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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정 Apr 08. 2021

17살: 그들과 다른 생활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아낌없이 학업을 지원하고 장학금을 많이 준다는 관외 기숙형 고등학교로 진학하기로 했다. 우리 학교에 홍보를 와서 돈 걱정 없이 공부하고 싶은 학생들에게 최선의 선택이 될 거라고 말하는 선배들을 보고 마음을 굳혔다. 신입생을 받기 위해 배치고사를 쳐야 했는데, 운이 좋아서 높은 점수를 받고 입학 정원의 70%로 인원이 제한되어 있는 기숙사까지도 무료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같은 고등학교에 올라가게 된 친구들과 기숙사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써 내려가며 함께 짐 꾸러미 리스트를 만들었다. 최대한 집에 있는 것만 가져가려고 머리를 굴려봐도 목욕바구니와 삼선 슬리퍼는 꼭 사야만 했다. 샤워실이 층마다 하나씩 있어서 세면도구를 가지고 다녀야 하고, 기숙사 내에서는 슬리퍼 색깔로 학년을 구분했기 때문이다. 아껴둔 장학금으로 할인매장에서 필요한 물건 두 가지를 샀다. 그 외 나머지 물건들은 리스트를 체크해가면서 집에 있나 살펴봤다. 집에 있던 안 쓰는 이불 한 벌과 두꺼운 패딩 하나, 교복과 체육복을 제외한 집에서 입는 옷가지 한두 벌, 스킨로션과 세면도구 정도를 챙기면 될 것 같았다. 집에서 머리를 감으면 대충 탈탈 털고 자연스레 마르기를 기다렸다. 드라이기를 쓰면 다섯 식구가 한 칸의 공간에서 하루 다섯 번씩 사용해야 하기에 소음 피해가 커 잘 안 썼다. 하지만 기숙사에는 모두 다 가지고 올 것 같아 서랍에 박혀 있던 작고 가벼운 드라이기를 하나 찾았다. 짐을 꾸릴 캐리어는 없고 수련회에 갈 때 쓰던 커다란 비닐 빅백에 필요한 물건들을 담았다. 짐이 많지 않아서 이불 가방과 비닐 빅백을 각각 다른 어깨에 메고 혼자서 버스를 타고 학교 기숙사까지 갈 만했다.


 기숙사 첫 방은 3학년 언니 두 명과 옆 반 또래 아이 한 명과 나, 넷이서 함께 쓰게 됐다. 기숙사에 있는 모든 시설들이 너무 좋아 보였다. 샤워실도 아주 넓고 깔끔했고, 나 혼자 쓸 수 있는 침대도 있었다. 화장대도 두 명이서 하나를 썼고, 1층 열람실에는 공부할 수 있는 커다란 나만의 책상이 준비되어 있었다. 나만 쓸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된 옷장까지 있었다. 비록 넷이서 함께 쓰는 방이긴 하지만 개인적인 공간이 전혀 없던 나는 독립적인 영역이 생긴 것이 너무 행복했다. 화장대에 스킨로션, 침대 위에 이불, 옷장 안에 옷가지와 목욕바구니 속 세면도구. 짐 정리가 끝났는데 나보다 먼저 온 또래 아이는 한참 정리를 하고 있었다. 가만히 있기가 어색해서 방 밖으로 나와 기숙사의 시설들을 둘러봤다. 샤워실과 화장실을 확인하고 들어오는데 여전히 물건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무슨 물건이 저렇게 많지? 열람실도 한 번 들렀다 들어오니 대충 정리가 된 것 같았다. 그 친구는 나에게 방이 너무 좁고 춥다고 말을 건넸다. 침대도 푹신푹신한 집 침대와 다르고 서랍도 너무 좁다고 이야기했다.


 네 명이서 함께 생활한 지 일주일 차, 눈에 담긴 것 중 가장 진하게 남은 것은 룸메이트들의 생활 모습이었다.

 그들은 스킨로션 말고 수분크림도 발랐고, 여드름이 생기면 곪지 않도록 붙이는 패치도 서랍에 넣어두고 있었다. 머리를 말리기 전에는 헤어 에센스를 꼭 발랐고, 효율이 좋아서 머리가 빨리 마르는 커다란 드라이기를 썼다. 매일 아침에는 두껍고 포근한 극세사 이불에서 일어났고, 심지어 다른 방에는 침대 매트 위에 라텍스 매트를 덧대어 깔아 두는 아이도 있었다. 선크림과 비비크림을 아침마다 바르고 판 고데기로 앞머리를 마는 부지런한 언니들도 있었다. 있는 대로만 펴 바르고 주는 대로만 덮고 자던 내가 평범한 사람들과 사소한 생활모습이 얼마나 다른지 절감했다. 나는 혼자 쓰는 침대도 감사했고, 수분크림이나 에센스는 꼭 필요한 게 아니어서 써본 적이 없었다. 라텍스 매트도 그렇고, 비비크림도 그랬다. 꼭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살 돈은 없었다. 그들은 그들을 위해 하나하나 신경 썼고, 나는 나를 사소하게 위하지 않고 살고 있었다. 그들이 부러울 뿐, 나에게 좀 더 신경 쓰고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지금 가진 돈이 없는 내 상황에서 최선은 꼭 필요하지 않은 것을 모두 덜어내고 최소한만 살아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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