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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정 Apr 09. 2021

18살: 삶의 보석을 나는 잘 몰라

 토요일 저녁, 한적한 기숙사의 밤은 뜨겁다. 우리 학교 기숙사는 2주에 한 번씩 주말에도 학생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기숙사를 열어 둔다. 사감 선생님의 감시도 덜하고, 남는 사람도 많지 않아서 주말의 기숙사는 여유롭고 행복하다. 이 때다 싶어 친구들이 선배나 후배가 자리를 비운 방에 여럿을 초대한다. 사감 선생님의 눈을 피해 새벽에 조용히 친구 방 문을 열고 모여 삼삼오오 가지각색의 이야기를 펼친다. 이 자리에서 학교 안의 가십거리가 매번 업데이트되며, 스트레스를 주는 친구에 대한 험담도 한 번씩 오고 간다. 잘생긴 남자애들 이야기도 빠지지 않고, 부모님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경우도 있다.


 연예와 스포츠, 정치 이야기 또한 빠지지 않는 요소이다.

 대부분 친구들이 연예계에 빠삭하다. 최근 연예계에서는 한 걸그룹 내에서 왕따설이 돈 것이 큰 이슈였다. 친구들은 마치 그룹 내 상황을 두 눈으로 직접 본 듯이 인터넷에 올라오는 찌라시들을 가지고 세세하게 그들의 입장을 들여다봤다. 누가 피해자의 입장인지 열을 올리며 갑론을박을 펼쳤다. 유명 연예인들이 어떤 이슈로 인터넷에 오르내리는지가 우리 또래의 최대 관심사이다.

 306호 내 친구는 인디가수 A를 좋아한다. A의 취향을 하나하나 꿰뚫고 있으며 콘서트에 가기 위해 용돈을 모으고 있다. 유명한 A의 노래가 하나 있는데 나는 그 노래만 기숙사 기상송으로 자주 나와서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친구는 그 노래뿐만 아니라 앨범에 수록된 모든 곡들을 줄줄 꿰고 있다. 현란한 랩 파트까지도 다 외워서 읊으며 다닌다. 또 인터넷에서 A의 사진을 모으는 것이 취미이고, 매일 나에게 A의 사진을 보여주며 귀엽지 않냐고 물어본다.

 202호 내 룸메는 배구를 열심히 배웠던 경험을 가지고 있어서 배구 경기를 정말 좋아한다. 좋아하는 배구 선수의 기럭지와 스파이크를 사랑하며, 배구 경기 직관을 다녀온 경험을 큰 자랑으로 여긴다. 배구를 많이 하다 보니 무릎을 다쳐서 그만두게 된 것을 아쉬워하며, 꼭 서울로 가서 자기가 좋아하는 배구선수들의 경기를 직관할 기회를 많이 갖겠다는 꿈을 품고 있다.

 206호에 학교 모든 친구들과 두루두루 지내는 호탕한 반장은 정치에 관심이 많다. 세대가 바뀌었으면 추구해야 할 방향도 바뀌기 마련인데 여전히 옛 좋은 기억에 머물러서 현재를 볼 줄 모른다면서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연령층 세력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아마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이 많고 뉴스도 많이 보고 어른들에게서 이야기도 많이 들을 것이다.


 관심사에 대해 이야기할 때 친구들은 눈에서 빛을 마구 쏟아낸다. 그 빛이 너무 예쁘게 반짝인다. 무언가에 애정과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매력적인 일인 것 같다. 어느 분야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은 그 사람을 빛나게 한다. 나는 그들과 비교해서 관심사랄 것이 없다. 정말 매력 없는 사람이다. 어떤 분야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게 없어서 대화 속에서도 늘 듣는 입장이 되고 만다.

 핑계를 대자면 다양한 관심사를 가진 어른들의 이야기를 접할 기회도 없었고, 스포츠 경기 관람도, 영화를 감상하는 것도 전부 돈 드는 일이라 거의 해보지 못했다. 방학에 해수욕장에 놀러 가는 흔한 휴가 한 번을 못 겪어 봤다. 문화생활이라고 하면 공부가 끝나고 자기 전에 받은 장학금을 모아 산 엠피쓰리로 듣는 음악이 고작이었다. 내가 관심 있는 것은 남들보다 공부를 잘해서 교대에 가는 것 하나뿐이다. 직장을 가지고 복지 수급자의 자격을 내려놓고부터 남들과 같은 평범한 삶이 시작될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앞만 보고 쭉쭉 달려왔다. 삶의 길 언저리에 놓여 있는 보석들을 들여다볼 줄 모르는 내가 한심하긴 하지만, 돈을 벌기 시작하고 생활에 여유가 생기면 내가 좋아하는 것 하나쯤은 가볍게 시도할 수 있게 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그러면 내 관심사도 생기고 내가 사랑하는 것에 대해 사람들과 폭넓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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