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19 이후에도 여전히 로또일까
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여행의 꽃, 바로 기내식이다.
비행기에 타자마자 몇몇 손님들은 기내식이 맛있게 데워지는 냄새가 퍼짐과 동시에 호기심에 가득 찬 눈으로 물어보곤 한다.
"밥은 언제 줘요?"
"이륙해서 바로 식사드립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승객들은 기내식 나오는 시간을 기다리지만 승무원들은 그 시간이 잘 끝내야 하는 숙제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승무원들의 업무 능력은 담당 구역 손님들이 원하는 식사를 받았는지, 아닌지로 평가받기도 한다. 손님들이 원하는 식사를 다 받는다는 것은 서비스를 그만큼 빠르면서도 능숙하고 원활하게 진행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기내식 주는 시간이 제일 긴장되곤 했다. 바로 '밀 초이스(meal choice)' 때문이다. 보통 장거리 비행을 갈 때는 3가지 메뉴가 있다. 예를 들면 [비빔밥, 소고기, 닭고기] , 이렇게 첫 번째 식사 때는 항상 한식이 있곤 했다. 내가 맡은 구역의 '밀 초이스'가 맞지 않는 날이면, 여간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대부분의 한국 승객들은 장거리 여행에서 한식이 그리울 거라 생각하여 한식을 많이 주문한다. 돌아오는 비행 편에서도 마찬가지다. 한동안 한식을 먹지 못했기 때문에 한식 메뉴 취식률이 현저히 높기 마련이다. 앞쪽에 있는 승객들이 비빔밥을 많이 주문하면 자연스레 뒤쪽에 앉아있는 승객들은 비빔밥을 먹지 못하게 된다. 불공평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첫 번째 식사 때는 맨 앞줄에서부터 식사를 제공하고, 두 번째 식사 때는 뒤쪽에서부터 서비스를 시작한다. 설사 첫 번째 식사 때 원하는 걸 받지 못하더라도, 두 번째 식사는 선호하는 메뉴를 먼저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문제의 그날도 '아 제발 오늘은 밀 초이스가 맞기를...' 떨리는 마음으로 기내식을 준비하고, 심호흡을 크게 한 후에 카트를 끌고 승객들 앞으로 갔다.
"손님 식사드리겠습니다. 식사는 비빔밥, 레드와인 소스의 소고기가 볶음밥과 함께 나오고, 크림소스의 대구 구이가 있습니다. 어느 것으로 드시겠습니까?"
"비빔밥이요."
"손님, 어느 것으로 드시겠습니까?"
"비빔밥 주세요"
비빔밥... 비빔밥, 비... 비빔밥과의 전쟁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손님들이 '비'라고 입을 떼는 순간부터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기내식을 드려야 하는 손님이 뒤쪽에 까마득하게 많이 남았기에 내 카트에 있는 비빔밥이 줄어들 때마다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기내식을 드려야 하는 손님들이 열댓 명 남았을 때였나. 내 초조한 마음을 알 리가 없는 승객들은 메뉴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옆에 사람들이 비빔밥을 먹는 것을 보고 비빔밥을 주문했다. 결국 준비한 비빔밥의 수량이 다 소진되어, 내가 담당하는 구역의 손님들 중 몇 명이 원하는 식사를 받지 못하게 되었다.
"비빔밥이요."
"손님, 정말 죄송합니다. 오늘 비빔밥이 다 소진되었습니다. 지금은 소고기, 생선이 있습니다. 소고기도 볶음밥이랑 같이 나오고, 대구구이는 으깬 감자와 같이 나옵니다."
원하는 식사를 드시지 못하는 분들께 최대한 정중하게 사과하고, 라면도 같이 드리겠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대부분의 승객들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이해하고 다른 메뉴를 주문하곤 하는데 한 손님이 나에게 다짜고짜 반말로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셨다.
"비빔밥이 없다고? 아니 말이 돼? 아니 내 바로 앞에 있는 사람들은 비빔밥을 먹는데 왜 하필 나부터 비빔밥이 없다는 거야?"
"손님 , 정말 죄송합니다. 오늘 유독 한식 찾는 분들이 많으셔서요. 소고기나 생선은 어떠십니까? 라면이랑 햇반도 같이 드리겠습니다."
"아니!!!!! 다 필요 없고 나는 비빔밥 먹고 싶다니까??? 아 씨X, 비빔밥 당장 가져와!!"
그 손님은 수많은 승객들 앞에서 갑자기 욕설을 내뱉으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당시에 나는 3년 차 승무원이었는데 비행기에서 손님에게 난생처음 듣는 욕설에 손이 떨리고 눈물이 나려고 했다.
'저도 마음 같아서는 비빔밥 만들어서라도 드리고 싶어요. 귀하게 자란 딸인데 왜 욕을 하시는지...?'
내가 그 손님이 미워서 비빔밥을 안 드린 것도 아닌데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한시라도 이 소동을 해결해야 했기에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다. 없는 비빔밥을 만들 수는 없기에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눈물을 꾹 참고 소고기와 생선, 라면 , 햇반, 고추장을 준비하여 그 승객에게 드렸다.
"손님 정말 죄송합니다. 방금 다시 온 기내를 뒤져서 비빔밥이 있나 확인해봤는데 비빔밥이 없습니다.
소고기, 생선, 라면, 햇반 같이 드리겠습니다. 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번째 식사 때는 원하는 식사 드실 수 있게 신경 쓰겠습니다."
밀 초이스가 안된 승객들에게는 죄송하다는 말은 기본이고, 양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나에게 다짜고짜 화를 내며 욕을 했던 그 승객은 머쓱했는지 곧 흥분을 가라앉히고 맥주와 함께 기내식을 먹기 시작했다.
고비를 잘 넘겨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시간이 빨리 흐르기만을 바랐다. 남은 비행시간 동안에는 난데없이 욕설을 한 그 손님 얼굴만 봐도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서 최대한 그 손님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으려 했다.
비행기는 뜨면 내리게 되어있다. 이런 류의 손님을 만날 때면 특히나 시간이 느리게 가기 때문에 늘 되뇌는 말이다.
비빔밥 때문에 한바탕 소동을 치르고 나서, 착륙을 앞두고 안전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손님, 비행기 곧 착륙합니다. 좌석 등받이를 세워주십시오."
"손님, 좌석벨트를 매주십시오."
그때, 아까 그 손님이 조용히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아니, 아까는 미안했어 아가씨.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말이야.."
주위 사람들 눈치를 보며 사과를 건네는 것이었다. '원래 그런 사람인 것 같은데...' 생각하며 웃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야 하고, 내 잘못이 아니어도 손님에게 죄송하다고 사과해야 하는 게 내 일이기 때문이다.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을 비행기에서 배웠다.
승무원들이 일하는 스타일은 다 다르다. 하지만, 본인이 맡은 담당 구역의 손님들에게 원하는 식사를 드리고 싶은 '마음' 하나는 같을 것이다.
10년 비행하면서 나에게 기내식은 로또와도 같았다. 밀 초이스가 제발 맞았으면 하고 바랐지만 내 마음과는 다르게 맞은 적이 거의 없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코로나가 터지기 한참 전의 일이다.
승무원에게 기내식은 더 이상 로또가 아니다. 코로나 19가 터진 이후에는 로또 용지를 살 수 조차 없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