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16도에도 한강을 걷습니다.
"아 뭐야! 깜짝이야!! 도둑고양이잖아!"
어릴 적 나는 어두컴컴한 골목에서 고양이를 만나면 소스라치게 놀라서 소리치곤 했다. 길에서 떠돌이 생활을 한다는 이유로 훔쳐간 것도 없는데 그들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도둑고양이로 살아야 했다. 사람들이 도둑고양이라고 부르니까 나도 별생각 없이 도둑고양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길에서 사는 고양이를 도둑고양이라고 부르지 않고 관심과 사랑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 아마도 내 친구들이 주는 선한 영향력 때문인 것 같다.
내 주변에는 유독 동물을 사랑하는 친구들이 많다. 제주도 여행 갔을 때 구좌읍 종달리에서 아기 고양이를 구조해와서 키우는 달리맘, 백내장으로 이미 한쪽 시력을 잃은 고양이를 입양해서 키우는 하깔이맘, 버려진 강아지들을 임보하고 입양해서 사랑을 듬뿍 내주는 라떼맘까지.
친구들이 고양이와 강아지를 임보하고, 입양하고, 한 생명을 책임지고 키우는 모습에서 내 인식도 조금씩 변하고 있었던 것 같다. 반려견과 반려묘는 사지 말고 입양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길에 사는 고양이들이 더 이상 도둑고양이가 아니라 보살핌이 필요한 고귀한 생명이라는 것도 말이다.
몇 달 전부터 한강에 운동을 하러 나가면, 늘 같은 자리에 있는 검은 길고양이 두 마리가 있었다. 처음에는 귀엽고 신기해서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계절이 바뀌어 눈이 내리고, 영하 -16도까지 내려간 강추위가 계속되자 그 고양이들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따뜻한 집에서 과자나 먹으며 뒹굴거리고 싶은데 자꾸만 고양이들이 눈에 아른거렸다. 목도리를 하고, 두꺼운 양말을 신고, 마트에서 고양이 사료들을 사서 1시간을 걸어갔다. 한강이 깡깡 얼어있었고, 추운 날씨 탓인지 사람들도 거의 다니지 않았다.
늘 고양이를 보는 그 장소에 갔더니 마침 고양이 두 마리가 야옹야옹 울며 앉아있었다. 고양이 간식인 '츄르'를 주려고 다가가자 나를 경계하면서 건너편 골목으로 쏜살같이 뛰어갔다. 나는 꼭 츄르를 주고야 말겠다는 심산으로 고양이들을 쫓아갔다.
고양이가 츄르를 마다하고 도망간 것에 놀라며 따라갔는데, 그곳에는 나를 더 놀라게 한 것이 있었다. 바로 누군가가 고양이들의 보금자리를 만들어놓은 것이다. 아마도 해피를 돌봐주는 사람이 몇 명 더 있는듯했다. 해피의 집에는 사료그릇과 물그릇이 놓여 있었다. 이미 해피와 해피 새끼 고양이가 다 먹어버렸는지 사료 그릇은 텅텅 비어있었고, 영하의 날씨 탓에 물은 얼어있었다.
수년째 그곳에서 살고 있었을 해피,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며 추운 겨울을 나고 있었나 보다. 나는 근처 편의점에서 따뜻한 물을 사서 해피의 그릇에 부어주었다. 추운 날씨에도 해피가 마실 물은 얼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해피에게 사료를 주고 물을 챙겨주느라 겨우 5분 남짓 서있었는데도 너무 추워 발에 감각이 없어지고 손이 얼어버렸다. 이정도로 추운데 밖에서 사는 고양이들은 얼마나 외롭고 추울까.
해피의 보금자리를 알게 된 후로 더 이상 추운 날씨탓을 하며 게으름을 피우지 못하고 있다. '오늘은 한강 가지 말고 쉴까?' 하는 생각이 들 때면 해피의 텅 빈 사료 그릇이 생각나서 하릴없이 옷을 주섬주섬 챙겨입고 나가게 된다. 주머니 가득 고양이 사료와 츄르를 챙겨서 집을 나선다. 해피를 보러 가는 길에도 자꾸만 걸음을 멈춰서 주위를 둘러보게 된다. 어디 숨어있는 고양이가 없을까 하고.
'내 주머니에 있는 식량을 기꺼이 내어줄 준비가 되어있어. 냥이들아 숨지 말고, 얼른 나에게 오렴!'
길고양이들에게 밥과 물을 주는 사람들을 보고 그럴 거면 냥줍 해서 키우라고 말을 할 수도 있겠다. 나는 요즘 많이 쓰는 신조어인 '냥줍'이라는 단어가 불편하다. 길에서 고양이를 줍는다는 말이 과연 옳은 말일까? 마치 길에서 쓰레기나 돈을 줍는 거 마냥 한 생명체를 책임감 없이 가볍게만 여기는 것 같다. 냥줍 대신 길고양이를 '구조'했다거나 '입양'해서 키운다는 단어를 쓰면 어떨까.
나 역시 반려묘 입양을 고려중이다. 알레르기 검사에서 수치화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점수의 고양이 알레르기가 나와서 고민을 하고 있다. 비행 스케줄 탓에 오랜 시간 집을 비워 고양이를 혼자 두게 될까 봐 걱정이 되기도 한다. 내가 한 생명을 온전히 책임질 수 있을 때, 길에서의 고단한 삶보다 훨씬 더 행복하게 해 줄 자신이 있을 때 반려묘를 입양하고 싶다. 아마 그때까지는 지금처럼 1.5인분의 삶을 살 것 같다. 장바구니에 내가 먹을 식재료들을 사면서 길고양이들의 밥을 사는 삶 말이다. 어제도 인터넷으로 장을 보며 길고양이 밥을 사기 위해 드문 사치를 했다. 언젠가 1.5인분이 아니라 나와 내 반려묘의 몫을 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라며.
내 친구들이 나에게 길고양이들을 돌보게 해 준 계기가 되어준 것처럼, 나도 누군가의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길고양이들에게 밥과 물을 주진 못하더라도, 해치지만은 않았으면 좋겠다.
오늘도 해피에게 줄 사료와 따뜻한 물을 챙겨 한강에 나갈 셈이다. 며칠간 밥 잘 먹는 해피가 기특하고 예뻐서 쳐다보고만 있었는데 오늘은 마음속으로 해피에게 이 말을 꼭 해주고 와야겠다.
"사랑스러운 해피야, 수많은 마음이 너를 지켜보고 있어. 곧 따뜻한 봄이 오니 우리 잘 견뎌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