피어올랐다. 고된 설악산 동계훈련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고구마의 온기처럼 따듯하고 훈훈한 추억으로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언제고 다시 산으로 가고 싶은 이유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