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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보언니 Dec 07. 2020

저 실은 승무원입니다만

기내 방송 녹음 파일을 보낸 곳은 바로...


"손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부산까지 가는 OOOO항공 OOO 편 지금 출발하겠습니다."

"Good morning ladies and gentleman...."

승무원들이 기내에서 방송을 하기 위해서는 방송 자격이 있어야 한다. 대부분의 승무원들이 방송 자격 B를 가지고 있고 A로 업그레이드를 하려면 사내 시험을 본 후 자격을 부여받을 수 있다. 사내 방송 시험은 평가 기준이 높기도 하고, 자격을 취득하면 개인고과에 반영되기 때문에 승진을 앞둔 승무원들이 자격 취득을 위해 피, 땀, 눈물을 흘리며 연습했다. 어찌나 A 자격을 취득하기가 어려웠는지 승무원들 사이에서는 방송 고시라고 불리기도 했다.

나 역시 진급을 앞두고 이번에는 기필코 A 자격을 취득하겠다고 결심한 후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방송문을 읽는 연습을 했다. 내 목소리를 녹음해서 들어보며 어디가 부족한지 들어보며 방송문을 거의 외울 정도로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사건이 터진 것은 어김없이 방송문을 연습하던 어느 날 밤이었다. 그날도 저녁을 먹고 집에서 내 목소리를 녹음해가며 방송문을 연습하고 있었다. 친한 동기가 방송 A 자격이었던지라 내가 연습한 것을 녹음해서 동기한테 피드백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사실 친한 동기에게조차 들려주기 부끄러운 방송 실력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라도 방송 자격을 꼭 취득해야 했다.


"언니, 나 지금 방송문 녹음해서 카톡으로 보낼게. 내 목소리 좀 들어보고 솔직하게 피드백해줘. 지난달에도 떨어졌어. 올해 안에는 따야 되는데 점수가 계속 안 나와서 속상해."
" 알았어. 들어볼게. 지금 보내봐."



언니와 전화를 끊고 수십 번 녹음한 연습 파일 중 그나마 제일 괜찮게 녹음한 것을 골라서 언니에게 전송했다. 언니 연락만 기다리고 있는데 20분이 지나도록 답장이 오지 않았다.

싸한 느낌이 들었다. '왜 답장이 없지? 피드백해줄 게 너무 많아서 아직도 들어보고 있는 건가? ' 하고 카카오톡을 확인한 순간. 방송 연습 녹음 파일을 동기 언니에게 보낸 것이 아니라 100여 명 정도가 속해있는 다른 단톡방에 보내버린 걸 알게 되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악!!!! 언니 나 어떡해... 언니한테 녹음파일을 보낸다는 걸 다른 단톡방에 보내버렸어. 아 나 미쳤나 봐... 이미 몇 명이 들은 것 같은데 어떡하지..???"

새벽에 헤어진 구 남친, 여친에게 연락하면 다음날 아침에 한다는 그 이불킥을 내가 기내 방송문 때문에 하게 될 줄이야. 이럴 시간이 없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단톡방에 들어가 봤다.

내가 전송한 녹음파일 옆에 노란색 글자로 99로 쓰여진 숫자는 90, 79, 50 ...으로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내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어쩌면 같은 회사 사람이 단톡방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창피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무엇보다 더 수치스러웠던 것은 내 녹음 파일을 듣고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뇌기능이 정지해버린 것 같았다. 아니, 시간이 멈춘 것 같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때는 메시지 삭제 기능이 없어서 보낸 메시지를 발송 취소하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유독 임기응변에 약한 사람이다. 도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라 아무말도 하지 못한 채 결국 그 단톡방을 나오고야 말았다. 내 목소리를 듣고 익명의 사람들이 뭐라고 말할지 두렵고 공포스러웠다.


그 채팅방으로 말할 것 같으면, 한창 주식 단타에 빠져있을 당시에 들어갔던 오픈 채팅방이었다. 모두가 익명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다행히 그 단톡방에 후배가 같이 속해있어서 후배에게 바로 전화해서 물어봤다.
"OO야. 지금 채팅방 분위기 어때?"
"응? 언니 무슨 말이야?"
"후우... 너 아직 안 봤구나.. 나 요즘 방송 연습하러 다니잖아... 근데 거기에 내 방송 녹음 파일을 보내버렸어. 나 어떡하지? 얼른 들어가서 반응 좀 봐봐. 나 진짜 어떡하지. 너무 창피하고 수치스러워"
"잠깐만.. 확인해볼게 ! 앜ㅋㅋㅋㅋ켘케케켘ㅋㅋㅋㅋㅋㅋㅋㅋ언니!! 이게 뭐야 ㅋㅋㅋ사람들이 이 방에 승무원 준비생이 있었냐면서 되게 귀여워하는데?? 아무도 언니가 승무원이라고 생각 안 하는 것 같아."
"정말?? 아휴 다행이다. 나 너무 놀라서 바로 나와버렸어. 아무 말이나 써서 내가 올린 글 좀 위로 올라가게 해줘. 빨리 빨리!!!제발 부탁이야..!!"

후배와 전화를 끊고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 동시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잠깐만.. 그 녹음파일을 듣고 승무원도 아니고 승무원 준비생이라니...'


다시 단톡방에 들어가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얼굴도 모르는 익명의 그들에게 구구절절 말하고 싶었다.

"아 저 실은.. 승무원 준비생이 아니라 승무원입니다만.."

하지만 승무원 준비생으로 남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들이 듣기에는 현직 승무원이라고 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실력이었나 보다. 몇 개월 동안 나름 열심히 연습했는데 아무도 현직 승무원이 하는 방송이라고 생각을 안 하다니 더 수치스러웠다.

내 모자란 방송 실력을 탓해야겠지. 그 단톡방으로 녹음파일을 잘못 보낸 내 손가락도 함께.




이 일화는 내 지인들 사이에 회자되어 한동안 놀림거리가 되었다. 한 번도 이런 실수를 한 적이 없는데 하필이면 적나라한 내 목소리를 다른 단톡방에 보내버리다니 정말이지 너무 부끄러웠다. 방송 녹음 파일 사건 이후로 나는 "단톡방 포비아"가 생겨버렸다. 다시는 이런 과오를 범하지 않기 위해  단체 카톡방 입력창에  "잠금" 기능을 설정했다.  이런 기능이 있는 줄 미리 알았더라면 내 목소리를 100명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일은 없었을 텐데.
몇 날 며칠을 이불킥을 하다가 내린 결론은 이거였다.

'아, 요행을 바라며 주식 단타 치지 말라는 하늘의 계시다.' 어쨌든 그 날 이후로 주식 단톡방 근처에는 가지도 않게 되었으니 말이다.

나는 아직도 끊임없이 정신 승리를 하며 수치스러운 그날의 기억을 덮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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