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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정 Apr 07. 2021

16살: 스스로 해결하기

 중학교를 졸업하며 성적 장학금을 받았다. 40만 원이었다. 꼭 기다려 왔던 일을 하기 위해 방학 첫날 동네 피부과로 향했다.


 의사 선생님 앞에서 내 왼쪽 종아리를 걷어 보였다. 종아리를 보여주는 건 너무 부끄럽다. 내 치부를 보이는 것처럼 수치스럽다. 의사 선생님이 내 종아리를 보더니 상태를 설명해 주셨다.


"지금 점 상태를 보면 일반적인 점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가운데로 갈수록 모반의 뿌리가 많이 깊게 박혀 있어요. 피부과에서 하는 점 제거 시술은 레이저를 이용한 건데, 레이저로 제거할 수 있는 범위가 제한적이어서 몇 번 반복해서 받더라도 깊숙이 있는 점 뿌리까지는 제거하지 못할 거예요. 그러면 겉으로 드러나는 점을 제거하더라도 재발할 수 있어요. 여기서 시술을 받아도 확실히 제거된다고 장담을 못 해서, 점이 있는 피부를 절단해 내도록 성형외과를 가는 것을 추천해요."


 다음날 버스를 타고 1시간 거리에 있는 대형병원을 찾았다. 성형외과에 접수를 하고 기다리는데 얼굴에 화상을 입은 사람이 상담실에서 나왔다. 내 차례였다. 들어가자 예쁜 여선생님이 앉아 있었다. 선생님은 혼자 온 나에게 친절하게 자리를 권해주며 무슨 일로 왔냐고 물었다. 의사 선생님에게 다리를 걷어 보여줬다. 꼭 오물이 묻은 것처럼 여러 어두운 점들이 모여 손가락 두 개 만한 얼룩이 져 있었다. 날 때부터 몸에 지니던 것이었다. 엄마가 보기 흉하니 중학교 들어가서 교복 입기 전에 꼭 지워줄게.라고 약속했었다. 피부과에서 들은 이야기를 전달했다. 피부과에서 점 제거가 불가능하다고 이야기를 듣고 온 터라 성형외과에서도 퇴짜를 맞을까 긴장했다. 여기서도 안 된다고 하면 평생 손가락 두 개 크기의 점을 다리에 달고 종아리를 가린 채 살아야 하는 걸까?

 

 "피부과에서는 레이저로 시술을 하지만 성형외과에서는 점이 있는 피부를 잘라내고 꿰매는 수술을 해요. 모반의 범위가 넓어서 레이저보다는 절제술이 효율적이긴 할 것 같아요. 다만 시술이 아니라 수술이라서 보호자 동의가 필요할 거예요. 다음에 부모님과 함께 올 수 있겠어요?"


 "엄마가 어릴 때부터 점 빼는 수술을 해주겠다고 이야기했는데 시간이 없다고 하면서 한 번도 약속을 안 지켜서 저 혼자 왔어요."

 주춤하고 꺼낸 말에 이게 뭐라고 눈물이 왈칵 터졌다. 남들과 다른 모습을 내비치기 부끄러워서 학교에서 여름 교복에 혼자 긴 양말을 신고서 시선을 받고 다녔다. 좀 더 어릴 땐 엄마가 반바지 좀 입으라고 보는 사람이 답답하다고 사람들 앞에서 큰 소리로 타박을 주곤 했다. 유치원 시절 아이들에게서 똥 묻히고 다닌다고 놀림받던 기억까지 떠올랐다.

 "엄마가 바쁘고 약속을 안 지켜서 저 혼자서 해결하려고 왔어요. 보호자 동의가 없으면 절대 안 되나요?"

 엄마에게 말하는 건 정말 싫었다. 이렇게까지 노력했는데 엄마가 예전과 다름없이 시간이 없어서 안 된다고 내쳐버리면 다 끝인 거니까 무서웠다. 이번에도 오랜 컴플렉스가 해결되지 못한 채 내 노력이 끝나버릴까 봐 조마조마했다.

 "그럼 아버지는 어때요?"

 "아버지는 이혼해서 없어요."

 "보호자 동의가 필요하긴 할 텐데.."

 "그럼 외할머니도 괜찮아요?"

 "그럼요. 외할머니는 데리고 올 수 있겠어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의사 선생님이 이어서 말했다.

 "비용이 적지 않게 들 거예요. 어머니께서 모르시면 비용 해결하기가 어려울 거예요."

 "저 장학금 받아서 그걸로 수술하려고 찾아왔어요."

 의사 선생님이 조금 생각하다가 이야기했다.

 "그럼 외할머니와 날짜를 상의해 보세요. 함께 올 수 있는 날을 수술일로 정할게요. 수술 비용은 절제술 범위로 보면 60만 원 정도 될 텐데 20만 원에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

 내가 가진 돈으로는 어림도 없는 수술이었구나. 보호자를 구하는 것이 마지막 관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가격이라는 관문이 또 있었다. 통과되지 못할 뻔했는데 의사 선생님의 호의로 큰 관문을 그냥 넘길 수 있었다. 장학금을 받아봤자 얼마나 받았을까 생각하고 말씀하셨던 것 같다. 가격을 들으니 엄마가 왜 계속 약속을 회피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럼 약속을 말았어야지 하는 원망이 또 들었다.

 "감사합니다."


 아직도 외할머니께 몰래 찾아가 내 상황을 전달하고 설득해야 하는 마지막 과정이 남았다.

 엄마가 고쳐줄게. 지켜지지 않은 이 말은 엄마가 무심해서라기보다는 경제적 여유가 없어서 허공에 남은 것이 맞다. 하지만 그 말은 마치 약이 될 것처럼 내 상처를 벌리고 깊이 들어와선 아무런 효능 없이 이물질로 남아 상처를 곪게 만들었다. 마지막 과정을 잘 해결해서 내 상처가 얼른 회복되면 좋겠다. 가난한 열여섯은 남들과 같은 모습으로 평범한 행복을 추구하는 첫걸음을 스스로 떼야할 나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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