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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구리 Jul 04. 2024

퇴사 3년 차, 커리어 고찰

그래서그랬어 주인장의 주저리주저리

1. 근황


어제부로 퇴사한 지 2년을 꽉 채웠다. 머쓱한 기분으로 로그인 한 브런치. 과연 2023년에 계획했던 것들을 이루었는가? 또 한 번 고개를 젓게 된다. 언리미티드 에디션은 참가신청서를 제출했지만 보기 좋게 똑 떨어졌고, 29CM 입점 목표는 중간에 그래서그랬어 판매품목을 대폭 정리한 바람에 자꾸 다음번을 기약하며 달력 끝자락으로 밀어내고 있다. 지나치게 호기로웠던 나, 반성하자 반성해...


하지만, 정말 중요한 수확도 있다 : 내가 가진 한정된 자원을 사용할 때의 마음가짐에 작은 변화가 생겼다. 독립을 하기 전에는 시간과 돈을 사용할 때 그것이 눈처럼 녹아서 사라져 버리는 감각만 있었는데, 단순소비가 아닌 훗날의 어떤 기회를 위한 투자로 바라볼 수도 있다는 것을 체감한 뒤부터 작은 배짱이 생긴 것이다. 불안이라는 녀석의 묵직한 궁둥이 아래 하릴없이 깔린 채로 지냈던 2년 전 여름과 비교해 보면, 경험 근육이 생긴 덕분에 이제는 커다란 불안도 어느 정도 끌어안고 지낼 수 있게 되었다.


근 1년 동안은 텐트오피스 업무로 바빴다. 프리랜싱 파트너 난디와 햎럽땡 이름으로 협업하는 경험도 두 차례 해봤다. 사실, 들인 시간과 돈에 비하면 과분할 정도의 외주요청이 들어왔다고 생각한다. 혹시 몇 년치 운을 다 써버리고 있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별다른 홍보나 영업을 하지 않아도 일 하나가 끝나면 또 새로운 일로 연락이 왔던 것이다. 계약서를 작성하고 세금계산서를 떼는 일, 스스로가 지정한 마감일을 채찍 삼아(...) 아웃풋을 내는 일이 이제 조금 손에 익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물음표는 늘 품고 있었고​ 계속 외주에만 벌이를 의존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제는 다음 단계를 고민해야 할 시기가 되었다.




2. 일의 의미


나의 일하는 자아는, 다음의 두 가지를 꼭 챙길 것을 요구한다 : 하나는 의미고, 하나는 재미다. 너무 욕심이 많은가? 하지만 하루 8시간 이상을 일해야 하는데, 그 시간에 의미를 찾지 못하면 못 견디게 공허하고 재미를 찾지 못하면 못 견디게 괴롭다. 그래서 자꾸 직장을 옮겨다닌건지도 모르겠다.


사실 일의 의미... 는 이미 존재하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일에 가깝다는 의견이다. 이는 비단 일의 영역에서뿐만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나 왜 살지?’라는 깜깜한 질문에 대한 답 역시 각자가 창작해 내는 수밖에 없는 것처럼, ‘내가 이 일을 왜 하고 있을까?’에 대한 답도 어찌어찌 만들어보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내가 어찌어찌 만들어 낸 의미들 중 하나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 싶다.


뜬금 질문. 오늘 하루, 어떠셨나요? 우리는 상황에 따라서 하루를 즐겼다고 재잘거릴 수도 있지만, 상당수의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흘려보냈다고도 감각하며 때때로 꾸역꾸역 견뎌냈다고 말할 수밖에 없기도 하다. 그래서그랬어를 통해서 초점을 맞추고 싶은 건 정말이지 견뎌낼 수밖에 없는 나날들을 보낼 때,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다.



나의 신념나무의 줄기를 이루고 있는 생각 중 하나를 슬쩍 꺼내본다 : 낯선 이가 내미는 도움의 손길, 혹은 연고 없는 타인이 베푸는 친절의 경험은 비록 또렷한 기억으로 남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내가 사는 이유를 창작해 내는 과정에서 부지불식간에 꼭 필요한 요소가 되어준다는 생각이다. 마치 존재감은 작지만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조립형 가구의 작은 나사 같은 것, 다정의 경험은 그런 것 같다. 그리고 이는 결국 인생의 어느 무자비한 구간들을 지날 때, 하루하루를 견뎌낼 수 있는 힘으로 작용한다고 믿는다. 타인의 삶에 대한 상상을 게을리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 다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브랜드를 운영하겠다고 말해온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나만의 신념을 브랜드의 코어밸류로 내세워 일을 하자니, ‘인생의 절반도 살지 않은 애송이가...’라는 자기 검열로 인해 종종 자신 없이 말꼬리를 흐리게 된다. 그래서 가끔 근거가 되어주는 책이나 누군가의 문장을 발견하면, 둥지를 짓느라 마땅한 재료를 모으기에 분주한 새가 좋은 나뭇가지를 발견한 것처럼  반가운 기분이 드는 것 같다. 아래의 캡처 역시 들뜬 마음으로 물고 온 나뭇가지라고 볼 수 있겠다. (원본영상링크​)


출처 : 최재천의 아마존


5월에 햎럽땡 채널에 업로드한 유튜브 영상​에서, “훗날 운영하게 되는 가게가 친구네 집에 놀러 가는듯한 경험을 제공하는 공간일 수도 있지 않을까 “라고 말하며 그 근거를 브런치에 적겠다고 얘기했었다. 그건 게스트하우스 아닐까요,라는 질문이 돌아올 수도 있지만 내가 생각하는 건 단순한 공간 대여가 아니다. 약한 연대를 맺고 있는 관계에서 기대할 수 있는 개인맞춤형 다정을 제공하는 것. 그건 이야기를 들어주는 걸 수도 있고, 믿거나 말거나 타로를 봐주는 걸 수도 있고, 차나 커피를 내려주는 걸 수도 있고, 그저 같은 공간에 말없이 머무는 걸 수도 있겠다. 제공하는 입장에서는 예상 외로 강도높은 감정노동을 요하는 서비스일 수도 있겠다는 노파심을 배제할 수는 없다. 건강하게 해내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의 공간에서 어떤 시스템으로 운영을 해야 할까? 이걸 고민하는 게 나에게 주어진 숙제다. 킷사텐의 특징이나, 모티프원 같은 숙소에서 조금씩 힌트들을 얻어 짜깁어보고 있다.


지금의 희망회로는 이렇다 : [텐트오피스 업무] 대 [그래서그랬어 업무]의 비중을, [그래서그랬어 애착사물 업무] 대 [그래서그랬어 공간 운영]의 비중으로 옮겨가는 것. 그러려면 구멍가게 장사하듯 쫌쫌따리 팔고 있는 그그의 애착사물을 어떻게 성숙시켜야 하나...?


자연스럽게 다음 주제로 넘어가 본다.



3. 일의 재미


당연한 얘기지만, 일이 재밌으려면 자기효능감이 있어야 하고, 성장의 가능성이 보여야 하는 것 같다. 초심자라서 서툴더라도, 어제보다 더 나은 내일의 내 모습이 그려지기만 한다면 신나서 하게 된다. 일이 재미없었던 적은 거의 없는데,  마음을 사로잡는 이야기나 눈길을 사로잡는 시각물에는 늘 흥미가 있었고, 사람들이 그런 걸 필요로 한다는 것, 그리고 내가 그런 걸 어느 정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 뿌듯했기 때문이다.

 

특히 브랜딩을 위한 디자인 업무는 회사를 나온 근 몇 년간 더욱 재미있었다. 전공자도 아니며 딱히 누군가에게 배운 적도 없고, 조직에서의 직무도 디자이너였던 적이 없다는 약점을 오히려 방패 삼아 부족한 결과물도 그냥 일단 인터넷 세상에 팍팍 내놓았다. 실력이 점점 좋아질 거라는 자신이 있었다. 실제로 2년 전에 3D 독학을 시작했다며 올린 인스타그램 스토리와, 가장 최근에 만든 3D 결과물을 나란히 놓고 보면 어느정도의 발전이 보인다.


(좌)2년전과 (우)지금


그런데 올해 초 부터 스스로의 성장에 대한 기대도 폭삭 깎이고 방향성도 잃게 된 바람에 ‘디자인 노잼시기’가 찾아왔다. AI 때문이다. 이미 너무 빠르게 너무 잘한다 (신세 한탄은 이미 여기저기 했던 바 있다). 잘 활용하면 그만이지, 왜 그렇게 울적해하냐고들 말한다. 설명을 시도해보겠다.


신세한탄 2


웹사이트 제작을 의뢰받아서 작업을 진행 할 때, 내 요구대로 챗지피티가 짜준 인터랙션 코드가 매끄럽게 작동하는 것을 감상하면서 안도의 한숨을 쉬곤 한다. 잠깐 프론트엔드로 커리어를 전향할지 고민하면서 코딩공부를 찍먹 했던 시절이 있기 때문인데, 빠르게 포기했기에 망정이지 그때 적성에도 안 맞는걸 끙끙거리며 익혔더라면 지금 얼마나 허탈할지를 상상해본다... 조금 아찔하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똑같은 걱정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이제 와서 일러스트나 블렌더의 자잘한 기능을... 하나 더 익혀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럼 앞으로 내가 훈련해야 하는 건, 핀터레스트에 없는 것(이라는게 이젠 존재하는지도 모르겠지만...)을 구상해 내는 독특한 상상력과 AI를 내 입맛대로 다룰 수 있는 명령의 기술일까? 그렇다면 생판 다른 분야의 일을 해왔던 사람이 더 잘할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그동안 느꼈던 종류의 재미를 계속 찾을 수 있을까? 확신이 없다.



혼란스러운 나는... 일단 물성에 집착해 보기로 했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방향이기는 하지만,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패배감과 맞물리는 시기가 이렇게나 빨리 찾아오게 될지는 몰랐다. 고민 끝에 좌표를 찍은 곳은 재봉틀과 텍스타일 실크스크린인데, 외할머니도 엄마도 취미로 재봉을 다루는 걸 보면, 왠지 테일러의 기질이 흐르는 것 같기도... (?)


아무쪼록 작업 과정에서 물리적인 소리도 나고 손맛이라는 것도 존재하는 것들과, 기존의 내 강점이었던 사람 냄새나는 스토리텔링으로 승부를 보겠다는 생각이다. 인공지능 따위(?)는 할 수 없는 일이니까. 공장에 의존하거나 재고에 연연하지 않고 신상을 후룩후룩 뽑아보기도 좋고, 소량만 제작해서 한정판이라는 희소성을 내세우기도 좋다. (혹시, 난 결국 작가가 되고 싶은 걸까..?)



이 둘을 익혀서 자기 효능감도 찾고 성장의 기대감도 찾고 일의 재미도 되찾는 것. 외주작업의 비중을 축소하고 애착사물 판매로 입에 풀칠을 할 가능성을 엿보는 것. 못다 한 29CM 입점과 언리밋 참가도 해내는 것... 그것이 내가 설정한 독립 3년 차에 이루고 싶은 목표다.


글이 길었다. 일하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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