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만보언니 Jan 13. 2021

막내 승무원이 라면 먹는다고 혼났습니다

라면만 보면 생각나는 한 사람

 
라면을 끓여 먹는다는 이유로 혼난 적이 있는가. 나는 눈물 콧물 쏙 빠지게 혼난 적이 있다. 때는 바야흐로 입사 2년 차 막내 승무원 시절이다.
승무원 사이에서 힘든 노선으로 탑 3 안에 드는 뉴욕에서 한국 돌아오는 비행기에서였다. 막내인 내가 할 일은 승객 호출 버튼이 울리면 그 누구보다 빠르게 달려가 승객 응대를 하고, 틈날 때마다 화장실 청소를 하는 것이다.

낮비행이라서 대부분의 승객들은 깨어 있었고 시도 때도 없이 승객 호출 버튼이 울려댔다. 화장실은 계속 물기를 닦아도 여기저기 물이 흥건했고 휴지는 금세 떨어져서 끊임없이 비품을 갈아야 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지만 정신없이 일하느라 힘들어서 영 입맛이 없었다.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고 있는데 '딩동' 인터폰이 울렸다.

"OO 씨, 아직 밥 안 먹었지? 앞에 라면 끓여놨어. 교대하고 밥 먹으러 잠깐 와요"
여기서 말하는 '앞'이란 비지니스 클래스 갤리(*승무원들이 일하는 공간)를 말한다. 밥도 안 먹고 일만 하는 내가 안쓰러워 보였는지 부팀장님께서 손수 라면을 끓여주신 것이다. 직전 팀에서도 사무장님과 선배들이 라면 끓여놨으니 먹고 가라고 한 적이 종종 있었다.


일반석 손님에게는 컵라면에 물을 받아서 컵라면 째로 드리지만, 비지니스 클래스 승객에게는 갤리에서 라면을 끓여서 그릇에 담아 드린다. 승무원이 식사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일반석에서 일하는 승무원이 라면을 먹을 때는 컵라면에 먹고, 비지니스 담당 승무원은 라면을 끓여서 먹을 수 있다. 물론, 집에서와 마찬가지로 기내에서도 컵라면보다 끓여먹는 라면이 훨씬 맛있다.

@Kelli McClintock , Unplash


며칠 동안 한식을 안 먹기도 했고 배가 고파서 허겁지겁 라면을 먹고 다시 내 담당 구역으로 돌아갔다. 한 시간쯤 흘렀을까. '딩동'하고 인터폰이 울렸다.
"OO 씨, 잠깐 앞으로 좀 올래?"
나를 찾은 것은 다름 아닌 내 직속 선배였다. 무슨 일인가 싶어 선배에게 갔더니 다짜고짜 나를 꾸짖었다.

"얘, 어디 막내 승무원이 상위 클래스 갤리에 와서 라면을 먹니?"
"네..?"
'사무장님이 라면 먹고 가라고 해서 먹은 건데.. 전 팀에서도 사무장님이 라면 끓여주셔서 선배들과 먹었는데...' 예상치 못한 꾸중에 당황해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비행하면서 여태까지 막내가 비지니스 갤리에 와서 라면 끓여먹는 건 보지도 못했고 들어 보지도 못했어! "
라면 먹었다는 이유로 이렇게 혼날 일인가. 라면 먹고 혼난 게 처음인 데다가 억울하고 속상해서 눈물이 났다.
"죄송합니다."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말은 죄송합니다 밖에 없었다. 막내인 나는 손님에게도 늘 죄송해야 했고, 내 잘못이 아니더라도 직속 선배에게도 무조건 죄송하다고 말해야 했다. 죄송한 일 투성이었다. 내가 잘못을 했건 안 했건 간에 자동으로 "죄송합니다"가 나왔다.




그 후로 먹을 거 가지고 치사하게 뭐라고 하는 선배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나 또한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 선배처럼 되지 말아야지. 밥 잘 챙겨주는 다정한 선배가 되자!'


일찍이 그런 선배를 만나서 반면교사 삼게 된 것이 참 다행이다. 이미 8년이나 더 된 시간이 흘렀지만 라면 먹고 혼난 기억은 두고두고 상처로 남았다.

아직도 비행기에서 라면을 끓일 때마다 그 선배가 생각난다.

이전 05화 승무원에게 기내식은 로또와도 같았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